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변주

그것은 때로는 삐리리로, 혹은 삐삐리로 표현하지만, 그들끼리 의미가 전달된다. 정해진 기표가 없는 것이다. 그저 삐리리, 삐삐삐, 삐리삐의 절대적 변주만이 있을 뿐이다. 단지 리토르넬로의 연속적 변주인 이 휘파람 언어가 왜 중요한가? 우리의 삶이 욕망의 절대적 변주 속에 있다는 것, 의미화된 질서는 우리의 욕망을 응고시키고 단속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2017년 겨울, 서울시립미술관 라틴 아메리카 특별전에는 아주 특이한 예술작품이 전시되었다. 갈라 포라스 김(Gala Porras Kim)의 <휘파람과 언어 변용>(Whistling and Language Transfiguration)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멕시코 오악사카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 스페인 지배자들에 저항하기 위한 휘파람의 변주로 이루어진 사포텍 언어를 사용한 것을 직접 음성으로 기록한다. 휘파람 언어는 다른 언표처럼 의미를 고정시키는 명사도 의미를 진행시키는 동사도 없다. 예를 들면, 정찰을 맡은 사람이 마을쪽으로 이방인이 접근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했을 때, 그 휘파람 소리 어디에도 ‘이방인’이라든가, ‘마을’이라는 의미로 고정된 음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삐리리로, 혹은 삐삐리로 표현하지만, 그들끼리 의미가 전달된다. 정해진 기표가 없는 것이다. 그저 삐리리, 삐삐삐, 삐리삐의 절대적 변주만이 있을 뿐이다. 단지 리토르넬로의 연속적 변주인 이 휘파람 언어가 왜 중요한가? 우리의 삶이 욕망의 절대적 변주 속에 있다는 것, 의미화된 질서는 우리의 욕망을 응고시키고 단속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런 절대적 변주의 과정을 접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은 ~이다”라고 의미화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 포섭과 포획의 의미의 그물망이 작동할 수 없다는 것, 의미화와 모델화가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탈주하는 자의 표현양식에 주목할 수밖에 없으며, 욕망의 지도제작의 가능성만이 남게 되는 일련의 과정과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나 돌고래처럼 음악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생명의 분자되기의 지평을 살짝 조망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의 변주가 갖는 화음 속에서 리듬에 따라 박자에 따라 몸을 들썩이거나 손짓을 하거나 코를 킁킁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그저 ‘느낌적인 느낌’만이 의미를 해석하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탈영토화의 흐름의 연속 속에서만 기억과 리듬을 묘사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인디언들에게도 관찰된다. 인디언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성인식의 의미로 산으로 홀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 일정기간 동안 혼자 살아가면서 자연과 생명의 언어를 체득한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tn 있는 것은, 말이 없다는 것이 기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별자리, 미생물, 벌레, 나비, 꽃, 동물 등은 제각각의 기호를 발산한다. 이렇듯 욕망의 향연은 말보다 비기표적 기호계인 냄새,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맛 등에 의해서 풍부해지고 다양해진다. 인디언들은 언어를 고도로 발전시키기보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알 수 있는 오감 혹은 육감을 발전시킨다. 그들은 이웃의 문을 두드리며 방문할 때조차도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저는 어둠입니다.”, “저는 바람입니다”, 저는 돌멩이입니다“라는 말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표현한다. 그래도 서로가 누군지를 알게 된다. 이는 곧 새의 언어와도 유사하다.

방울새는 맹금이 선회하며 날면 다른 종류의 새가 부르는 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더욱이 이런 다른 종류의 새들이 만약 가까운 곳에 있으면 이 정보의 덕을 보는 것은 물론이다. 거의 구별되지 않는 이러한 외침소리에 개시는 지극히 천천히 퍼져가, 맹금[육식조류]으로 하여금 발신자 새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도와주는 두 귀의 듣기 비교 측정을 할 수 없게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펠릭스 가타리, 『기계적 무의식』(2003, 푸른숲) P.170

이렇듯 탈주하는 자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도주선을 그린다. 쫓고 쫓기는 자의 게임,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숨 막히는 포획과 탈주의 과정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 변주로 자신을 표현한다면, 욕망의 도주선은 매끄럽게 포획의 그물망을 빠져 나가게 된다. 소수자운동은 이러한 사포텍 휘파람 언어와 같은 절대적 변주에 따라 매끄러운 욕망의 도주선을 형성할 수 있다.

이 글은 신승철 저, 『모두의 혁명법』(2019, 알렙)에 실린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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