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만다라, 사죄와 축복의 생태예술 ② 설치와 회화 작업에 관하여

기후변화의 시대, 코로나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품고 플라스틱 만다라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제주현대미술관이 주관한 ‘2019 국제생태미술전’에 처음 발표한 ‘플라스틱 만다라’ 전시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고, 그 목소리들이 힘이 되어 2020년 4월부터 11월까지 제주도 해변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줍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었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두세 명이, 때로는 수십 명이 플라스틱을 줍고, 바다와 바다 생명에 대해 명상을 하고, 그 조각으로 만다라를 만들었다.

《플라스틱 만다라》 전시 포스터.
《플라스틱 만다라》 전시 포스터.

플라스틱은 가볍고, 저렴하고, 예쁘다. 우리는 플라스틱에 모든 생활을 정복당한 뒤에야 플라스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플라스틱을 만들어내고, 쓰고, 버리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플라스틱은 그것을 쓴 적도 없는 생명들에게 흘러가고 있다. 바다로 흘러간 플라스틱 비닐, 플라스틱 병, 그물을 비롯한 플라스틱 어구들에 목이 졸리고, 몸이 걸리고, 그것을 먹고 수많은 바다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다. 플라스틱은 파도와 마찰에 부서져 점점 작은 조각이 되고 이것을 먹이로 오인해 먹은 물새들은 위장이 플라스틱으로 가득 차 죽음에 이른다. 더욱 잘게 쪼개지거나 강한 햇빛에 녹아버린 미세플라스틱은 바닷물 속을 떠다니며 바다 생명들의 몸속에 축적되고, 그것을 먹는 사람의 몸에도 축적되며 생명의 순환고리를 따라 인류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이 죽음의 흐름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정말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된다.

■ 플라스틱만다라

플라스틱 만다라는 수집과 배치로만 이루어진 매우 단순한 작업이다. 모래사장을 기어다니며 플라스틱을, 그 중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모으는 반복적인 과정과, 이렇게 모으고 분류한 플라스틱 알갱이들을 만다라 형태로 배치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정은 단순하지만 오랫동안 반복한다. 모래사장의 모래를 채로 치고 손으로 쓰다듬는 반복적인 행위를 하면서 참 많은 감정을 느꼈다. 예쁜 색의 플라스틱을 주을 때 기뻤고, 기뻐하는 마음이 미안해서 죄책감을 느꼈고, 모으고 모아도 다음날이면 또 쌓여있는 해양 쓰레기를 보며 절망감을 느끼고는 했다. 여러 감정들 중에서 절망감을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 과정이었으나, 절망을 희망이나 다른 감정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경험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희망적인 사람인지, 플라스틱이 좀 줄어든다 싶을때는 어쩌면 이 작은 해변 하나는 내가 깨끗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러다가 제주 바다에 태풍이 3번 연이어 왔고, 태풍이 토해낸 어마어마한 양의 해양 쓰레기를 보면서 나의 미약함과 자만심에 몸과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다시 모래사장을 기어다녔다. 네발로 기어다니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로 낮은 마음이 들게 했다. 그 몸의 언어 자체만으로 사죄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플라스틱을 모으고 분류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약 8개월 동안 진행이 되었고, 전시장에서 만다라를 만드는 작업은 전시 이틀 전에 시작해서 전시 기간 내내, 총 10일을 작업했다. 만다라를 만드는 과정은 사람들의 성격이나 습성이 많이 묻어나는 작업이다. 원 안에 배치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규율이나 기술이 없다 보니, 일렬로 가지런히 놓고 싶어 하는 사람과, 아무렇게나 채우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모여 다채로운 모습이 되고는 한다. 플라스틱 조각들을 부어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굳이 똑같은 색과 크기를 찾아서 배치하는 사람도 있다.

이 작업은 내가 지금까지 했던 어떤 작업과 다르게, 사람들의 참여가 쉬웠다. 아니 쉬운 정도가 아니라 참여를 막기가 힘들었다. 내가 혼자 하고 있으면 누군가 와서 플라스틱 조각을 한 개 두 개 놓다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같이 하기 일쑤였다. 2020년 가을에 있었던 ‘바라던바다’ 해양예술축제에서 플라스틱 만다라 워크숍을 한 적이 있었다. 신청한 사람들이 오기 전에 원의 중심을 만들어놓느라 바닥에 여러 색의 플라스틱 알갱이들을 놓고 이리저리 옮기고 있으니, 행사장을 심심하게 돌던 아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유치원 남자 아이 하나는 특히나 열심이었는데, 바닥에서 수많은 그림을 만들었다 해체했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워크숍에 신청했던 고등학생들이 오고, 꼬마는 혹여 형아 누나들이 끼워줄까 싶어 원 주변을 맴맴 돌았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 정렬과 모양을 만들고 싶어지게 하는 것 같다. 점을 이어서 선을 만들고, 선을 모아서 면을 만드는 배치의 행위가 인간이라는 포유동물의 동물적 특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시 준비를 위해 나를 도와주러 온 친구들에게 제발 나 혼자 플라스틱 만다라 설치를 한번 해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도와주겠다는 친구들을 뿌리치며, 나의 성격과 다른 선택을 했다. 규칙이 없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질머리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만다라의 구조를 짜고, 계획한 디자인에 따라서 만다라를 만들었다.

중심에는 만다라의 중심인 빈두(산스크리트어로 ‘씨앗’ 또는 ‘시작’이란 뜻)가 있고, 빈두에서 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꽃 만다라가 수레바퀴 모양으로 이어지고, 순환하는 원의 만다라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꽃이 피어나고, 꽃이 만개한 후에는 자유로운 카오스가 열린다. 이 열린 부분을 사람들과 함께 했다.

예상했던 대로, 한 알 한 알을 가지런히 두는 작업은, 내 성격상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일도 이렇게 차근차근 하게 하는 법이 없는 내가 추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랜 시간을 작업 하다 보니, 왜 정신적인 수행에 육체적인 고행이 함께 있는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예술을 하는 것 같지 않고, 몸의 한계에 도전하는 극한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무릎이 아프고, 온 몸이 으스스 춥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비어있는 옛 목욕탕의 새벽은 무섭기도 했다. 어쨌든 예술을 하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똑바로 걸을 수가 없어서 쩔뚝쩔뚝 거렸는데, 그게 기분이 참 좋았다. ‘예술이 자연을 위해서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던 환경운동가 친구의 질문이 내내 맴맴 돌았었는데, 말만 한 게 아니라 몸으로 뭔가를 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그러나 뿌듯함 뒤에 ‘내 무릎이 아픈 게 죽어가는 바다생명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하는 질문이 떠올랐고, 그러면 다시, 원래 나의 의도한 대로 ‘절망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시 마지막 날, 전시를 같이 만든 사람들과 작품을 쓸어 모았다. 전시기간 내내 쓸어 모으는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울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만다라의 마지막 테두리를 끝내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쓸었다. 그리고 몇 분 후에 작은 모래 산 하나와 더 작은 플라스틱 산 하나가 남았다. 지난 8개월의 시간과 그 시간만큼 깃들었을 애도와 축복은 모래와 플라스틱으로 되돌아갔다.

촬영을 위해서 해가 완전히 사라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점점 어두워지는 옛날 목욕탕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고요한 시간이 이 작업의 긴 과정 중에서 가장 명료한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 시간. 어둠의 그 시간에 나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감동이나 슬픔 같은 감정은 없었다. 그저, 고요히 있었다.

이 작업은 아무것도 안 될 작업임을 알고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꾸만 전시 후에 모은 플라스틱으로 뭐를 할지를 묻고는 했다. 그것들을 모아서 고래를 만들면 어떤지, 이것들을 압축해서 하나의 오브제를 만들면 어떨지 물었다. 생태교육 교구를 만드는 곳이라며 이것들을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한 말에 대한 반응으로 처음에는 “뭐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던 자신 없던 목소리가 점점 단호한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라고 변했다.

플라스틱 만다라는 전시장에 전시를 해서 작품을 사고팔고 하는 미술의 프레임과 진작에 결별을 한 작업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쓰레기였고, 결국에도 쓰레기로 존재한다. 누가 이 작품을 산다고 하면 코웃음부터 날 것 같다. 자연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자연과의 교감을 나타내고는 했던 대지 예술과도 다르다.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지만,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쓰레기이다. 업싸이클링 작업과도 다르다. 나는 이것의 가치를 상향 조정하는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것은 용도가 있는 쓰레기가 되서는 안 된다.

이 작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자신감과 어떤 신기술이 해양 플라스틱 문제를 풀 것이라는 희망은 우리에게 너무나 지배적인데, 지금 우리는 절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절망을 끌어안되 그 무게감에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 치료사이자 예술가인 내가 플라스틱 만다라 작품을 통해 전할 수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깨달음이, 이것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플라스틱 삶을 사는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절망감이 우리 모두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 회화

플라스틱 만다라 설치작업과 다르게, 그림을 그리면서는 뭔가를 만들고 표현하고 싶다는 나의 창조적인 욕망을 그대로 따라갔다. 플라스틱을 주우면서 내 속에서 일렁거리는 마음들을 그려 넣었다. 뭔가를 안 만들고자 하고, 절망으로 끝나고자 하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가 그림에서는 흐물흐물해졌다. 나는 몹시 만들고 싶었다. 아름다움이 적어도 나는 구원할 것 같았다.


플라스틱 줍는 마음 | 캔버스에 유화, 117x80cm, 2020

모래 위를 기어 다니고, 모래를 손으로 쓸면서 촉감으로 만나는 바다가 있다. 플라스틱이 손에 만져질 때, 플라스틱을 물고기의 뱃속에서, 고래의 뱃속에서, 거북이의 뱃속에서 꺼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기어 다니는 나의 모습과 거북이가 반사된 모습이 되었다. 우리는 점점 하나의 모습으로 닮아가고 있다.


빈손에 만다라 | 캔버스에 유화, 117x80cm, 2020

바다에서 주운 미세 플라스틱을 손 위에 놓고 사진을 찍는다. 기껏해야 한 줌의 플라스틱이지만, 한 줌 만큼의 축복을 바다로 보내고 싶었다. 어느 날 아무것도 주울 것이 없는 빈손을 상상해보았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 하지만, 이런 상상은 기도가 아닐까.


산호 키우는 거북이 | 캔버스에 유화, 60x45cm, 2020

2050년 멸종위기인 산호를 구하기 위해서 산호를 이식하거나, 기후변화에 강한 종을 찾아서 배양하는 등 여러 다급한 움직임이 있다. 바다의 수온과 오염에 민감하고 연약한 산호들에게 바다의 변화는 너무도 빠르다. 거북이가 산호를 등에 업고 키워서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겨주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물을 먹고 죽은 물고기 | 캔버스에 유화, 80x117cm, 2019

바다 쓰레기를 청소하거나 플라스틱 조각을 줍다 보면 가끔 죽은 물고기나 새를 만나게 된다. 그물을 먹고 죽은 물고기를 상상하며 그리다 보니, 내 뱃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해초에 감겨 죽은 바다새 | 캔버스에 유화 80x117cm, 2019

바다에서 쓰레기를 줍다가 해초에 엉켜서 죽어있는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름다운 새가 해초를 가운처럼 겹겹이 입고 고요히 죽어 있었다. 그 새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죽음의 모습을 그려주고 싶었다.

이 전시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문화예술재단의 2020년도 문화예술지원사업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정은혜

예술가이자 치료사이다. 가족과 이민 간 캐나다에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으며, 그곳의 광활한 자연에서 한없이 작아지면서 동시에 한없이 커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캐나다에서 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뉴미디어 전문 미술관에서 기획자로 일하다가, 최첨단 기술과 예술을 이용한 소통이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치유와 소통의 길을 걷고 싶어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치료를 공부하였다. 시카고의 정신병원과 청소년치료센터에서 미술 치료사로 일하였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그림을 그리고 책을 쓰고, 예술·치유·자연을 키워드로 한 다양한 작업을 한다. 지구를 무대 삼아 대범하게 살라는 부모님의 뜻을 뒤로하고, 제주 중 산간에 있는 작은 마을에 10년째 살고 있다. 그동안 쓴 책에 ⟪치유적이고 창조적인 순간⟫⟪변화를 위한 그림일기⟫⟪싸움의 기술: 모든 싸움은 사랑이야기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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