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 고통, 자각, 살 – 『육화, 살의 철학』 「서론 : 육화에 대한 질문」을 읽고

근대적 객관성의 추구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살로 자신이 이루어져 있음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게 된 듯 싶다. 살은 쾌락과 고통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분리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는 것임도 근대의 일상에서는 인식되지 않았던 듯싶다, 미셸 앙리의 저서 『육화, 살의 철학』은 우선 이 점을 상기시킨다.

왜 말이 아닌 살인가?

『육화, 살의 철학』에서 육화(肉化)라고 번역한 불어 단어 incarnation와 같은 철자의 영어 단어 incarnation을, 『영한엣센스』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셸 앙리 저 『육화, 살의 철학』, (자음과모음, 2012) /
MichelHenry, Incarnation une philosophie de la chair, Édition du Seuil, 2000)
미셸 앙리 저 『육화, 살의 철학』, (자음과모음, 2012) /
MichelHenry, Incarnation une philosophie de la chair, Édition du Seuil, 2000)


① 육체를 갖추게 함; 인간의 모습을 취함.
② 화신(化身), 권화(權化)
┈┈• the ~ of health 건강의 화신
┈┈• He is the ~ of honesty. 그는 정직 바로 그 자체다.
③ 구체화, 체현(體現).
④ 〖醫〗 육아(肉芽) 발생.
⑤ 어떤 특정 시기〔단계〕(의 모습)
┈┈• a former ~ 전세(의 모습).
⑥ (the I-) 성육신(成肉身), 강생《신이 예수로서 지상에 태어남》.

영어 단어 incarnation과 뜻이 비슷한 낱말인 영어 단어 embody를, 『영한엣센스』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사상·감정 따위를) 구체화하다, 유형화하다.
② (작품·언어 따위로 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다《in》
┈┈• ~ democratic ideas in the speech 민주주의 사상을 연설로써 구체적으로 나타내다.
③ (주의 등을) 구현하다, 실현하다; (관념·사상을) 스스로 체현하다.
④ 일체화하다, 합병〔통합〕하다.
⑤ 수록하다, 포함하다
• The book embodies all the rules. 그 책에는 모든 규칙이 수록되어 있다.

영어 단어 incarnation에 대한 설명들 가운데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아마도 ‘⑥ (the I-) 성육신(成肉身), 강생《신이 예수로서 지상에 태어남》’인 듯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 미셸 앙리(Michel Henry, 1922~2002)가, 예수가 살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한 것을 상세히 해설하는 가운데 ‘살’에 관해서 설명하고, 그 살을 세계 인식의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앙리는 살을 말/말씀과 대비시킨다. 기독교 『성경』 〈요한복음〉 1장 1절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가 그리스 어문으로 번역될 때는 ‘로고스(λόγος, logos)’로 번역되었다. 그리스어 단어 logos는 말/말씀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법(理法)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유럽 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로고스를 지성과 동일시하고 있다. 우주 최초의 상태를 혼돈으로 보는 사상가들은 앞서 인용한 〈요한복음〉 1장 1절을 하나의 비유처럼 사용하여 마치 역사의 어느 시점에 실제로 혼돈에 질서가 부여된 듯한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실제로 그러한 시점과 사건이 있었다고 이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상가들은, 말씀의 그리스어 번역어 로고스에 이법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거론하면서 뭔가 확연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 즉 미분적(未分的) 상태 속에 이미 법칙성이 내재하여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차, 애초에 그 법칙성을 세계에 투여하여 세계를 창조하였을런지 모르는 어떤 신적 존재가, 피조물의 일원이기에 그 법칙성을 이미 자신의 내면에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스스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그들 각자의 내면에 깃들어있음을 일깨워준 것의 기록처럼 〈요한복음〉 1장 1절을 해석해서 사용한 듯하다.

이에 비하여, 앙리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 주목하였다. 그 절은 다음과 같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에 ‘육신’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앙리는 ‘살’이라고 이해하고 말과 대비시킨다. 말과 살,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여기에서 영어 단어 incarnation에 대한 『영한엣센스』 사전의 설명 가운데 ‘③ 구체화, 체현(體現).’이라고 한 부분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말:살=추상적:구체적. 앙리가 살에 주목할 때 그의 생각 속에서는 이 대비로 설명할 수 있는 사고가 작동하고 있었던 듯하다. 기독교 『성경』 〈요한복음〉이 인용되고 있고, 그것이 중요한 사고의 단서로 작용하고 있기는 하나, 유럽의 지성사에서 정작 앙리가 문제 삼고 있는 기간은 18세기 말에서 시작하여 21세기 초에 이르는 200여 년 간의 시기인 듯하다. 앙리는 유럽에서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했던 시기에 그것을 밑받침하였던 이성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이성은 사람의 내부에 있는 것이겠지만 마치 사람으로부터 벗어난 곳에 관찰의 거점을 설정하고 사람을 포함한 세계를 관조(觀照, contemplation)할 수 있는 것 같은 태도(attitude)를 취한다. 이러한 태도에 입각한 세계의 대상화(對象化, objectification)와 형식논리학(formal logic)의 사용이 21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빠른 속도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앙리는 이러한 흐름을 묶어 말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한 후, 그것에 대비되는 것으로 살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겉보기에는 앙리에게 육화(肉化, incarnation)는 문자 그대로 말에서 살로 관심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바꾼 후에 중요해지는 것은 육화가 아니라 살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앙리는 세계의 일원이면서도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세계를 바라보는듯한 태도의 인식론으로부터, 사람이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에 더 강조점을 두는 인식론으로 옮아간 것이다. 그의 시도와 유사한 시도가 19세기 말부터 이미 있어왔음에도, 21세기를 눈앞에 둔 2000년에 앙리가 이러한 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다소 특이해 보인다. 그러나 앙리가 19세기 말의 사상가들보다 한발 더 나간 것도 있는 듯하다. 바로 살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살

앙리는 자신을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존재로 설명하고 자신의 인식론, 자신의 철학도 그와 다름없는 활동이라는 생각을 내비친다. 그러기에 앞서 그는 먼저 모든 생명체의 공통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화는 그 말의 첫 번째 의미에서 지상의 모든 생명체와 관계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육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11쪽] “육화된 존재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들이 신체를 가진다는 것이다.”[11] 여기에서 육화라는 말을 빼고 생명체는 모두 신체를 가진다고 했어도 무방할 듯 보인다. 그러나 육화라는 말을 쓰면 육화 이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된다. 혹시 앙리가 육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거기에는 자신이 제시하는 철학 이전의 철학이 모두 제대로 된 생명체의 철학이 아니었다는 비아냥도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런 표현이 비아냥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진지하게 신체를 다음의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우리의 신체”[13]와 “길가의 돌멩이 혹은 그것을 구성하는 미소한 원자들 사이의 차이가 문제인 우주의 타성적 물체와 같은 신체”.[13] 이어서 그는 두 종류의 신체에 각각 살이라는 이름과 신체라는 이름을 붙여 구별한다. “우리는 첫 번째 의미로 신체를 살(chair)이라고 부를 것이며, 신체(corps)라는 단어의 사용은 두 번째 의미에 한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살은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살은 그것 밖에 존재하는 다른 신체를 느낄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만져질 수도 있다. 이런 것은 우주의 타성적 신체에게는 원리상 불가능한 것이다.”[13~14쪽] 이런 식이라면 자기 이전의 철학들은 우주의 타성적 신체 달리 말하자면 그저 주어진 대로 있는 신체들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빼낸 듯한 자세를 상상 속에서 취한 후 마치 자기가 세계를 관조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폐적인 놀이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에 비하여 살로서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철학은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것’이라고 앙리는 강변한 셈이다.

“육화된 존재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들이 신체를 가진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 Liam Riby
https://unsplash.com/photos/F6I3xUuIViA
“육화된 존재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들이 신체를 가진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 Liam Riby

앙리는 다시 한 번 타성적 신체와 살을 구분한다. “육화는 ‘살을 가진다’는 사실에, 더 나아가 ‘살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육화된 존재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겪지 못하는, 그래서 자기 자신도 다른 사물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타성적인 신체가 아니다.”[14] 이렇듯 앙리는 근대적 문명의 주체를 타성적 신체로 자리매김하면서, 거기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살이 되는 것과 자신이 제시하는 구체적 인식론, 새로운 철학을 동일시하였다.

앙리는 새로운 철학을 수행하는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굵은 글씨로 강조한다. “비가시적인 인간이면서 동시에 살을 가진 인간에 대한 정의, 더 정확히 살로서 비가시적인 인간”[42] 앙리는 이러한 인간이 “필연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연결된 사유의 대상들의 연속적인 나열이 아니라 그것은 실재와 관계한다.”[42쪽]고 설명한다. 앞서도 시사한 바와 같이, 그의 새로운 철학은 추상적인 인식론에서 구체적인 인식론으로 전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적인 삶의 본질 그 자체이며 삶의 말씀 안에서 삶의 자기-계시로서 삶의 자기-생성(auto-génération)의 운동이다.”[43쪽] 그는 철학을 운동이라고 적었다. 어찌 보면,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니만치, 철학 또한 운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그리스적 전통에 입각한 근대의 주요한 철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세계 밖으로 나가서 세계를 관조하는 태도를 설정하는 것을 세계 이해의 계기(契機, momentum)로 삼았었는데, 앙리는 이제 그 효용이 소멸되었다고 판단했던 19세기의 세기말적 사조를 2000년에 새삼 재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그의 철학은 19세기 세기말의 철학보다는 개인의 실존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이는 듯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떤 삶(la Vie)도 삶(la Vie)이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며 삶(vie)이 되는 이 최초의 살아있는 자기를 자신 안에 지니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이 최초의 살아있는 자기 안에서 삶(la Vie)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며 삶(vie)이 된다. 어떤 삶(vie)도 살아있는 자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어떤 살아있는 자도 삶(vie)이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면서 자기 안에 도래하는 이 운동 밖에서는, 즉 삶(la vie)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44쪽] 그는 대문자 삶(la Vie)과 소문자 삶(vie)을 구분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마지막으로 쓰인 ‘삶(la vie)’은 아마도 ‘삶(vie)’으로 고쳐 써야 할 듯하다. 대문자 삶은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며’ 소문자 삶이 되는 ‘최초의 살아있는 나’를 대문자 삶 자신 안에 지녀야 한다고, 앙리는 적은 것이다. 여기에서 대문자 삶과 소문자 삶은 각기 다른 괄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거기에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극단적 양면 가운데 한 극단을 각각 넣어도 될 듯하다. 그리고 대문자 삶도 자신 안에 지녀야 하는 것이라고 앙리가 강조한 ‘최초의 살아있는 나’는 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앙리는 말, 즉 이법을 기본으로 하는 그리스적 전통으로부터 살의 철학으로 전환함을 선언한 셈이다. 그런데, 사상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 살은, 회기적인 발상이었음에도, 전혀 새로운 발명은 아니었다.

쾌락과 고통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분리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는 살

앙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새로운 인식론을 간명하게 제안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로 나아갔다. “살과 신체에 대한, 그들의 수수께끼와 같은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명시화는 우리에게 탐구의 두 번째 주제인,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육화’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이것의 토대는 요한의 “말씀이 살이 되었다(le Verbe c’est fait chair)”(요한복음, 1:14)라는 놀라운 진술에서 발견된다.”[16] 앙리는 〈요한복음〉 1장 14절 가운데 보이는 “말씀이 살이 되었다”는 대목에 주목하면서, 유대적/히브리적이지도 그리스적/헬라적이지도 않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육화가 가능했음을 논증한다.

기독교의 교리와 경전의 성립에는 유대문화뿐만 아니라 그리스문화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 Aaron Bu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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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교리와 경전의 성립에는 유대문화뿐만 아니라 그리스문화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 Aaron Burden

그리스 문명과 철학이 먼저 발생한 후, 예수가 탄생하여 활동하다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는 일이 일어났고, 기독교 『성경』은 그 후 짧지 않은 시간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니, 기독교의 교리와 경전의 성립에는 유대문화뿐만 아니라 그리스문화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영향들 가운데 하나가 영지주의로 나타났다고 앙리는 설명한다. “영원한 지성(noûs)과 결합하기 위해 지성과 함께 지적인 것에 대한 명상 안으로 침잠하기 위해 영혼은 감각적인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이로부터 영혼은 이 지성처럼 영원해질 것이다. 플라톤적인 기원에 대한 이 도식은 영지주의(gnose)의 도식으로 모든 그리스인에게 알려졌던 것이다.”[18~19] 앙리는 영지주의가, 기독교 신학의 여러 흐름 가운데 하나이기 이전에, 그리스문화 속의 큰 흐름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강조한다. 영혼과 지성은 감각적인 세계로부터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보는 플라톤적인 사고방식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앙리는 단언한다. 앙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구원을 신체 안에 놓는 기독교가 있다.”[19] 말씀이 살이 되고, 그 살을 가진 존재, 살이 된 존재는 되풀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한다고 앙리는 적었다. 이에 비하여 “영혼과 신체의 그리스적 이원론”[19]은 그와 같은 향유와 부합될 수 없다고 앙리는 적었다. 달리 말하자면 2000년을 전후한 시대까지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살이 되는 것을 가로막았던 이원론은 그리스적인 것이라 설명한 것이다.

앙리는 유대인 일반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신의 초월성은 궁극적으로 신의 육화를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22] 단순하게 풀어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것을 처음에는 믿지 못하였다고 경전에 기록되어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유대인의 종교가 유일신 교였기 때문이다. 유대세계에서 모든 것은 유일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유일신과 몸을 가진 인간을 엄격히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 예수는 자신이 살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는 최후의 만찬을 열었고, 치욕적이며 고통스러운 형벌로 죽은 후에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유대적 사유 안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존재의 힘(force d’être)을 자신 안에서만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부터만 끌어낼 수 있다.”[22]

부활 다시 말해 육화는, 부활을 믿지 않았던 히브리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이원론적 사고가 형성되어있었던 그리스적 세계에서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앙리는 설명한다. “기독교가 히브리적 기원과 환경을 벗어나자마자 기독교적 보편주의의 욕망은 문화적으로 지적으로 그리스적 문화와 대립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반대되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과 신의 동일화의 조건으로서 육화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체의 실재를 그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해야 했다.”[23]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은 질투와 모략을 일삼지만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졌다. 역으로 표현하자면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졌지만 질투와 모략을 일삼는 존재인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고대 그리스 항구에는 아주 먼 바다에서도 볼 수 있는 거대한 신상이 서 있어서, 뱃사람들에게 이정표와 수호자 구실을 했다고 한다. 그 신상은 지금 남아있는 인체 조각과는 달리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팔 없는 인체 조각도 원래는 채색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리스 문화에서 신은 눈으로 보기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존재였고, 이상적 인간을 그릴 때도 지금 남아있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균형잡힌 모습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도 남달리 강해보이는 울긋불긋한 색상의 몸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이상적 인간상 뿐만 아니라 신상 조차도 ‘현상계’에 속하는 것이어서, 플리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따로 설정하였고, 그 세계는 이성[nous]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라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에 치우쳐 있었던 그리스 문화도, 그것을 극복하고 이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 하였던 플라톤의 철학도,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가지지 못하였던 것으로 앙리는 설명하는 것으로 읽힌다. 게다가 플라톤의 철학이 가진 이원론과 그것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근대문화는 세계 밖으로 나와서 세계를 관조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하는 것이어서, 살이 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하는 철학을 지향하는 앙리로서는 그냥 놓아둘 수 없는 것이었음을, 그리스 문화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 지극히 어려웠던 상황의 묘사를 통하여, 앙리는 시사한 셈이다.

히브리 문화에 연연하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고, 앙리로서는 그리스 문화나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그 절대적 영향 속에서 구축된 근대 문화에도 연연할 수 없었던 반면, 기독교의 육화에 대해서는 논리를 차용하는 것 이상의 강한 연관의 자세를 보인다. 이렇듯 앙리가 기독교의 육화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게 하여준 이론이 고대의 카르타고의 교부 터툴리안(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55?~220?)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 터툴리안은 “살을 가짐이 없이는 그리스도는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으며, 그의 살은 우리의 것과 닮은 살”이며 그 살은 인간의 살과 다른 것으로 구성되어질 수 없음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26~27] 터툴리안은 이원론 및 정신 우선주의 즉 영지주의와 기독교가 부딪친 초기에 그것들과 기독교 사이의 차이를 확연히 가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적 빛의 지평을 간직하는 한에 있어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 관계는 말씀과 천박하고 죽음이 선고된 탄생으로부터 나온 살의 관계가 된다!”[32] 여기에서 느낌표는 앙리가 찍은 것이다. “땅의 진흙에서는 신체만 있지 어떤 살도 없다. 살과 같은 어떤 것은 말씀으로부터만 도래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만 우리에게 도래한다. 단지 그것에 의해서만 살의 모든 특질이 도래하고 설명된다. 이 살은 항상 누군가의 것이며, 예를 들어 나의 것이라는 이 소소한 사실, 그래서 살은 자신 안에 그 안에 ‘자아’를 간직하며 자아는 절대로 그것과 분리되지 않으며 자아는 자기 자신과 분리될 어떤 가능성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은 분자나 원자의 결합이 아니라 쾌와 고통으로 배고픔과 갈증으로 욕망과 피로로 힘과 기쁨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분리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다. 이 체험된 인상들의 어떤 것도 우리는 지금까지 땅을 파서 발견한 적이 없으며 진흙 속을 파헤쳐서 발견한 적도 없다.”[39]

격정적인 굵은 글씨체 역시 앙리에 의한 것이다. 느낌표를 찍기 전에 앙리가 한 일은 그리스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과 자기의 철학을 구분하고, ‘천박’, ‘죽음이 선고된 탄생’ 등의 선정적인 문구들을 동원하여 자기의 철학이 구체적이며 실존적인 면모를 중시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그의 의도를 이해하고 나서 읽으면, 굵은 글씨로 적은 부분은 쉽게 읽힌다. 굵은 글씨 부분은 자기 철학이 ‘구체적임’, ‘생생함’, ‘실존적임’을 웅변하는 부분이다. 자기가 2천여년 된 그리스적 사유 전통의 한계와 오류를 2000년에 극복했다는 확신에 차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이 중요한 전환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서인지, 그는 격정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웅변한 것으로 보인다.

앙리는, “의미, 개념, 표상 혹은 이미지 등이 형성되고 인간의 방식으로 말하고 추론하는 그리스적 로고스”[39~40]에서는 비껴서는 대신, “……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세계 이전에, 그리고 어떤 세계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거기에서 요한이 “삶/생명의 말씀(le Verve de Vie)”(요한 1서, 1)이라고 이해한 말씀”[40]에 투신할 것을 권한다.

살은 분리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다. 사진출처 : Aziz Acharki   https://unsplash.com/photos/oiv4SSduKKg
살은 분리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다. 사진출처 : Aziz Acharki

앙리는 “살은 분자나 원자의 결합이 아니라 쾌와 고통으로 배고픔과 갈증으로 욕망과 피로로 힘과 기쁨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분리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다”[39]고 강조한 바 있다. 그때 그는 “살과 같은 어떤 것은 말씀으로부터만 도래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만 우리에게 도래한다.”[39]라고도 한 바 있다. 요한의 복음서를 정당근거로 살을 정당화한 것은 엇갈리는 해석 몇 갈래를 유발할 듯 싶다. 먼저 앙리가 구체적인 인식론과 새로운 철학의 제시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 같다. 왜냐하면 육화와 부활이라는 종교적 이야기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에 의지하게 되면 그런 이야기가 생성된 역사적 연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런 이야기와 일체적 관계인 종교의 도그마와도 연계될 수밖에 없어서, 철학 본연의 비판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육화와 부활이라는 이야기를 진지하고 설득력있게 적어놓은 텍스트가 요한의 복음서였기에, 대상화와 형식 논리의 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인식론과 철학으로부터 구체적인 인식론과 새로운 철학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그 이야기들을 차용하는 것은 적절하였다는 해석이다. 하나 더 들자면, 앙리의 이러한 전환이 2000년에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는 평가가 있을 수 있다. 2000년이라는 시점은, 19세기의 세기말로부터 100년이 지나 다시 세기말을 맞이한 시점이며, 68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20세기는 그 이전의 수천년간 일어났던 변화보다도 더 크고 빠른 변화를 압축적으로 겪은 시기였다. 그 시기의 후반을 철학자로서 현실에 참여하였던 그로서는, 격동의 기간에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돌아보며, 비판가인 철학도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사상가의 입장에서도 발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미셸 앙리의 2000년 저서 『육화, 살의 철학』을 그 첫번째 장인 「서론 : 육화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저자는 서론에 이 책의 주요 논리를 다 담으려 한 듯하지만, 본론에서 다양한 통찰을 보여주리라는 기대를 가능하게 하는 단서 또한 서론 속에 남겨놓았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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