저 별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

15년 동안의 반려를 잃고 난 후의 슬픔과 추억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6월의 어느 일요일.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눈물을 쏟고 말았다. 삶아놓은 새끼고구마. 그건 입맛을 잃은 귀동이를 위해 마련한 음식이었다. 두어 달 전 반려견 모임에서 강아지들을 위해 으깬 고구마로 반려인들이 직접 미니 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이 있었는데, 우리 먹깨비 귀동이가 완성된 케이크에 달려들어 허겁지겁 두 개나 해치우는 바람에, 곱슬곱슬한 얼굴 털에 온통 고구마가 묻어 범벅이 된 바람에, 모인 반려인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고 민망해진 나는 ‘내가 평소에 널 굶기기라도 하디?’라며 슬그머니 꼬리를 잡아당겨야 했던 그때가 생각나 삶아놓았던 고구마. 끝내 몇 입 먹지도 못하고 남긴 고구마 그릇을 보고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앞에 주저앉아 울었다.

올해로 열다섯 살 된 나의 반려, 우리집 작은아들 귀동이는 한 달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그즈음 어딘가 기운이 없고 걸음이 느려지는 것이 관찰되어 병원에 데려갔지만 처음에는 원인을 알지 못했다. 미용을 받은 후 갑자기 다리를 떨기 시작해서 미용 스트레스로 인한 근육통인지도 모르겠다고 진통제부터 먹였지만 차도가 없었다. 동네 동물병원에서는 CT 촬영이 가능한 큰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고 그렇게 해서야 우리는 아이의 몸에, 전립선에서 시작한 암이 공격적으로 척추까지 퍼져서 이제 손을 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암입니다. 길어야 두 달.” 드라마 속 대사가 아닌 내 앞에 떨어진 현실이었다. 내 작은 강아지가 암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오진이 아닐까?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해주라구요? 저 아이가 뭘 좋아하더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울면서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그 날로, 귀동이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참 이상했다. 암이라는 말을 마치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병원에 다녀오는 길로 상태가 나빠진 귀동이는 곧 혼자 힘으로 비틀거리면서라도 걷지 못하게 되고, 밥과 물을 먹지 않게 되고, 누워있다가도 잠시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찾지도 못하게 되었다, 암은 선고를 통해 더욱 맹위를 떨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약을 설탕 시럽에 반죽해 입 안에 넣어 주었으나 점차 그것도 삼키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환자식인 뉴케어를 주문해 밥 대신 목으로 흘려 넣었다. 주사기로 몇 종류나 되는 약과 물을 먹이고, 기저귀와 새 시트를 샀다. 편히 몸을 받치도록 새 방석도 몇 개 마련했다. 귀동이가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필요한 물건들은 늘어만 갔다. 친구집 고양이가 쓰던 반려용 유모차를 빌려, 이제 움직이려 들지 않는 아이를 담요에 싸서 집 근처 공원을 찾았다. 좋아하던 풀 냄새를 맡게 해 주고 싶었다.

짧은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

건강했을 때의 귀동이는 정말이지, 쉬지 않고 곁을 맴도는 아이였다. 아침 출근 준비를 하다가 귀동이한테 걸려 넘어질 뻔하는 건 일상이었다. 아침 눈 뜨자마자 내 발목 곁에 붙어서 졸랑졸랑 따라다니는 습관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달려와 품 안으로 파고들었고 주말에 늦잠을 자기라도 하면 어서 일어나라고 작고 부드러운 혀로 재촉을 했다. 그러던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고서는 내 곁을 찾지 않았다. 그건 우리 일상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였다. 아이는 내게 등을 돌리고, 침대 구석에서 그저 웅크리고 있었다. 쓰다듬어 주려다 잘못 만져서 몸이 아플 때는 사정없이 나를 물기도 했다. 그게 너무나 서운했다. 아플 때는 사람을 피하는 것이 동물들의 본능이요 습성이라서 그런다고 했다. 알면서도 너무나 섭섭했다. 왜 내 곁에서 아프다고 하지 않니. 왜 혼자 동굴로 숨으려고 하는 거니. 나를 믿어주지. 같이 있지. 왜.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귀동이를 옆에 눕히고 잠이 들었던 밤에. 아이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비척비척 내 목덜미를 파고들더니, 제 얼굴을 내 뺨 위에 턱 올려놓고, 그러고는 포옥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잠이 들었다. 그때 귀동이는 6킬로가 넘던 체중이 4킬로 정도로 줄어 있던 때라 그 몸이 한없이 가볍고 작게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했었다. 내 숨과 아이의 숨이 섞이고, 우리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고 있던 그때,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날 밤에서 사흘도 지나지 않아 귀동이는 떠났다.

나름대로 이별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도 알아보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닥친 이별은 역시 너무나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6월 11일 아침. 출근도 하지 못하고 급작스레 상태가 나빠진 귀동이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병원에서 아이는 심정지가 왔다. 심장충격기든 에피네프린이든, 무엇이든지 한 번이라도 더 깨어날 수 있게 해 주기를, 우리가 서로의 눈을 보고 품 안에서 마지막 이별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이는 수술대 위에서 그냥 떠나고 말았다. 처음 선고를 받았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반찬통 하나에 담긴 고구마를 다 비우지도 못하고, 아이는 내 곁을 떠났다. 핸드폰을 붙들고 남편에게 병원으로 와 달라고 울부짖었다. 의사와 테크니션 선생님들이 마지막 고통의 흔적을 처리하고 깨끗이 씻긴 아이의 몸을 내 품에 안겨 주었다. 나는 남편이 올 30분 동안 동물병원의 작은 진료실에서 귀동이와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귀동이의 마지막 모습. 사진제공: 주호
귀동이의 마지막 모습. 사진제공: 주호

그 힘들었던 날, 사람을 움직이게 해 주는 건 시스템이었다. 동물병원에서는 연결해 준 김포의 반려장례식장에서는 우리를 위해 차를 보내줬고 아이를 화장하는 모든 절차를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따스한 느낌의 조명으로 채워진 하얀 방 안에서 기다렸다. 화장하는 절차는 남편이 지켜보았다. 나는 차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가 아마 하얀 재가 된 뼛가루를 옮겨 담는 차례였는지, 공중으로 날리던 하얀 가루가 꼭 영혼같이 보인다고 생각을 했었다.

늦은 오후. 작은 상자에 담겨 집을 나간 귀동이는 더 작은 상자에 담겨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유골함을 서랍장 위에 올려두고, 귀동이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과 모자를 옆에 두었다. 나는 그 길로 너무 지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안방에 여기저기 널려 있던 주사기며 약병이며 유동식이며 기저귀 등속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오는 걸음으로 그 물건들을 치워버린 건 나를 생각하는 남편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아이의 흔적이 사라질 것인가. 우리는 15년을 함께 살았는데. 우리의 일상이 서로 깊게 스며 있는데. 아침저녁 샤워를 하다가도 이 물줄기 아래에서 너를 목욕시킨 생각이 나는데, 냉장고를 열면 아직 고구마가 그대로 있는데. 방바닥에는 아직 밥그릇이 두 개, 목줄도 두 개인데. 옷도 모자도 두 벌씩인데. 이제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하나밖에 없다니.

반려인들이 많이들 기억하는 유명한 카툰 이미지가 있다. 천국에 방금 도착한 사람을 향해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오고, 앞에서 신이 말한다. “오 자네가 바로 밥이로군! 렉스가 지난 50년간 자네 얘기를 어찌나 하던지 말일세” ‘강아지 혹은 반려동물 마중’으로 구글에서 검색하면 그 내용에 영감을 받은 다른 창작품들이 우르르 떠오를 정도로, 반려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이미지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까지는 그 이미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내가 천국에 갔을 때, 먼저 간 반려동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꼬리를 치며 달려 나온다’는 내용을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나는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뭘 그리 좋은 사람이고 좋은 반려였다고, 먼저 간 아이들이 수십 년이나 나를 기다리고 기억을 해야 할까. 반려인들이 말하는 강아지별 혹은 고양이별, 젖과 뼈다귀가 넘쳐흐르는 그곳으로 간다면 더이상 아프지 않고 신나게만 놀면서 세상에서 고생했던 일들, 하필 가난하고 우울한 반려인을 만나서 요즘 내 동년 반려들은 다 거기서 논다는 애견 펜션이니 수영장 한 번 못 가본 것, 자주 산책도 못 했던 것, 고급 사료와 맛난 쇠고기 간식을 매일 먹지 못했던 것 따위 다 잊고, 아니면 천국에서 새롭고 착한 반려를 만나서 행복하기를. 그러다 혹여 신의 가호로 다시 세상에 오게 된다면 비루한 현생은 잊고 정말 행복한 삶을 살기만을 바랐다. 아니 그렇게 바란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잃은 후,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그 마음은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잊어도 된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를 잊지 말아줘. 나도 잊지 않을 테니까”라고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그것만이 세상에 떠나고 없는 생명과 우리가 관계를 맺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생명은 유한하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언젠가는 모두 우리 곁을 떠나거나 내가 먼저 떠나게 된다. 그걸 알고 있기에 사람들은 이별도 순순히 체념을 하게 되리라, 받아들일 것이라 마음은 먹겠지만 그건 쉽지 않다. 상실의 고통. 아이가 가고 나서 나는 그야말로 어쩔 줄을 몰랐다. 아직도 내 팔에, 내 뺨에, 그 따뜻하고 부드럽던 온기가 남아 있는데. 그런데도 정작 비어 있는 내 팔을 보며 밀려드는 허무함과 상실감은 살을 베어내는 것 같은 실재하는 고통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팔에 남아 있는 감각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그건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우리에게 남은 건,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너를 꼭 다시 만나고 싶어. 그러니까 너도 나를 잊지 말아줘.

건강했던 날의 귀동이와 달고나. 사진제공: 주호
건강했던 날의 귀동이와 달고나. 사진제공: 주호

귀동이는 떠났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곁을 지켜주는 반려 달고나가 있다. 사실 달고나는 귀동이의 친아빠다. 우리 신혼집에서 태어나 내 손으로 탯줄을 끊은 첫 생명인 귀동이도, 그 아이의 엄마인 달님이가 우리 곁을 떠나도록, 열 여섯 살의 노견 달고나는 비교적 건강하게 내 곁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어서 녀석도 눈이 하얗게 바래고 푹신하던 털은 윤기를 많이 잃었다. 멀지 않은 세월 안에 또 한 번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준비를 한다고 해도 준비되지 않고 무력한 슬픔의 폭풍우가 나를 휘감고 갈 것도. 그러나 나는 반려와 함께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체온을 나눴고 서로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내생까지도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믿는다. 서로 잊지 말자는 약속, 다시 만나면 꼭 기억하자는 약속이.

주호

황선영 또는 글 쓰는 주호. 세기말 천리안 통신 활동에서 走狐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을자치와 도시재생활동가. 공유경제와 공유밥상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자. 성북동에서 곰과 강아지와 함께 산다.

댓글 3

  1. 안녕하세요.저희14살노견도 전립선암 판정을 오늘받고..지금 울다지쳐서 검색을 하는디 이 글을 보았어요.혹시라도 시간되실때 이메일하나만 보내주실수있을가요. 여쭤보고싶은게 있어서요. 아픈기억을 꺼내려고 해서 죄송해요

    1. 저는 4월2일 아픈강아지를 유모차에 잠깐 올려놓았는데 떨어져서 숨을 헐떡이며 놀란눈으로 제 곁을 떠났습니다
      천사같은 내아가 천국에가서 편히 쉬거라 모든 업장 지울수 있게 엄마가 수행할테니 아무 염려말고 기다려ㅡ엄마가 곧갈떼니까ㅡ

  2. 어쩌다가 읽게 되었는데 정말 속절없이 울었네요…ㅠㅠ 저도 우리 쿠키 7년째 반려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보내줘야하는 날이 오겠죠… 아무리 준비해도 준비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담담히 써내려가신 글에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편안한 하루하루 보내고 계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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