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과 거리조절의 돌봄 – 『레디컬 헬프』를 읽고

기존 정부 복지시스템의 해결방식은 포드주의의 컨베이어벨트식으로 이미 낡은 것이다. 힐러리 코텀은 ‘관계’를 통해 시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복지 시스템을 제안한다.

기존 방식의 문제

힐러리 코텀 저, 『레디컬 헬프』, (착한책가게. 2020)
힐러리 코텀 저, 『레디컬 헬프』, (착한책가게. 2020)

런던 중심지 웨스트민스터의 작은 아파트에 사는 스탠은 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지만 외로운 노인이다. 그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으로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서 행복감을 느끼는지 잘 안다. 그가 현재 원하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이다. 그의 바람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이런 확실한 소망을 외면한 채 노인 복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부 청사의 사무실에서 태어난 아이디어는 “문서상 그럴 듯해 보이는 논리에 따라 보고서와 예산이 만들어지고, 뜬금없이 요란한 홍보와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뭔가 활발히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줄 건물의 개소식, 리본 커팅이 병행되며, 그 결과는 언제나 고비용의 실패이다.1

이와 달리 사회활동가 힐러리 코텀은 새로운 일을 할 때 “이미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스탠의 소망 실현은 그가 사는 아파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코텀은 스탠이 사는 아파트 관리인에게 혹시 음악동아리를 운영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니 좋다고 한다. 그리하여 매주 화요일 저녁이 ‘음악이 있는 저녁’으로 정해졌고 원하는 거주자들이 음악을 들었다. 하루종일 누구와도 이야기한 적 없던 스탠의 얼굴이 덥수룩한 흰색 턱수염 뒤로 환해졌다. 이것이 바로 스탠이 원하는 “자기에게 딱 맞는 도움”이었다.

30대 여성 엘라의 아들은 통제불능이고 집안이 늘 시끄러워 이웃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 아들은 어느 날 엄마인 엘라를 칼로 위협하고 또 어떤 날은 자해를 했다. 막내딸은 아프고 열여섯 살 둘째는 임신 중이다. 엘라는 자기 삶이 지옥이라고 묘사한다. 그녀는 빚쟁이들, 퇴거 경고, 아이들의 앞날 문제로 분노했고 두려워했다. 엘라는 도움이 절실했는데 그녀를 위해 73명의 전문가들이 그녀의 삶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시와 요구는 엘라가 피하고 싶은 또 다른 고통일 뿐이었다. 엘라는 무엇보다 낙인찍히는 것과 창피당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녀는 복지당국이 자기 삶에서 나가주기를 바랬다. 당국은 융통성이 없고 스탠이 원하는 것처럼 일상을 조금 가볍게 해줄 작은 것들을 제공하지 못했다.

시민들의 이러한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좌익은 돈을 더 써야 한다고 하고 우익은 복지국가의 거대함을 우려한다. 그러나 양측 모두 돈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정부 조직들은 서로 자신의 부서가 그 새로운 일을 맡아 자신의 규모를 키우고 싶어한다. 정부 조직들은 자기이익에 따라 움직이지 시민들의 문제해결에는 관심이 없다.

횡단의 방식

코텀에 의하면 기존 정부시스템의 해결방식은 포드주의의 컨베이어벨트식으로 이미 낡은 것이다. 이에 그녀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실험을 하여 대안을 마련했다. 그녀는 자신들이 개발한 대안은 돈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의 실제 삶의 현장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전달비용이 적게 들고 예산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도움에 덜 의존하게 되도록’ 돕는다. 기존 복지서비스는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질문하는데,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 곁에 다가가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떻게 도울지”를 묻는다. 그들은 필요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을 기른다.

그동안 엘라 가족에게 쓰인 국가의 돈은 1년에 25만 파운드인데 그것은 문제의 단편적 해결을 위한 구태적인 시스템 유지에 들어가는 것이지 그 중 단 한 푼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거나 그들의 발전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는 사회복지사는 근무시간의 86%를 서류를 작성하고 회의하는 데 썼다. 아이와 만나는 짧은 시간마저도 통계와 보고서 작성을 위한 단순한 질문과 대답에 할애되었다.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담배는 얼마나 피우는지 등의 질문이었다.

근본적 문제해결을 위해 코텀은 우선 지역 지도자들에게 두 가지를 제안했고 그들은 그것을 수용했다. 첫째는 담당자들이 가족과 직접 만나는 시간을 80%로 늘리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담당자들을 뽑는 일에 해당 가족이 함께 참여하여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해당 가족들을 만나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by Askar Abayev 출처 : pexels.com/ko-kr/photo/5638602/
전문가들은 해당 가족들을 만나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 Askar Abayev

이러한 변화를 위해 새로 예산이 증액되지는 않았다. 단지 그 예산을 쓰는 방식을 해당 가족이 결정하도록 했다. 그러자 한 가족들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서로 대화하는 데 썼고 다른 가족은 집을 고치는 데 썼다. 또 다른 가족은 사회적기업을 시작하는 데 썼다. 면접에 뽑힌 전문가들은 문제를 그 가족들과 함께 해결했다. 이들은 이전에 시간을 주로 보고서 쓰고 회의하는 데 썼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해당 가족들을 만나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쓴다. 이들의 전문적 해결 능력과 활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가족들이 마음을 열고 고민과 희망을 털어놓으며 같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은 해결사라기보다 친절한 이웃이 되었던 것이다. 코텀은, 가장 중요한 자원과 역량은 ‘관계’라고 말한다. 이러한 방식의 결과 12주 만에 여섯 가족 모두 변화가 생겼다. 엘라는 취직했고 아이들은 더이상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이웃과도 친하게 되었다.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 심리치료사로 있었던 라보르드 정신병원은 직원이나 환자가 한 가지 일이 아닌 여러 가지 일을 돌아가며 했다. 우선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했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다른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늘 새로운 일을 즐겁게 했고 그 병원은 늘 활력이 넘쳤다. 가타리는 칸막이로 분리된 수평성과 직급으로 위계화된 수직성 사이를 넘나드는 횡단성을 추구했다.2

코텀이 비판한 관료적이고 고비용의 복지정책은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또 그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수혜자들을 주눅들게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복지의 효과는 별로 없었다. 코텀이 제안한 방식은 주민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옆에서 단지 거든 것이다. 가타리의 병원 역시 의사, 간호사, 직원, 환자가 엄격히 구분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일을 즐겁게 새롭게 하며 활력을 유지한다.

거리조절의 방식

공무원이 주민을 만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병원에서 직원과 환자가 여러 역할을 해보면, 사람 간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한지 알아차리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가타리는 다음과 같은 고슴도치의 비유를 든다.

살을 에는 듯한 어느 겨울날, 일단의 고슴도치들이 추위를 견디고자 서로 몸을 껴안아 따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가시가 서로를 찔러서 너무 아파 그들은 다시 곧 흩어졌다. 그러나 추위는 계속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한 번 가까이 모였고 다시 한 번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두 악(惡, 추위와 가시로 인한 아픔)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주 적당한 거리를 발견하기까지 이렇게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도 트럭의 비유를 들어 거리조절 이야기를 한다. 그에 의하면 계층구조들의 작용은 트레일러가 부착된 트럭을 후진시키는 작업과 비교될 수 있다. 트럭과 트레일러의 각도가 좁을수록 트럭이 제어할 수 있는 정도는 감소한다. 세계는 이런 종류의 관계를 가진 존재의 복잡한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대다수 존재들은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까지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에서 제어의 문제는 과학보다는 예술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술처럼 난해하고 복잡하며, 그 결과는 추하거나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3

현대인들은 각기 갖고 있는 자신의 트레일러도 제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잘 맺어야 한다. 특히나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는 특정 계층의 사람들의 거리조절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전염을 막기 위한 ‘거리두기’는 돌봄을 담당하는 이들의 ‘거리 없애기’로 인해 가능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과 재택근무하는 배우자를 돌봐야 하는 가족(대체로 여성)은 보상이 주어지지 않은 중노동과 거리밀착으로 인한 찔림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들의 고통과 희생을 ‘거리없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당연시한다면 그 거리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질 것이다.


  1. 힐러리 코텀, 박경현ㆍ이태인 역(2020), 『레디컬 헬프』, 착한책가게. 아래의 엘라 사례도 같은 책 참조.

  2. 신승철, [묘한 철학], 흐름 출판, 2021.

  3. 그레고리 베이트슨, [마음의 생태학], 책세상, 2006.

이나미

한국의 정치이념과 정치사를 주로 연구해왔다. 정의가 구현되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해법은 무엇인지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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