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상관없이 온갖 먹거리를 살 수 있는 시대이지만 그래도 요즘 마트에 가보면 햇과일과 햅쌀, 햇곡식 코너를 꾸며 놓고 제철 먹거리로 손님들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과, 배, 감, 대추, 밤, 쌀, 콩 등이 있지요. 이들 햇과일과 햇곡식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네. 이들은 모두 풀 또는 나무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쌀이 열매라고요? 그렇습니다. 벼에 핀 꽃이 수정하여 맺힌 열매의 껍질을 벗긴 알맹이가 쌀이지요. 벼에 꽃 핀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요? 도시에 살면서 벼에게도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이 없으니 거기에 핀 작고 하얀 꽃은 못보고 지나쳤겠지요. 하지만 햅쌀로 갓 지어낸 밥이 맛나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쌀이 벼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벼꽃은 그렇다 치고 감, 대추, 밤꽃도 본 적이 없다고요? 꽃이 작거나 잎의 색과 비슷한 연록색이라 잘 못 봐서 그렇지 이들도 분명히 꽃이 있습니다. 그러니 열매를 맺은 거지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는 꽃을 피웁니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이야기라고요? 그럼 반대로 꽃을 피우는 모든 나무는 열매를 맺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다래라는 과일을 아시나요? 먹어보신 분들은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실 겁니다. 다래는 우리가 수입해 먹는 뉴질랜드 키위의 사촌쯤으로 흔히 ‘조선의 키위’라고 하는데 이미 고려 시대 유명한 가요 「청산별곡」에 나올 만큼 오래된 우리 나무의 열매이지요.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들어는 보셨지요? 다래는 연둣빛이 도는 하얀색 귀여운 꽃을 피우는데, 특이한 건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나무에서 피는 ‘암수딴그루’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 여자나무, 남자나무가 따로 있는 거지요. 그러니 남자나무는 꽃이 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한국 고유종으로 향이 아주 좋은 미선나무도 암수딴그루라 오직 암나무만이 꼬리를 단 부채(미선, 尾扇)라는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수꽃을 피우는 수나무는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암꽃에게 꽃가루를 전달하여 암나무가 열매 맺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요즘 길거리에서 열매를 밟을까 싶어 피해 다녀야 하는 은행나무도 열매를 맺는 암나무와 그렇지 않은 수나무가 따로 있는 암수딴그루입니다.

이런 암수딴그루 나무 중에서 수꽃을 피우는 수나무들은 ‘꽃을 피우는 모든 나무들은 열매를 맺는다’는 명제에 어긋나는 나무들입니다. 그러니 수나무에게 가서 ‘넌 꽃을 피웠지만 열매는 맺지 못하는 나무구나’하고 비난하면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동물에게는 따로 있는 것이 당연한 암컷과 수컷이 식물에 있다니까 오히려 이상한가요? 사실 대부분의 나무들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더라도 한 나무 안에서 피어나는 암수한그루이거나, 한 송이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을 모두 가진 양성화를 지닙니다. 우리말로는 ‘암수갖춘꽃’이라고 하지요. 사과, 배, 복숭아, 자두, 살구, 포도 등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과일나무는 암수갖춘꽃을 피웁니다. 아삭아삭함과 새콤달콤한 맛과 향으로 사랑받는 사과나무는 장미과 집안답게 다섯 장의 꽃잎과 하나의 암술, 여러 개의 수술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향기로운 하얀 꽃을 피우지요.

오직 열매 맺는 것을 목적으로 사람들이 키우는 사과나무이지만 나면서부터 꽃을 피우지는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꽃 피는 나무는 첫 꽃을 피우기 전에 어느 정도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과나무는 씨앗으로부터 첫 싹을 낸 후 약 7년 정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첫 꽃을 피웁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들지만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서 잘 자라는 유럽너도밤나무는 첫 도토리를 맺는 데까지 30년이 넘게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십 수백 년을 살아갈 나무 입장에서는, 초반에 서둘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는 오랜 기간 동안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초를 든든히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겁니다. 먼저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키를 키우고, 훌쩍 큰 키에 쓰러지지 않도록 몸통을 키우고, 뿌리를 깊고 넓게 하여 물과 양분을 충분히 확보하고 커가는 키와 몸을 단단히 받쳐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거지요.
그러니 꽃을 피우는 나무일지라도 아직 자기만의 시간을 다져가며 준비하고 있는 어린나무에게 가서 ‘넌 꽃도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구나’하고 비난하면 자연의 섭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잊지 마세요. 유럽너도밤나무의 어린 시기는 최소 30년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호황과 불황이 순환하듯이 자연 속 나무들에게도 열매가 많이 열리는 해와 적게 열리는 해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이를 해거리라고 하지요. 식물학자들은 해거리가 생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한자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양분이 한정되어 있어 한 해 많은 열매를 만들고 나면 다음해 꽃을 준비해야 할 영양분을 축적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를 걸러 열매 수가 조절된다는 거지요.
놀라운 건 이렇게 해거리를 하면서 나무들은 그 열매를 먹고 사는 동물들의 수도 조절한다는 겁니다. 어쩌다 풍년이 들면 동물들이 먹고도 남은 열매가 새로운 싹을 틔우고, 이듬해 흉년이 들면 여유로운 풍년에 태어나 배불렀던 동물들 중에 굶어 죽는 경우가 생깁니다. 물론 먹고 남은 열매도 없겠지요. 하지만 다시 풍년이 들면 이를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의 수가 줄어 있으니 먹고도 남은 열매가 또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는 거지요.
사람들이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인위적으로 물과 비료를 넣어주고 꽃을 따거나 어린 열매를 솎아내어 매년 일정하게 열매 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해거리는 자연의 순환질서인 셈이지요. 그러니 해거리하는 나무에게 가서 ‘넌 꽃도 열매도 겨우 맺는 나무구나’하고 비난을 하면 자연의 순환질서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꽃 피우는 나무라도 수꽃만 피우는 수나무이거나, 아직 어려 (잊지 마세요. 유럽너도밤나무의 어린 시기는 최소 30년이라는 것을) 첫 꽃을 피우지 않은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해거리를 하는 나무는 열매를 적게 달지요. 하지만 우리는 늘 꽃이 있으면 열매가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언제나 나무에게 열매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도 성과를 기대하지요. 특히 꽃을 아끼듯 너를 아끼기 때문이라며 가까운 가족 간에 더욱 큰 기대를 겁니다. 학년이 올랐으니 작년보다 등수를 올리라고, 진학을 하라고, 취업을 하라고, 연봉을 올리라고, 승진하라고, 결혼을 하라고, 아이를 가지라고, 차를 사라고, 집을 사라고, 더 큰 차를 사라고, 더 큰 집으로 옮기라고, 이런 끝없는 기대와 요구 속에서 이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늘 성공적일 수는 없지요. 그럴 땐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 상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토록 노력했는데 불합격이라니, 결과가 겨우 이거라니, 더 노력했어야 했나, 왜 난 이 모양일까, 남들 보기 창피해서 어쩌지 하며 전전긍긍합니다.
혹시나 거둘 열매가 없고 보여줄 결실이 없는 것 같아 쓸쓸한 마음이라면 가까운 숲을 찾아 거닐어 보실 것을 권유드립니다. 지금 숲 속에는 남의 기대에 휘둘리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각자의 역할과 자신의 시간을 따라 많든 적든 자기만의 열매를 거두는 나무들이 묵언수행 중입니다. 어쩌면 올해 거둘 열매가 없는 나무는 어제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와도 비교하지 않으며 자연의 순환질서를 따라 그저 오늘의 나로서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느라 결실이 아닌 성장을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의 가을일뿐입니다. 거둘 열매가 없어도 다시 새로운 계절이 올 것을 알기에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 가을, 다른 이들의 시끄러운 기대를 벗어 놓고 숲 속에서 나무들과 함께 고요히 나의 시간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