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적 평등이 도달목표가 아닌 기본전제가 된 젊은 세대들을 바라보며

50대 중년의 나이를 가로지르면서 이제야 살림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살림의 미세한 결들을 따라가면서 돌봄, 즉 정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서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돌아볼 줄 알게 되었다.

1.

동네 시장에 수박을 사러 갔다. 한 통에 3만 원이란다. 비싸다. 대신 참외 몇 개 담아 왔다. 수박 먹는 즐거움이 아쉬워서 검색창을 돌려 본다.

“수박은 밤 기온이 20도 초반일 때 잘 크는데 최근 열대야로 재배지 기온이 25~27도까지 치솟으면서 제대로 크지 못한 이유가 가격 상승 요인이다.” “수박은 밤 기온이 떨어지지 않으면 수확기 이전에 내부가 익어버려 판매하지 못하는 상품이 나온다.”

올여름 수박 먹는 일은 단념했다. 참외를 먹으면서, 내년에는 뒹굴뒹굴 큰 수박 하나 껴안고 사각사각 먹고 있는 시원한 여름날 저녁 시간을 버킷리스트에 한 줄 올렸다.

공동체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아이들을 살리는 살림살이의 활동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그걸 모르는 것은 남성들뿐이다. by RODNAE Productions  출처 : https://www.pexels.com/fr-fr/photo/fille-en-chemise-a-manches-longues-rayee-bleue-et-blanche-tenant-une-vadrouille-bleue-5591863/
공동체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아이들을 살리는 살림살이의 활동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그걸 모르는 것은 남성들뿐이다.
사진 출처 : RODNAE Productions

살림을 도와주던 자리에서 시작해 어찌어찌하다 살림을 맡고 있다. 아침은 아내가 준비한다. 고구마나 감자를 굽고 토마토나 ABC 주스를 만든다. 식재료는 내가 준비해둔다. 점심은 각자 해결하고 저녁은 밥을 하고 제철 채소로 준비한다. 가끔 찌개나 국을 끓이거나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다. 설거지, 음식쓰레기, 분리수거는 내 전담이다. 일주일 한 번 기대에 20% 능력 부족한 로봇청소기 도움받아 대청소도 한다. 화장실 청소는 아내가 쭈욱 전담해주고 있다. 세탁기 돌리기, 말리고 뒷정리도 내가 한다. 생활비 통장도 관리하고 있다.

돈 버는 일이 없어졌다. 몇 년 버틸 수 있었지만 올 초에 마음이 불편했다. 고심한 끝에 그만두기로 했다. 덩달아 외부 강의 활동도 접었다. 특별한 대책은 없다. 그렇게 나는 어정어정하다 살림을 맡게 됐다. 50대 끝자리에 갭이어(Gap year)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갭이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년여 기간에 걸쳐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찾고 앞으로의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을 말한다.

주로 중소기업 임·직원으로 지냈다. 더불어서 협동조합, 마을, 도시재생 활동을 하고, 특별히 중장년 대상 강의도 했다. 활동하면서 자신의 기질을 볼 수 있어 의미가 있었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성향과 타인의 시선에 의식을 많이 한다는 걸 발견했다. 아내 핀잔 들으면서도 줄이지 못했던 책 욕심, 둘러보지 않고 큰소리로 대화했던 장면들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동안 저질렀던 많은 일을 해결하지 않고 설렁설렁 건너뛰며 구멍마개(stopgap) 눌러두고 대충 때우듯 지나왔다.

이제는 시간 부자로 살고 있다. 단순해진 매주 일과다. 하루는 북한산 의상능선-비봉능선 길을 걷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온종일 산 주인 행세하다 내려온다. 나머지 날은 집 근처 카페에서 그동안 읽지 않고 쌓아뒀던 이 책 저 책 들춰 본다. 대충 눌러두었던 구멍마개도 하나둘 열어서 진득하게 살핀다. 그러다 보니 요즘 젊은 세대 고민들이 함께 겹쳐 보인다. 밑줄 긋고, 스크랩했던 글에서 제목 관련해 옮겨 적는다.

2.

여성의 살림은 공동체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아이들을 살리는 살림살이의 활동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정동(affection)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정동노동이라고도 말합니다. 살림은 마법과 같은 신비한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힘들고 지칠 때 활력을 갖게 해주고, 흐트러진 것에 질서를 잡아주고, 음식에 맛과 향을 주고,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고 웃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요.

신승철, 「고양이 챙기는 정동노동, 남편 챙기는 감정노동」

정신적 현상들은 정서들과는 달리, 정동들은 신체와 정신에 똑같이 관계한다. 사실상,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정동들은 유기체 전체에 담겨 있는 삶의 활력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며, 신체의 일정한 상태를 사유의 일정한 양태와 함께 표현한다. 그래서 정동적 노동은 편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또는 열정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다중』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감정이다.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기억에 붙어있는 감정, 즉 정동(affect)이 우리의 무의식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최면요법으로 정동의 증상이 나타난 시기를 이야기하면서 다시 기억하고 말을 하다 보면 그 정동이 풀어지고 증상이 사라질 수 있다.

김석, 「차이나는 클라스 103회」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만큼 남성들이 여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평행선’이다. 여성들이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을 이중으로 떠안게 되면 여성들은 가랑이가 찢어지고 남성들은 방관자가 된다.

임아영, 황경상 『아빠가 육아휴직을 결정했다』

고전파 경제학과 사회학은 자립할 수 있는 합리적 경제인이 인간의 전형이라는 핵심 가정을 고수해 왔다. 어렸을 때와 병들고 노쇠해졌을 때 모든 인간이 내보이는 의존성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불평등을 발생시킨다. 사람들의 사랑과 돌봄에 대한 요구가 충족되는 정도에서 나타나는 불평등과 이 요구들을 충족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이 그것이다.

캐스린 린치, 『정동적 평등』

‘조선시대 여자’ 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도(婦道)를 지키며 인내하고 순종한 현모양처를 떠올리기 일쑤이지만, 이러한 생각은 5천 년 한국사에서 불과 150년도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에 형성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부터 시작해서 특히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모습이다.


음식과 의복 마련 등 안살림은 주로 여자가 담당하고, 농사를 지어 양식이나 반찬거리를 마련하고 그 밖의 재산 증식, 노비 관리, 자녀 교육, 가족 돌보기 등 바깥 살림은 남자가 담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남녀 간 성별 역할이 엄격하게 나뉘거나 고정화되지는 않았고 상황에 따라 변동되었다.

정창권,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3.

한국의 20대 남성은 자신들이 누군가를 배려해야 할 강자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은 일자리 부족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입고 있는 집단이다. 학점과 필기시험이 당락을 좌우하는 공무원, 공공부문이 최고 직장인 시대에 남성이라는 사실은 차라리 페널티에 가깝다. 여자도 군대 가라고 외치는 이유다. 사실 이들이 가장 분노하는 대상은 여성 등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이들에게 배려를 요구하는 기성세대의 기득권 남성이다. 이 ‘매너 좋은’ 남성들은 좋은 시절을 실컷 보낸 다음, 그 미안함을 자신들의 양보가 아니라 젊은 세대의 남성들에게 미룬다고 20대 남성들은 믿는다.

한귀영, 「20대에 대한 예의」

20대와 30대 청년을 중심으로 젠더 갈등이 크게 심화하였다. 빈부와 이념을 놓고 갈등하는 중장년 세대와 달리 청년 남성과 여성은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서로 크게 달랐다. 지금 대한민국 청년세대는 성차별을 제도적으로 해소하기 시작한 이후 태어나 가부장제적 성역할로부터 자유롭고, 성평등을 체화하며 성장한 세대이다.

일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경쟁하며, 평생 비정규직에 머물 수 있는 청년들은 특정 성별을 적극적으로 우대하는 할당제에 강하게 반발하며 공정성에 입각한 성평등을 주장한다. 청년 여성은 취업 후 차별적 구조와 여성 안전 문제를, 청년 남성은 역차별을 각각 주요 문제로 제기하는 한편, 고용 및 노동에서의 여성 차별에 대해서는 남녀 모두 공감하고 있다.

오재호, 「젠더갈등을 넘어 성평등한 사회로」

이정민 대표는 “밀레니얼 여성들은 또래 남자아이들과 똑같이 키워져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알파걸이 많은데, 정작 사회에 나와 예상과 달리 남성 위주 현실에 맞닥뜨리다 보니 연대의식에 눈뜨게 됐다.”는 것이다.

이철승 교수는 불평등의 세대』에서 네트워크로 똘똘 뭉쳐 21세기 한국형 위계 구조의 정점에 있는 386세대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청년과 여성을 꼽은 바 있다. 둘의 교집합은 젊은 여성. 2010년대 후반 들어 급진화된 페미니즘의 부상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공정성이라는 가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최근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정규직 전환 조치에 쏟아진 젊은 층의 분노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준봉, 「차별에 민감한 젊은 여성들, 공정성의 가치와 연대에 눈뜨다」

4.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난쟁이와 함께 있는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
왕자 앞에 한 소녀가 보인다. 마치 지나가는 사람이 사진 안에 잘못 들어온 것처럼 그려진 소녀는 의전을 수행하는 중이다. 소녀는 왜소증 장애인이다. 엄격한 예법대로 살아가는 왕족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살아 있는 장난감 취급을 받기도 했고, 왕자의 용모를 좀 더 돋보이게 하는 열등한 비교품이 되어야 한다. 왜소증 장애인들은 왕족의 고귀한 혈통을 부각하고 자긍심을 북돋아 주는 ‘장치’로 활용돼왔기 때문이다.

이유리, 「‘장치’로 활용된 소녀의 신산했던 삶」, 한겨레 [토요판] 그림 속 여성 ⑮벨라스케스, ‘난쟁이와 함께 있는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차이를 극복하고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사랑의 본질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과 타자의 발견이 사랑의 진정한 기능입니다. 사랑할수록 나르시시즘으로 빠지라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존재를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거죠. 사랑하면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차이를 극복하려는 순간 폭력이나 억압이 되기 쉽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타자를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김석, 「인간의 욕망은 무엇일까」

그들의 일은 이른바 ‘정상적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알겠는가? 정상적 상태라는 형벌이며 고통을…… 만일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징벌의 목적으로 인간을 빚었음이 틀림없다. 끊임없이 먹어야 하고 싸야 하는 과제를 죽을 때까지 행하도록 만들다니! 다만 정상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전생을 바쳐야 하는 숙제는 참혹하다.

김갑수, 『나의 레종 데트르』

우리가 왜 길을 잃어야 하느냐고요. 왜냐하면 길을 잃는 것은 우리가 모르던 것을 발견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들로 구성된 세상에서 길을 잃고서 모르는 것들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조차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앎의 지평을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아는 것들의 세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윤장래

새로운 주거형태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공동체주거’에 대해 연구와 활동하는 협동조합 조합원이다. 베이비부머세대 막내이고 아내와 함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기업과 벤처기업, 출판사 직원, 상조(장지)사업 이력을 가지고 있고, 출판기획자와 강사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하루는 서울근교를 걷거나 북한산 산행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책을 읽거나 유튜브와 현장 강의를 들으며 지낸다. 사람과 책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오십 이후 성 역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후, 일상의 자잘함을 주도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또, 책을 수집하는 강박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다. 바람은 자신의 본성에 대한 충실함과 이웃과 조화로움의 균형적인 삶이다. 가까이는 아내와 함께 자전거 타고 마을과 이웃들을 기웃거리는 일상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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