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찜통 안의 만두가 된 기분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미, 온 지구촌이 담긴 찜통은 매년 더 커지고 뜨거워지고 찌는 시간도 길어진다니 걱정입니다. 인류 모두가 힘을 합쳐 당장의 기후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고 함께 실천해도 모자랄 판에 이곳저곳에서 편을 갈라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과연 우리에게 시원한 미래가 있을지 답답합니다.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숲을 찾아 가는 길에 만난 나무와 풀들도 엄청난 무더위에 모두 풀이 죽어 있습니다.

풀들이 한여름 더위에 풀이 죽어 있다는 말을 써놓고 보니 ‘눈에 눈이 들어가면 눈물이냐, 눈물이냐?’ 같은 말놀이가 생각나 국어사전을 찾아 봤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첫 번째 풀은 ‘초본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목질이 아니어 줄기가 연하고, 대개 한 해를 지나고 죽는다’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풀은 ‘세찬 기세나 활발한 기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또 다른 풀, 즉 ‘쌀이나 밀가루 따위의 전분질에서 빼낸 끈끈한 물질. 무엇을 붙이거나 피륙 따위를 빳빳하게 만드는 데 쓴다’는 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풀 먹인 옷의 빳빳한 기운이 풀려 흐물흐물해진 것을 보고 ‘풀이 죽었다’고 한다는 거지요. 써 놓고 보니 이 단락에서만 풀이라는 글자를 열 번이나 썼네요. 날도 더운데 그만 풀풀거리겠습니다. 그저 어서 더위가 한 풀 꺾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열세 번 썼네요.

사전에 따르면 풀은 초본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나무는 목본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풀과 나무, 초본식물과 목본식물은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무가 무엇인지 풀이 무엇인지 누구나 다 알지만 실제로는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은 식물의 분류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 나무와 풀을 구분하는 기준은 크고 굵게 그리고 오래 살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먼저 ‘목질부를 가지고 있느냐’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지만 쉽게 설명하면 ‘추위, 바람, 벌레, 병균 등이 주는 상처와 피해를 견딜 수 있도록 줄기나 가지에 나무껍질처럼 질기고 단단한 것이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풀은 한해살이인지라 목질부를 만들 여유도 없고 필요도 없어 연한 줄기를 갖습니다. 두 번째는 ‘겨울철에도 지상부가 존재하는가’입니다. 다시 말해 혹독한 겨울에도 땅 위에 식물의 존재가 있느냐를 보는 것이지요. 한 해 겨울을 넘어서 오래 살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한해살이가 대부분인 풀은 겨울에 지상부가 남아 있지를 않지요. 세 번째로 ‘겨울눈이 있는가’입니다. 나무는 다음 해에 자라날 잎과 꽃을 품고 보호하는 겨울눈이 있지만 풀은 여러 해를 살지라도 지상부 없이 땅 속 뿌리나 알줄기로 겨울을 나기에 뚜렷한 겨울눈을 만들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수고생장(樹高生長)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피생장도 하는가’입니다. 키만 크는 게 아니라 줄기도 굵어져 지속적으로 몸을 크고 굵게 만들 수 있는가를 봅니다. 마지막으로 ‘나이테를 만드는가’입니다. 한 해가 아니라 여러 해를 계속해서 부피생장을 하여 몸에 나이테를 만들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니 결국 크고 굵게 오래 사는지를 묻는 것이지요. 이 다섯 가지 기준에서 하나라도 벗어나면 나무가 아닌 풀로 분류합니다.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상식 속에 있는 풀과 나무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지요? 그런데요 이 기준에 따르면 이름에도 나무라 되어 있는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랍니다. 죽순 단계에서 정해진 굵기대로 키만 자랄 뿐 줄기가 매년 굵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테도 없으니 나무라는 기준에서 두 개나 벗어난 여러해살이 풀인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나무도감은 대나무를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대나무는 도감 어디서 찾을 수 있냐고요? 초본식물 또는 풀도감에서 벼과 식물 편에 가면 벼나 밀, 옥수수와 함께 대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무라고 부르냐고요? 생물학적으로는 벼과 초본식물이지만 용도 면에서 나무와 같이 목재로 쓰였기 때문에 대나무라 부른다고 국립수목원은 설명합니다.

대나무만 그런가요. 이국적 풍경을 만들어주는 야자나무도, 모두가 좋아하는 바나나도 나무라 부르지만 나이테가 없어 나무의 기준을 벗어난 다년생 풀입니다. 열대지방에 자라는 나무는 겨울이 없으니 나이테도 없지 않느냐고요? 우리 땅에서 자라는 나무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건기와 우기에 따라 나이테를 만든답니다. 뭐 사람들이 자기들이 만든 기준에 따라 구분하여 나무라 부르든 풀이라 부르든 대나무는 개의치 않고 수천만 년 전부터 그랬듯이 오늘도 맑고 시원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푸르고 푸르게 서있을 뿐입니다. 바닷가를 지키는 야자나무도 맛있는 열매를 맺는 바나나도 그저 자기 삶에 충실할 뿐이지요. 풀이네 나무네 나누고 구분하는 건 자연과 상관없이 그저 사람들이 만든 일에 불과합니다.

혹시나 크고 굵게 그리고 오래 사는 나무가 풀보다 더 강한 것이라거나 더 진화한 것이라 생각하는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나무가 살지 못하는 높은 산이나 추운 극지방, 바닷가나 사막지역에도 풀이 자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진화론적으로는 나무보다 풀이 훨씬 나중에 생겨났답니다. 애초에 크네 굵네 오래 사네 강하네 하는 것들도 사람이 정한 사람의 기준일 뿐입니다. 풀과 나무는 구분없이 각자 자신에게 맞는 환경에 다양하고 개성있는 방식으로 크거나 작게 오래 살거나 빨리 생을 순환하거나 하며 살아갑니다. 이 다양성과 개성이 지금의 지구생태계를 만들어 온 거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의 종 호모 사피엔스 안에서도 성별, 피부색, 출신, 종교 등 온갖 것들로 서로 나누고 구분하고 차별하고 배제하여 전쟁조차 불사하며 상대편을 몰살시키지 못해 안달입니다. 가뜩이나 더운데 열 받는 얘기는 그만하겠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풀과 나무가 한데 엉킨 곳을 수풀이라 합니다. 그리고 숲은 수풀의 줄임말이라 합니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새 한 마리, 사람 하나, 찾아온 생명 어느 하나도 나누지 않고 구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시원한 품으로 안아 주는 숲에 가서 숨 좀 쉬다 오렵니다. 그저 어서 더위가 한 풀 꺾이기를 바라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