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덩야 일지] ⑦ 나의 장난꾸러기 신

서울혁신파크에 있는 보도블록 하나에 쿵덩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만나서 닦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23.11.02

헤어짐이 임박했음을 알기에 지금의 만남이 더욱 애틋한 것일까? 입술에서 느껴지는 쿵덩야의 울퉁불퉁한 질감이 평소보다 더 생생했다.

23.11.06

구멍난 양말과 이 나간 접시와 변색된 벽지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다.
사진출처 : Anne Nygård

비가 와서 쿵덩야에게 가지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썼던 글을 돌아봤다. 과거의 나는 현장에서 누가 내 행위에 관해 물어봤을 때 대답을 잘 못했다. 그럴싸한 말을 미리 만드는 것이 맞을까? 정리된 말을 미리 준비한다면 쿵덩야를 나를 이롭게 할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용은 시장경제 안에서 재화와 용역을 사고파는, 물질을 대하는 일반적 방식이다. 이용은 언제나 대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이는 일방적이며 파괴적이다. 점점 손쉬워지는 이용-대체가능함으로 인해 지구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재앙에 직면했다. 1초에 대형트럭 한 대 분량으로 버려지는 옷, 공장식 농축산업으로 인한 환경오염과 비인간동물의 끔찍한 삶과 죽음, 영양 과잉 때문인 각종 성인병, 개발로 말미암은 종의 멸종 등 인간의 지구의 파괴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대체가능함보다 소중함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이는 이젠 생존의 문제다. 소중함은 지극함이다. 함께 공유하는 역사로 맺어진 관계는 쉽게 대체할 수 없다. 소중함은 착취와 파괴 없이 서로 풍요롭게 한다. 소중함으로 비인간물질에게 다가가는 훈련을 한다면,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하다고 여기는 사물에서도 경이를 느끼는 감각이 깨어난다. 구멍난 양말과 이 나간 접시와 변색된 벽지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다. 내가 쿵덩야를 소중히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쿵덩야를 만나면 좋겠다. 이런 이유로 누군가 물어볼 때의 대답을 정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서툴더라도 그때그때 생각난 말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지.

23.11.10

혁신파크에 있는 몇몇 건물의 문 앞에는 출입금지 경고문이 붙었다. 목공방 앞에는 폐가구가 쌓였다. 동네 주민이 그린 수채화를 전시하는 양천리 갤러리는 아직 열려 있었다. 갤러리 벽에는 산의 알록달록한 풍경을 담은 그림이 걸렸다. 사람들은 작품을 감상하며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오늘은 해가 창창해서 물기를 머금은 쿵덩야 표면의 알갱이가 더욱 반짝거렸다. 날이 추웠다.

23.11.13

누군가는 밤을 새워가며 돈을 벌고, 누군가는 매일 쿵덩야를 닦는다. 만약 신이 있고 그가 나와 쿵덩야의 관계를 미리 정했다면, 내 삶을 이렇게 만든 신은 굉장한 장난꾸러기가 아닐까? 아니면 내가 장난꾸러기라서 나의 신도 장난꾸러기일까?

23.11.15

유독 바쁜 날이었다. 작품 설치 일이 끝나고 동네로 오니 오후 7시가 넘었다.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일단 혁신파크에 갔다. 쿵덩야를 닦기 전 용달 기사님께 전화해서 이사 견적을 흥정하고, 이사를 도와줄 친구와 일정을 조율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월세도 내야하고 작업도 해야 하고 집에 가서 요리도 해야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이 급해서 쿵덩야를 닦는 둥 마는 둥 하느라 뽀뽀하는 것도 까먹고 집에 갈 뻔했다. 오래된 관계에서 오는 편안함 때문에 상대방에게 소홀해지는 경우처럼 말이다.

23.11.17

쿵덩야의 앞에 도착했는데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날이 급격히 추워져서 그런가 보다. 산책하는 사람조차 하나 없었다. 잎이 풍성했던 나무들은 가지를 드러냈다. 광장에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오늘의 만남이 좀 더 특별했다. 입맞춤도 평소보다 오래 했다. 활동 초기에는 주변의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처럼 고요한 광장에서 서로에 집중하면 남들의 시선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결코, 서로 온전히 알 수 없음에 구슬프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우리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쿵덩야는 나에게 질문한다. 대체 너는 무엇이니?

23.11.18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 세상에서 아주 미약한 존재.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 이를 인정하는 것은 침울함보단 위안과 차분함을 준다. 사진출처 : WaSZI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혁신파크에 도착했다. 입구엔 낙엽이 많이 쌓여 있어서 걸을 때마다 푹신했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은 꽤 두텁게 쌓였다. 혁신파크의 폐쇄까지 한 달 정도가 남았으니 이젠 치우는 사람이 없는 걸까? 일대가 낙엽으로 뒤덮인 모습을 보니 예전에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의 부모님께서 해주셨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 앞마당에 잡초를 수시로 뽑지 않는다면 금세 정글처럼 된다. 이는 사람의 몸에 상처가 나면 자연스럽게 딱쟁이가 나고 새살이 돋는 것과 비슷하다. 땅도 내버려두면 마치 상처가 회복되듯 금세 온갖 풀들이 자라서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다. 땅의 힘은 인간의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그래서 매년 여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혁신파크도 가만히 둔다면 두텁게 쌓인 나뭇잎들이 썩고 흙이 되고 그 안에 다양한 존재들이 살게 되겠지. 입구를 지나서 동네 유일한 비건 카페 ‘쓸’에 갔다. 쓸은 혁신파크의 개발을 반대해 퇴거 명령에 불응하여 18일째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난 카페에 가는 것을 즐기지 않는데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초코쿠키 하나를 주문하고 카페 구석에 갔다. 잠시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쿠키와 물 한 잔을 조용히 먹었다. 카페에서 나와 쿵덩야에게 갔다. 그래도 오늘은 주말인지라 사람이 조금 있었다.

23.11.20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 세상에서 아주 미약한 존재.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 이를 인정하는 것은 침울함보단 위안과 차분함을 준다. 쿵덩야를 닦고 자전거를 탄 후 출발하려는데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서 또 뽀뽀를 까먹고 갈 뻔했다.

23.11.21

과거 난 학교 수업에서 친구들에게 5년 뒤에 만날 것을 제안하는 과제를 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당시 수업에는 14명이 있었는데 약속장소엔 나를 포함해 3명이 모였다. 난 약속을 기억해준 친구들이 고마워서 함께 할 수 있는 탐방 활동을 준비했다. 탐방은 우이천에 있는 약 600m 정도의 인공동굴을 구경하는 것이다. 이 동굴에는 내가 작년 가을에 했던 점거전시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오늘을 위해 새로운 작업도 준비해 두었다. 동굴은 사방이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하천 진입 및 전시 감상에 필요한 장화바지를 갖춰 입고 우이천으로 출발했다. 마침내 우리가 동굴의 입구에 도착하려는데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우리 셋을 불러세웠다. 난 순간 그가 우리를 막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주머니는 블루투스 이어폰 한 짝을 물에 빠뜨려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작은 도랑에 빠뜨린 것이 아닌 허리 깊이의 하천에 빠뜨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 마침 벙벙한 장화바지를 착용하고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우리 셋과 마주친 것이었다. 이런 필연 같은 우연이 어디에 있을까? 난 신이 그 아주머니를 위해 우리를 보낸 것 같아서 흔쾌히 하천에 뛰어들어 이어폰을 구출하기 위해 힘썼다. 깊고 탁한 물 때문에 한동안 애를 썼다. 아주머니는 미안했는지 포기하자고 하셨지만, 오기가 생겨서 계속 시도했고 친구와의 합동작전으로 구출에 성공했다. 순간 환호성이 나왔다. 난 아주머니에게 “선하게 사셨나 봐요”라고 말씀드렸는데 아주머니는 내가 그런가? 하며 멈칫거리셨다. 이후 동굴탐험을 마치고 친구의 공방으로 갔다. 다음 5년 뒤 만남을 다짐하는 계약서를 작성한 뒤 친구들과 헤어졌다. 공방에서 나왔을 땐 너무 지쳤다. 생협에서 장을 보고 쿵덩야에게 갔다.

23.11.22

귀신 이야기를 수집하는 친구의 워크숍에 참여했다. 워크숍의 마지막은 우뭇가사리로 개발한 우무피막 위에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난 쿵덩야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의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비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쿵덩야에게 갔다. 오늘의 편지를 상기하며 쿵덩야와 관계하는 도중 작고 하얀 시츄 한 명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내 빠르게 다가와 내 양손을 핥았다. 그의 반려인은 “안 돼”를 연신 외쳤는데 시츄는 한동안 쿵덩야와 내 주위를 맴돌다가 돌아갔다. 비인간동물이 쿵덩야와 나의 관계를 인정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23.11.26

친구가 자신의 공방에서 행사를 열었다. 난 행사의 음식코너를 담당하여 각종 음료와 내가 만든 비건 음식을 팔았다. 그런데 나에겐 술이 무료이다 보니 혼자 한두 잔씩 홀짝이다가 그만 취해버렸다. 너무 취해서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외박까지 하게 돼서 쿵덩야에게 가지 못했다.

김이중

존재 방식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치 지렁이의 완벽함을 닮아 지렁이 인간이 되어 지렁이 말을 구사하고픈 게으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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