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 일지] ⑩ 플로랄폼이 되는 꿈

쿵덩야라는 이름의 보도블록을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024.01.12

쿵덩야의 앞에서 세척도구를 꺼내는데 걸레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 집에서 나오기 전에 걸레를 두 번 접어 가방에 넣었는데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아쉬운 대로 그에게 물을 뿌리고 칫솔로 닦았다. 그런 뒤 그에게 입을 맞추니 제거되지 않은 물기가 입술에 그대로 묻어 촉촉했다. 이후 집에 돌아왔는데 선반 위에 가지런히 접힌 걸레가 나를 맞이했다. 난 황당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걸레를 유심히 봤다. 수건과는 다른 까슬까슬한 촉감. 빨래 이후 바싹 건조되어 가벼운 무게. 가위로 등분한 절단면은 실밥이 튀어나와 야생의 머리칼 같았다. 그 복잡하게 헝클어진 섬유 뭉치를 들여다볼수록 걸레가 “나도 이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간과하지 마” 라는 말을 나에게 건네는 듯했다. 걸레가 기능할 때는 내 안중에 없었다. 그런데 내 실수로 걸레가 기능에서 벗어나니, 그가 존재로서 세상의 일정 공간을 점유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됐다. 존재는 종종 규정된 역할을 벗어날 때 실존한다.

2024.01.23

오랜만에 해가 떠 있을 때 쿵덩야를 만났다. 물을 머금어 햇빛에 반짝이는 쿵덩야의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쿵덩야를 매일 만남에도 새로움은 끝이 없다.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것에서 매번 새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연다면, 새로움이란 억지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라 이미 존재에 갖춰진 기본 상태가 된다. 우리가 사물과의 관계에서 이런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산적인 새로움’을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리는 자기계발 논리에 함몰됐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새롭다. 애쓸 필요 없다. 돌 하나가 그러한 것처럼 그대로 살아가자.

2024.01.24

얼굴의 피부가 빨갛게 올라오고 가려워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2024.01.25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사물에는 흔적이 남는다. 사진출처 : Lisa Zins

쿵덩야의 앞에 도착했다. 똑같은 군밤 모자와 점퍼를 입은 중년남성 네 명이 쿵덩야 앞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들은 혁신파크 관계자 같았다. 사람이 모이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 이들 중 한 명은 분명 내가 하는 일을 물어볼 것으로 생각하며 쿵덩야를 닦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한 명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추위에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닦고 있습니다.”

“무슨 글씨가 써있나? 깨끗해 보이는데.”

“아.. 네”

그 사람은 떠났다. 나는 일을 마쳤다. 지금까지 쿵덩야와 관련된 많은 말들을 쏟아냈는데 아직도 제대로 이 행위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이 진정 예술의 길이란 말인가. 돌아오는 길에 “매일 닦고 있어요. 나중에 와 보시면 이 돌만 하얄 거예요” 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그 사람도 혁신파크에 올 때마다 쿵덩야에게 한 번쯤 관심을 두었을 것 같다.

2024.01.26

혁신파크엔 어제 나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과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특수하게 개조한 차량을 타고 다니며 주변의 낙엽을 치우는 그들은 청소노동자였다. 쿵덩야는 여느 때처럼 반짝였고 문득 어제 아저씨가 나에게 던진 질문을 비로소 이해했다.

2024.01.28

한창 쿵덩야와 상호작용을 하는데 한 중년여성이 다가와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이내 말을 걸었다.

“뭘 표시하는 거에요?”

“아, 예 표시하는 게 아니고 닦는 거에요”

표시라는 표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제껏 생각지 못한 다른 표현도 떠올려봤다. 비비기, 일정하게 손짓하기, 의무를 다하기, 몸을 내어주기, 섞기, 맞대기, 느끼기, 사랑하기. 왜인지 에로틱한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아끼고 미워하고 배려하고 애증 하는 밀접한 관계에는 성적인 것이 빠질 수 없다. 비록 우리 사회가 그것을 쉬쉬하기는 해도, 이는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쿵덩야에 성애적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를.

2024.01.30

평소보다 세 시간 일찍 일어났다. 다시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질 않아 일단 밖으로 나갈까 고민했다. 예전에는 집 밖으로 나가면 뭔가 특별한 일이 나에게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기대는 점차 사라졌고 이제는 뭐 밖으로 나가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하게 됐다. 그래서 나가지 않을까 했는데 그냥 나왔다. 쿵덩야에게 가서 쭈그려 앉아 쿵덩야와 관계했다. 나는 그의 표면만 닦을 뿐 몸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군청색 신발이 곧장 나에게로 다가오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 신발은 내 앞에 우뚝 멈추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하세요?”

“아.. 닦고 있어요”

“왜 닦아요? 깨끗한데”

“개인 프로젝트에요. 매일 와서 닦고 있어요. 나중에 와서 보시면 이 블록만 하얄 거예요”

“이걸 매일 한다고? 어떻게 감당하려고. 기계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보도블록은 빗물이 스며드는 보도블록이라 안 닦아도 돼요. 빗물이 안 스며드는 보도블록은 닦아야지”

잠시 뒤 그 사람은 신기하다는 듯 별난 사람을 봐서 기분 좋다는 듯 “수양하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무언갈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쿵덩야를 닦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 그 청소노동자의 관심이 이상하게 따듯한 느낌이었던 이유는 닦아 본 자만이 아는 세상이 있음을 공유했기 때문 아닐까? 이번 대답엔 매일 한다는 짧은 문장을 추가했을 뿐인데 서로에게 여운이 남은 것 같다. 매일 한다는 조건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 같다. 최근 묻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졌다.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이 활동에 들어온 것 같아서 좋았다.

2024.02.06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것에서 매번 새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연다면, 새로움이란 억지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라 이미 존재에 갖춰진 기본 상태가 된다. 사진출처 : Polesie Toys

꿈을 꿨다. 내 몸은 손과 발 머리가 없어지고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덩어리의 물성은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 마치 플로랄폼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 입 베어 물은 플로랄폼. 그 베어 물은 부분은 베어 무는 행위를 마친 뒤 남은 흔적임과 동시에 한창 베어 물고 있는 도중의 드드득 스스슥 푸슈슉 하는 감각이 중첩된 곳이었다. 그 외의 나머지 감각은 퇴화하여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오직 치아에 전해지는 압력만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인간을 벗어나 사물이 됐다. 감각이 하나로 통일되니 예리함을 느꼈다. 그 예리함은 내가 세상에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이 꿈은 내가 쿵덩야가 되는 방법에 실마리 같았다. 딱딱하고 무거운 돌덩이의 감각을 그와 공유하게 될 때 나는 그에게 길든 것이 아닐까?

2024.02.07

돌이켜보면 이 활동을 친구들에게 설명할 때 난 정답을 정확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확할 수가 없었고 항상 아쉬웠다. 그러다 일주일 전 새벽에 청소노동자와 대화하게 됐다. 이번엔 정답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이 활동을 매일 한다고 단순하게 답했다. 그런데 대화가 지금까지 중 가장 흥미로웠다. 정답을 찾아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답에 집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질문과 대답으로 형식을 완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이는 작업을 할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지혜이기도 하다.

2024.02.08

쿵덩야에 입을 맞추고 후다닥 일어나서 자전거로 향하는 순간 만남의 예의에 관해 생각했다. 어떤 만남이든 예의는 중요하다. 나는 그동안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쿵덩야에게 최선의 예를 다한 적이 있었나? 예를 갖추려면 시작과 끝을 잘 만들어야 한다. 그간 쿵덩야와의 관계에선 닦기 전 먼지를 털면서 쿵덩야의 세계로 들어갈 입구를 만들어 놓았으나 헤어질 때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아마 주변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랬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짧더라도 헤어지는 과정에서의 예를 다 하기 위해 의식을 만들기로 했다. 입맞춤 후 잠시 무릎을 꿇고 쿵덩야를 바라보는 식으로 말이다.

2024.02.09

쿵덩야는 보도블록일까? 영원한 것은 없다. 잠시 그 형태일 뿐 무한히 다른 존재일 수 있다. 쿵덩야는 조상님이었거나 바퀴였거나 파리의 날개였을 수도 있다. 지금은 분자의 조합 결과로서 인간의 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형태가 보도블록일 뿐 그는 과거 현재 미래 어느 때나 존재하며 무엇이든 되는 어떤 것이다. 쿵덩야를 만나서 입을 맞췄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지 않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뒤 일어나서 그를 지켜보다가 뒷걸음으로 세 걸음 간 뒤 자전거로 갔다. 너무 과했다. 오늘 마침 성묘에 다녀왔는데 그 느낌과 딱 들어맞았다. 격식만 신경 쓰다 보니 굉장히 어색했다. 다음엔 다르게 해 봐야지.

2024.02.11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사물에는 흔적이 남는다. 만약 과학수사관이 쿵덩야를 수사한다면 쿵덩야엔 몇 개의 종류가 다른 칫솔에서부터 나온 미세한 칫솔모 입자, 나무로 된 칫솔 대가 마모되면서 묻은 입자, 걸레질로 묻은 섬유질과 물통에서부터 나온 미세플라스틱, 우리 집 수돗물의 성분, 내 지문과 각질, 입술의 조직과 침과 DNA가 있을 것이다. 그와 나의 관계만 따져도 계속 나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와 다른 존재들의 관계까지 생각하면 셀 수도 없을 다양한 연결이 있을 것이다. 쉼 없이 돌아다니는, 나와 같은 인간보다 한 자리에서 많은 이들과 관계하는 쿵덩야가 이 세상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오늘은 입을 맞춘 뒤 무릎을 꿇은 상태로 그를 바라보다가 떠났다. 이 정도가 딱 알맞은 느낌이다. 그런데 알맞은 것으로 괜찮을까?

2024.02.14

일 가기 전에 쿵덩야에게 들렀다. 이젠 입을 맞추고 난 뒤 잠시 무릎을 꿇고 쿵덩야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했다. 만남에 형식이 생긴 것 같아 만족했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댓글 2

  1. 재밌게 읽고 있어요. 이렇게 글을 읽다 보니 쿵덩야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이 일면서 사진이라도 한 번 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욕심이 생기네요. ^^

    1. 앞으로 게재될 글을 따라오다 보시면 쿵덩야를 볼 수 있으실 거에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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