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되기

노숙인되기 즉 부랑아되기는 광인되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바살리아(Franco Basaglia)는 “광기의 척도는 자유의 척도다”라는 말을 통해서 노숙인되기의 야성적 사유, 광야-무의식, 광기가 예속이 아닌 자유라는 점을 보여준다. 노숙자가 된다는 것은, 통속적인 삶에 맞서 거리에서 농성하거나 끊임없이 주류의 삶을 교란하는 것과도 같다.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는 노숙인되기를 부랑아되기라고도 부릅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부랑아다!”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이유인즉슨, 재벌이든 구두닦이이든 간에 세상 어느 누구도 맨몸뚱아리로 태어나 맨몸뚱아리로 죽는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소유물이나 명예, 권력도 무덤까지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런 노숙인되기를 응시한 철학자로 디오게네스(Diogenēs, Sinope)가 있지요.

디오게네스는 키니코스(Kynikos-)학파 혹은 견유(犬儒)학파라고 불리는 사상적 맥락 속에 위치합니다. 견유학파는 쉽게 말해 ‘개 같은 생활’ 즉 걸식생활을 통해서 문명사회를 벗어나 자유로운 사상을 전개하고자 하는 사상입니다. 왜 하필이면 걸식생활이냐며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요. 가진 것 하나 없이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는 삶이 어찌 보면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여기서 저기로 가볍게 횡단하는 자유로운 삶일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대 사람들은 견유학파의 문명비판적인 사상을 시니시즘(cynicism)이라고 불렸으며, 오늘날 ‘시니컬(Cynical)하다’라는 말은 ‘문명을 냉소하면서 자유를 찾겠다’는 의미에서 견유학파가 만들어낸 사상적 맥락을 가진 단어입니다.

디오게네스는 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현자입니다. 그는 무엇도 가지지 않고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를 신과 지혜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거리에 놓인 나무통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통 속에 들어앉아 햇볕을 쬐던 디오게네스를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왔습니다. 이 현자의 지혜가 탐이 난 알렉산더가 자신의 권력을 은근히 과시하듯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들어 주겠소”라고 말하자, 디오게네스는 “당신 그림자 때문에 내 통에 그늘이 생기니, 햇볕을 가리지 말아 달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권력이나 돈은 부질없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누리는 햇빛 한줌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늙은 철학자의 가르침을 듣고, 알렉산더 대왕은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이었을 것이다”라며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는 길 위의 철학의 전통에 선 사람이었으며, 노숙이라는 것이 단지 처참한 빈곤과 무지함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유와 현명함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숙인은 길 위의 철학자의 자유로운 사고만큼이나 어디든 떠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고정관념이 아닌 자유와 횡단의 사유가 노숙이라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노숙인되기 즉 부랑아되기는 광인되기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바살리아(Franco Basaglia)는 “광기의 척도는 자유의 척도다”라는 말을 통해서 노숙인되기의 야성적 사유, 광야-무의식, 광기가 예속이 아닌 자유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사실 냄새나고, 횡설수설하고, 어딘가에 머무르지 않는 노숙인들은 표준적인 삶을 냉소하고 독특한 자유의 지평으로 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노숙자가 된다는 것은 통속적인 삶에 맞서 거리에서 농성하거나 끊임없이 주류의 삶을 교란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도 다가옵니다. 다시 말해 디오게네스와 같이 개 같은 생활을 자처하고 거리로 나서는 것이 던져주는 야성적인 광기와 그것이 가진 자유의 비밀을 노숙인되기는 살짝 알려줍니다.

이 글은 신승철・이윤경 共著, 『체게바라와 여행하는 법』(2016, 사계절)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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