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에 경의를 표하고, 빚을 갚고, 어린 양 되기를 권하다 –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관람 후기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내가 직접 만든 것을 꼽아보면, 내 삶이 타인에게 얼마나 심하게 의지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강하게 연결되어있는지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내가 직접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예민한 사람은 연대라는 가치를 중하게 여길 것이고, 적어도 받은 만큼은 베풀고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 Agnès Varda, 제이알 JR 공동감독,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Visages villages》, 2017년 제작, 2018년 6월 14일 공개, 상영시간 93분
아녜스 바르다 Agnès Varda, 제이알 JR 공동감독,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Visages villages》, 2017년 제작, 2018년 6월 14일 공개, 상영시간 93분

이 영화는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 1928년 5월 30일 ~ 2019년 3월 29일)가 제이알(JR)이 이끄는 ‘인사이드아웃 프로젝트(insideout project)’라는 이름의 팀과 함께 사진관 트럭을 끌고 프랑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 찍어 확대하여 건물의 벽에 붙인 기록을 편집한 것이다. 바르다는 세계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영화작가라고 한다. 제이알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이곳저곳에 붙이고 다니는 일을 하는 팀을 이끄는 예술가이다. 문화행동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마도 제이알로서는 바르다를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고, 바르다는 프랑스 곳곳의 건물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사람 사진들을 통하여 제이알을 알았을 듯하다. 확실치는 않으나, 자기가 회복하기 어려운 병에 걸린 것을 알고 있었던 88세의 바르다가, 33세의 나이로 왕성하게 문화적 행동을 이어나가고 있던 제이알에게 함께 활동할 것을 제안하여 공동행동이 성사된 듯하다. 바르다는 자기가 가보고 싶은 장소들을 제이알과 함께 갔고,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년 12월 3일 ~ )를 만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제이알과 함께 하는 활동을 통하여 이루고자 한 것을 꽤 많이 이룬 듯하다.

이 영화의 프랑스어 원제목은 ‘Visages villages’이다. 이 제목의 영어 번역은 ‘Faces Places’이다. 한국어 번역을 생각해 보았다. ‘얼굴들 마을들’. ‘마을들의 얼굴’. ‘장소들의 표정’. 바르다와 제이알은, 바르다가 가보고 싶었던 장소에 가서, 사람들 특히 얼굴을 사진 찍어 크게 확대하여, 공장 시설이나 집에 붙였고, 그러고 나니 탄광촌 주택의 정면에 역사가 새겨진 듯하기도 했고, 공장과 마을이 표정을 가진 듯하기도 했었으니, ‘장소들의 표정’이라는 제목도 불가능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영화 속 여행은, 바르다가 제이알의 힘에 기대어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에 가본 것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예술가인 두 사람이 협업하여 바르다가 원한 장소와 그곳에 이르기 위해 지나친 장소들이 역사와 표정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호의와 경의를 품고, 노동의 역사와 그 증인의 얼굴을 새기다

바르다와 제이알이 찍은 사진에는 사진 찍히는 사람에 대한 호의가 가득했다. 그들은 뭔가를 정확히 기록한다는 원칙을 앞세우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은 듯하였다.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촬영 행동에 그런 호의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어떤 동네를 지나다가 그 동네 사람들이 입에 바게트를 문 사진을 찍어 모아 바로 확대 인화하여 길가 벽에 이어붙인 행동이었다. 모든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들 각자가 24시간 매력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매력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사진 찍는 사람이 그만큼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바르다와 제이알은 사진 찍히는 사람에 대한 호의를 전제로 행동하지만, 경의를 표할 대상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두 사람은 곧 철거될 광산촌 마을인 자닌을 찾았다. 20세기 중반까지 각 지역은 자신들을 알리는 사진엽서를 발행하였는데, 자닌을 알리는 엽서에는 광부들의 노동과 휴식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소르본느를 다닌 파리 사람이었던 바르다는 그 엽서를 통해 자닌의 탄광 노동자들을 알게 되고 엽서를 간직하였을 것이다. 바르다는 1950년대에 영화 작가가 되었고, 그의 작업이 누벨 바그의 실마리가 되었으니, 그의 생활은 자닌에서 행하여지는 어려운 노동에 관심을 두기 어려울 만큼 분주하고 흥미진진하였을 것이다. 바르다와 동시대의 영화작가인 프랑수아 롤랑 트뤼포(François Roland Truffaut, 1932년 2월 6일 ~ 1984년 10월 21일)의 영화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1959)》에 파리의 어린이가 아파트의 1층에 있는 저장소에서 자기 집으로 조개탄을 동이에 담아 나르는 장면이 나온다. 조개탄은 1950년대 바르다의 파리 생활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바르다에게 엽서 속 광부들의 고된 노동은 내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던 것 아닐까? 제3공화정(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 1870~1940)이래 프랑스 사람들의 의식 속에 허위적으로라도 어느 정도 자리 잡았을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우애(Fraternité) 그리고 연대(solidarité)라는 가치가 88세의 바르다로 하여금 자닌을 찾게 한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은 곧 사라질 것이라는 자닌의 탄광촌 주택 벽에 엽서 속 광부들의 사진을 입힌다. 사진 속 14세 나이의 견습광부였던 사람이 아직 자닌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가 탄광에 가져갔다가 남겨서 가지고 나온 빵을 기다리던 소녀도 할머니가 되어 자닌에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할머니가 된 소녀의 얼굴로 그의 집 정면을 가득 덮어준다. 바르다와 제이알의 팀은, 호의와 경의를 품고, 노동의 역사와 그 증인의 얼굴로, 곧 사라질 노동의 현장을 가득 채운 것이다.

직접 만든 것을 꼽아보면 타인에게 얼마나 깊게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농업노동자는 여전히 세계를 먹여 살린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노동(ou Le paysan à la houe)〉 뉴욕 공립 도서관 소장본. https://nypl.getarchive.net/media/labor-ou-le-paysan-a-la-houe-dapres-millet-89cf95
직접 만든 것을 꼽아보면 타인에게 얼마나 깊게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농업노동자는 여전히 세계를 먹여 살린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노동(ou Le paysan à la houe)〉 뉴욕 공립 도서관 소장본.

바르다와 제이알의 팀은, 소설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 1900년 7월 18일 ~ 1999년 10월 19일)의 흔적을 찾아갔다가, 제이알이 전에 여행 중 우연히 동행하였던 농업 노동자를 찾아 셰랑스로 가게 된다. 2㎢의 농지를 가진 그 농업 노동자는 다른 사람의 토지 6㎢를 포함한 8㎢의 토지를 혼자 경작한다고 하였다. 두 사람이 그의 커다란 헛간 정면을 그의 전신 사진으로 덮어준 후 이제 유명인사가 되겠다는 농담을 건네자, 그는 자기가 이미 유명인사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는 새로운 농기계들과 경작의 신기술을 즐겨 사용한다고 하면서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를 드러내면서도, 헛간에 덮인 사진은 그냥 두겠다고 하였다. “8㎢의 농지를 혼자서 마주하면 얼마나 외롭겠어”라고 바르다는 제이알에게 말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한 세계의 극적인 변화의 이전/이후를 모두 경험한 사토르 그리고 그를 알고 따랐던 바르다 같은 사람들은 그런 외로움에 대해서 조금 남달리 민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듯싶었다. 그들은 농업이 노동집약적이었던 시기도 보았고,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농촌사회가 해체되어가는 것도 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토르는 이미 세상에 없었지만, 바르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파리와 세계를 먹여살린 농업 노동자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다.

르아브르에서 두 사람은 항만 노동자의 배우자 세 사람의 사진을 컨테이너 더미에 붙이는 활동을 했다. 항만 노동자들이 소속된 거대 노조에 가려 있었지만 알고 보면 그 배우자들도 노동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들과 연대하지 못하였던 미안함을 갚으려는 듯, 바르다는 그들이 거대한 여성 토템으로 보일 수 있도록 아주 큰 전신사진들로 르아브르 항만의 컨테이너 더미를 덮었다.

빚 갚기

바르다와 제이알은 프랑스 남부 보니외에서 마을을 추억으로 물들이는 듯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곳은 예전에 에밀이라는 사람이 에밀리라는 사람과 도망 와서 부부가 되고 후손들을 낳아 기른 곳이었다. 바르다와 제이알은 후손들의 집 벽에 에밀리와 에밀의 사진을 입힌다. 바르다는 그 작업 중 카페에서 일하는 나탈리를 보게 되고 동네에서 1973년산 양산과 드레스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나탈리를 단장시켜 사진을 찍고 카페에서 내다보이는 벽에 나탈리의 대형 사진을 입혔다. 주인공의 가족들은 그것을 좋은 추억으로 받아들였으며 동네는 유명해졌다. 마을 꼭대기의 종 연주도 그에 더해졌다.

피루 플라주의 반쯤 지어져 버려진 집들을 찾아간 두 사람은 인근의 사람들을 불러 작은 잔치를 열면서 사진을 찍어, 버려진 집들에 붙였다. 바르다는 사람들이 떠난 곳에 얼굴을 붙이고 활력을 넣어 주민들이 돌아오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르다는 20년 전부터 아는 집배원의 커다란 사진을 익숙한 동네의 벽에 붙인다. 언젠가 그는 키 작은 여자에게 편지를 전하는 집배원을 그린 그림을 바르다에게 주었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편지를 배달했고 농민들이 주는 과일이나 야채로 다시 가방이 무거워지곤 하였던 그 집배원은 이제 자동차로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는 지역을 돌며 바게트도 배달해주고 있었다.

소소해 보이는 이런 활동들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일까? 이를 추측하여볼 수 있는 단서가 뿔 있는 염소에 대한 바르다의 집착 아닐까 한다. 바르다와 제이알은 뿔 없는 염소가 있는 농장과 뿔 있는 염소가 있는 농장을 번갈아 방문한다. 바르다는 뿔 있는 염소의 사진을 찍어 어느 공장의 사일로에 붙인다. 이 일은 예전에 바르다가 했던 일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1954년 노르망디의 생토뱅 쉬르 메르에서 바르다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 사진 속에는 노르망디 절벽에서 떨어진 흰 염소가 쓰러져 있었고, 나체의 남자는 염소에 등을 돌린 채 바다를 보고 있었고, 아이는 바다로부터 몸을 돌려 염소를 보고 있었다. 바르다는 이 사진을 찍던 시기에 같이 활동하였던 풀리 에리아와 기 부르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이알에게 기 부르뎅의 사진을 보여준다. 제이알은 기 부르뎅의 사진을 생트마르게리트로 가는 길가 해안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 해안에 박혀있는 독일군 벙커에 붙인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높이에 붙였던 까닭에, 기의 사진은 하루 만에 바닷물에 씻겨나갔다. 자연은 사진을 씻어 버렸지만 영화는 남을 것이라고 바르다는 말한다.

기 부르뎅은 1950년대 바르다의 활동에 줄곧 큰 도움을 주었던 동료이자 모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바르다는 그를 예술 활동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보니외와 피루 플라주 사람들 그리고 집배원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바르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으며 ‘영감’이라 할 수 있는 것의 계기와 동력을 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이야기를 다루는 작가에게는 대상이 되고 만다. 바르다에게 이러한 상황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지 않았을까? 바르다는 뭔가를 쉽게 대상화할 수 있는 정서 속에 산 사람이 아니었다. 관찰자의 시점을 견결하게 유지하지 못하여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거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기도 하는 이 다큐멘터리 같지 않은 다큐멘터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제 바르다의 이러한 태도는 희귀한 것도 아니다. 1950년대에 이미 바르다와 그의 친구들은 주관과 객관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라는 위치가 과연 객관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바르다는 전지적 시점을 유지하면서 모든 존재를 굽어보는 작가였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주위의 모든 존재는 그의 이야기의 소재이자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며, 바르다는 그러한 상황을 괴로워하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 바르다가 어느 날, 자신이 죽은 흰 염소를 한갓 오브제로 사용했던 일을 불현듯 떠올렸다면? 뿔 있는 염소에 대한 바르다의 집착은 잠깐 스쳐가는 풍경이라기보다는 바르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표출로 보였다.

88세가 된 바르다가 제이알과 프랑스 전국을 돌면서 하는 일은 그가 주위의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객체로 만들면서 가지게 되었던 마음의 빚을 갚아나가는 과정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가장 큰 빚은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에게 졌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기 부르뎅이었던 것 같다. 동시에 기 부르뎅은 동료이기도 하였으니, 바르다의 입장에서는 기를 그냥 채권자로만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소멸되어가고 있음을 알면서 소멸의 완료 이전에 채권자인 기 부르뎅에게 채무를 청산함과 동시에 동업자인 기 부르뎅과 함께 청산 혹은 소멸을 완성하는 것. 해안에 박혀있는 독일군 벙커, 바닷물이 들어오는 높이에 붙였던 기의 사진이 하루 만에 바닷물에 씻겨나갔던 것이 바르다의 바람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바깥을 떠도는 어린 양들이 무리를 이끈다

제이알과의 공동활동이, 함께 활동하였거나 영감을 준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 일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면, 바르다의 마지막 채권자는 제이알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바르다와 제이알은 부딪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긴 하였다.

“난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지?” 이 독백이 누벨 바그를 밀고 나갔던 근원적인 동력이었을 것이다. by Ferdinand Feys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ferdinandfeys/40679169983/
“난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지?” 이 독백이 누벨 바그를 밀고 나갔던 근원적인 동력이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Ferdinand Feys

바르다는 제이알이 항상 모자와 선글래스를 쓰고 있어서 장막을 친 것 같고 정이 가질 않는다고 한다. 바르다가 ‘너 같은 얘도 돌아갈 집이 있냐’고 비아냥대자 제이알은 100세 된 자신의 할머니를 만나게 해주며 자기가 돌아갈 가족이 있음을 증명한다. 제이알은 할머니가 키운 손자였고, 이제는 할머니가 손자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제이알은 바르다의 ‘공격’에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모자와 선글래스는 유전이라고 둘러댄 것에서도 제이알의 까닭 모를 불안이 엿보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년 8월 22일 ~ 2004년 8월 3일)의 묘지에 동행한 것은 제이알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외진 곳에 있는 작은 규모의 묘지였지만, 브레송의 묘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 준 흔적이 있었다. 그런 풍경을 접한 제이알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두 사람은 포니라는 75세 된 사람의 사진을 찍고 그의 집을 방문한다. 인정받는 노동을 한 적이 없기에 국가가 제공하는 최소 수준의 연금으로 살아가면서 그는 우주의 중심과 예술가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미 대단히 활발한 예술활동을 해 온 제이알에게 포니의 삶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어느 날 바르다는 제이알과 함께 열차를 타고는, 1961년 아나 카리나(Anna Karina, 1940년 9월 22일 ~ 2019년 12월 14일),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년 12월 3일 ~ )와 함께 만든 단편영화를 보여준다. 장 뤽을 방문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롤르Rolle에 있는 장 뤽의 집 문은 닫혀 있었고, 문의 유리창에는 두 개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드아르느네에서” “해변에서” 첫 번째 글귀는 바르다의 배우자였던 자크 드미(Jacques Demy, 1931년 6월 5일 ~ 1990년 10월 27일)가 죽었을 때 장 뤽이 적었던 글귀로, 그들이 어울렸던 장소라고 바르다는 설명해 주었다. 두 번째 글귀는 바르다가 만든 영화의 제목이었다. 장 뤽이 반응하지 않자 바르다는 대략 “…… 기억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문을 잠근 건 안 고마워 ……” 라는 글을 유리창에 적어놓고 돌아선다.

상심한 채로 호숫가에 앉은 바르다는 제이알에게 옛일을 하나 이야기해 준다. 아나와 장 뤽 커플이 니스의 별장으로 바르다와 자크 커플을 초대했을 때, 장 뤽은 책을 읽었고 아나는 “난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자 제이알은 “난 뭘 해야 할까요? 뭘 할 수 있지요? 선생님을 위해서?”이라 물으며 선글래스를 벗고 바르다를 바라보았다. 시력이 악화되고 있어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바르다는 제이알이 성의있는 위로를 해주었다고 생각하며 고마워했다.

바르다가 제이알의 물음에 즉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답에 해당하는 말을 해 둔 상태였다. 어느날 바르다는 제이알과 함께 오리떼를 바라보다가 “바깥을 떠도는 어린 양들이 무리를 이끈다”고 했었다. 알고 보면 이는 그저 돌아갈 곳이 100세 드신 할머니밖에 없고 사진관 트럭과 함께 떠돌고 있는 제이알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1950년대에 바르다, 자크, 장 뤽, 아나가 어울렸을 때, 그들은 모두 바깥을 떠도는 어린 양이었을 것이다. 또 그러했기 때문에 세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정면으로 부딪쳤던 것이다. 바르다는 오랜만에 멀리서 찾아온 친구에게 까탈스럽게 대하는 장 뤽이 아직도 바깥을 떠도는 어린 양이고, 예전에는 아나가 던졌던 “난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지?”라는 질문을 아직도 품고 있는 예술가라고 생각하기로 한 듯했다. 그리고 불안해하면서도 자신을 위로하기에 바쁜 제이알에게 아나의 질문을 계속 간직할 것을 권한 듯하다. 젊은 시절의 바르다에게 “난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지?” 라는 카리나의 독백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느껴졌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장뤽은 우러러 보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리나의 독백은 무지나 불안의 표출이 아니라 누벨 바그를 밀고 나갔던 근원적인 동력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바르다는 이 질문의 소유권을 제이알에게 선사함으로써 마지막 채무를 청산하려 한 듯하다.

제이알은 시력이 악화되어 가고 있는 바르다의 두 눈 그리고 손과 발을 촬영하여 크게 인화한 후, 프랑스를 돌아다니는 열차들에 붙였다. 두 사람의 공동활동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다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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