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철학] ② 흐름(Flux), 내발적 발전을 향하여

흐름(Flux)의 사유는 헤라클레토스의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사상에서 가브리엘 타르드의 모방, 따라 하기, 유행 등의 원리로 나타났다. 정동의 흐름은 공동체를 강렬하게 만들어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들어낸다. 이를 주체성 생산이라고 부른다. 공동체의 정동의 흐름은 플랫폼자본주의의 포획을 넘어선 초과현실로서의 공동체의 전략을 의미한다.

흐름의 사유, 횡단의 사유

공동체에서는 모종의 정동과 욕망의 흐름이 자리와 배치를 장악하고, 이 흐름에 따라 각각의 태도와 형태, 모양을 변모시키면서도 서로에게 흐름이 갖고 있는 강렬도를 전달해주는 감광판과 울림판의 역할을 하는 공동체 사람들이 있다. 흐름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면 곧 다른 사람에게 뉘앙스, 분위기, 느낌의 형태로 흐름을 다시 전달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전달되는 사랑, 욕망, 돌봄, 정동의 흐름은 재귀적으로 증폭되어 파고(波高)가 되어 눈덩이효과를 일으킨다.

흐름(Flux)에 대한 처음으로 규명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불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이다. 그는 “한번 담근 강물에는 다시 담글 수 없다”라고 하면서 흐름이 갖고 있는 철학적인 잠언(箴言)을 던진다. 결국 만물이 변화하고 유전한다는 생각으로 향하게 만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은 헤겔(Hegel, Georg Wihelm Friedrich)의 변증법(Dialectic)사상의 모태가 되었다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헤겔의 사상은 인륜적 공동체가 미리 전제되어 있어서 대립, 모순, 적대가 있다 하더라도 사회의 성숙으로 향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를 생성시키고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공통감(Common Sense)에 의해서 늘 주어져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통속적인 통일성의 철학, 동일성의 철학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의 흐름의 사상은 동일성, 통일성, 합일을 전제로 하여 부정적인 힘의 작용의 반작용으로 흐름을 만들어내는 효과에 주목할 뿐이다. 즉, 헤겔의 흐름의 사상은 공동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작동방식으로서의 변증법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사랑과 욕망의 흐름은 서로를 같아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으로 더욱 달라지게 만드는 원천이다. “사랑할수록 같아지는가? 닮아지는가?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면, 동일성의 철학은 “사랑할수록 같아진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에 반해 커먼즈의 철학은 “사랑할수록 닮아진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는 사랑과 정동, 연대의 과정에서 사방으로 분기(分岐)하듯 ‘차이를 낳는 차이’로 흐름을 변모시킨다. 마치 장터에서의 중언부언하듯 서로 딴소리를 하면서 일관성을 갖게 되는 일관성의 구도(plan of consistence) 혹은 고른판처럼, 흐름의 과정은 비유기적인 것 사이를 연결하는 횡단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할수록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가 조성되어 그 안에서의 정동의 흐름은 2차적 차이를 만드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판은 사실상 “사랑할수록 달라지자”는 욕망의 철학, 차이와 다양성의 철학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에서의 흐름의 사유는 횡단성의 사유일 수밖에 없다. 흐름을 화음으로 지칭한다면 울림이 떨림이 되고 박자와 리듬이 어우러져 공명이 되는 과정으로도 얘기해 볼 수 있다. 그 진동판이 동조화되는 과정을 동일성으로 식별한다면 사실상 통보, 정보전달, 단조로운 박자 맞추기, 일방적인 명령, 의사소통적 합리화과정 등과 같은 동질적인 집단에서의 변조로만 그칠 것이다. 그러나 진동판은 각기 다른 화음으로 울리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거대한 다성화음적인 하모니와 리토르넬로(ritornello)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울림판은 미세한 차이를 그저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증폭함으로서 서로 다른 음색, 운율, 리듬을 다성화음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흐름은 수평선이나 수직성이 아니라 비스듬히 연결하는 횡단선이다.

양자적 흐름과 횡단성

유튜브, 페이스북 등의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정동을 발휘하고 울고 웃고 즐기다보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간다. by Wikimedia Commons 출처 : https://images.app.goo.gl/2E3WeEkWV8ooBhzM8
유튜브, 페이스북 등의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정동을 발휘하고 울고 웃고 즐기다보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간다.
사진 출처 : Wikimedia

흐름(flux)의 사유가 다질적인 횡단의 사유로서가 아닌 동일적인 사유로 왜곡되면서 결국 담론 속에서 실종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흐름의 사유를 놀랍게 다시 복권한 사람이 있다. 바로 가브리엘 타르드(Jean Gabriel Tard)이다. 그의 책, 『모방의 법칙』(2012, 문예출판사)에서는 모방, 따라 하기, 인기, 유행 등의 흐름에 따라 이러 저리 움직이는 군중(la foule)과 뉴스와 서적에 따라 이성적인 사유를 하는 공중(Public)에 대한 비교가 나온다. 여기서의 흐름은 사실상 인지부조화에 가까운 사유라고 간주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어찌보면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 타르드의 진단이다. 흐름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간주되는 이유는 ‘표상화=의미화=모델화’의 재인, 재현, 재생산 모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표상적인 흐름=지도화=메타모델화’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재인, 재현, 재생산의 논리는 보편어법에 따르는 하나의 획일적인 모델에 따라 효율성(efficiency)을 추구한다면, 흐름의 논리는 다양한 모델을 넘나드는 탄력성(resilience)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효율성 보다 탄력성을 추구하게 될 때의 장점은 하나의 의미, 표상, 모델에 얽매이지 않고 쉽게 횡단하고 변화하고 모방하면서 여러 모델과 여러 의미를 넘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흐름의 사유는 오류가 나더라도 금방 고치거나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등의 융통성, 회복력, 완충성 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흐름의 사유는 하나의 모델로서 ‘음악 감상’과 다른 모델로서 ‘게임하기’와 또 하나의 모델인 ‘거래하기’ 등을 부드럽게 넘나들면서 횡단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정신분석이라는 하나의 모델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 선 수련, 명상, 인지치료, 요가 등등을 넘나들면서 이를 매끄럽게 횡단하는 것이 흐름의 사유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델이 비유기적일 수밖에 없고 자체 논법과 반복양상이 모두 다른데 어떻게 흐름이 형성될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한 문제제기는 흐름의 색다른 지평으로 인도한다.

사랑, 욕망, 정동, 돌봄의 흐름

흐름이 매끄러운 횡단을 하게 되는 것은 반복과 반복, 표상과 표상, 모델과 모델, 문제설정과 문제설정을 매끄럽게 연결해 주는 정동(affect)이라는 이행양식이자, 변환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동은 표상에서 촉발된 정서(affection)과 달리, 표상과 표상의 이음새 역할하면서 동시에 정서변환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는 포크와 칼을 표상적인 두려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냅킨 위에 바르게 정렬하면서 식사시간으로 매끄럽게 이행한다. 그런 점에서 정동은 배열, 정돈, 수선, 배치, 정렬 등을 한다는 점에서 미학화된 돌봄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정동의 흐름은 사랑의 무한한 잠재성과도 같다. 강도, 속도, 온도, 밀도가 전(前)개체적인 흐름으로 순환되고 유통되기 때문에 그 에너지와 힘은 공동체에게 엄청난 활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또한 재귀적으로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이 증폭되는 것’이 정동노동의 모습이다. 물론 감정노동의 경우에는 ‘외면적으로 친절하지만, 자신의 감정 하나를 고착시켜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의 소진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유한성 테제에 가깝다. 우리의 질문은 던져질 수 있다. 정동노동의 경우처럼 사랑은 무한한가, 감정노동처럼 사랑은 유한한가? 그런 점에서 정동의 흐름이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성에 대해서 착목하는 플랫폼 등과 같은 다양한 문명의 시스템들이 작동하고 있다.

마을과 공동체에서의 활력은 어디로부터 유래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면, 먼저 자원 때문에 활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성장주의 시대가 갖고 있는 자원의 배분의 문제와 활력의 정동과 동조화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프로젝트가 수행되면 맥락과 배치에도 없는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 일만 해내고 아무런 마을의 관계망 성숙에 도움이 안 되고 떠나버린다. 그런 점에서 활력은 자원으로부터 올 때 그 활력은 굴절된 자본주의적 욕망과 함께 다가온다. 그러나 활력의 원천은 사실은 삶과 신체에서 유래된 맛, 이미지, 표정, 몸짓, 냄새, 색채, 음향과 같은 기호작용의 반복이 만들어낼 수 있다. 삶의 과정에서의 기호의 반복이 에너지가 되는 특이점이 설립되는 것이다. 삶과 신체로부터도 유래한 기호작용의 반복이 마치 염불이나 기도행위처럼 재귀적이고 순환적인 반복의 양상이 지속될 때 활력과 에너지는 비로소 생성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삶과 신체로부터 유래된 인력에너지인 정동이 갖고 있는 잠재성과 가능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은 어디에서 발생할 것인지, 어디로 향할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경우의 수에 따르는 확률론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에 자원-부-에너지의 흐름이라는 함수론적인 것을 실어 나르면, 사실상 확률론의 주도성을 가질 수 있다. 왜 우리가 산술적 수보다 경우의 수에 주목하는가 하면 그것이 문명의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성장주의 시대는 산술적 수의 주도성 속에 경우의 수를 종속시켰던 문명의 형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나 효율성, 속도 등이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을 포획하고 그 성장의 논리 안에서만 가냘프게 흐름을 발생시키도록 했다.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이 반복되면 다시 말해 반복의 형태로 특이점을 형성하면 그것은 문명의 선택지가 된다. 이를 테면 노숙인에게 밥을 한 끼 해주는 것이 여러번 반복되면 노숙인에게는 선택의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플랫폼자본주의와 흐름의 잉여가치의 약탈

최근 정동의 흐름이 갖고 있는 잠재성에 주목하면서 흐름의 잉여가치를 탐색하는 유형의 자본주의 유형이 등장했다. 플랫폼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유형의 자본주의의 새로운 양상이다. 구글, 넷플리스, 유튜브, 페이스북 등의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정동을 발휘하고 울고 웃고 즐기다보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간다. 이에 따라 기존의 공동체가 했던 역할과 기능을 플랫폼이 모방하는 국면에 직면한다. 원래 흐름의 잉여가치의 영역은 늘 대안세력의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동의 흐름에 따라 전환사회가 형성되고, 구성된다는 신념이 대안세력에게는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테면 내발적 발전(Endogenous Development) 전략만 보더라도 그렇다. 공동체 내부에서의 거래양식이 호혜적인 형태로 내부에서 순환되면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라는 것이 내발적 발전 전략의 원리이다. 그런데 이제 그 역할을 플랫폼이 갈취하고 있는 상황이다.

플랫폼자본주의 유형의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 그 다음으로 형성되었다. 인지자본주의의 코드의 잉여가치(surplus of code) 유형의 착취방식은 정동의 흐름의 외부에서 ‘코드화=의미화=가치화’를 통해서 추출하고 채굴하는 유형의 자본주의였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서로 상관없는 두 영역 사이를 연결하는 코드가 잉여가치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 대해서 적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2001, 새물결)에서 말벌과 난초가 모의성교하는 과정에서 코드의 잉여가치 현상을 발견했다. 그 항목으로는 1)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2) 대기업 골목상권 진출, 3) 집단지성 갈취를 통한 기계적 잉여가치, 4) 1세계와 3세계간의 분리차별 등이 항목이 있다. 그런데 코드의 잉여가치는 인지자본주의가 갖는 지극히 합리화된 논리, 의미화된 논리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동자본주의 유형으로 이행한 문명의 인지부조화라고 할 수 있는 모방, 따라 하기, 유행, 트랜드 등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그 안에서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지자본주의 국면과 정동자본주의 국면은 엄밀히 차이를 갖는다. 다시 말해 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정동의 흐름 외부에서 추출과 채굴의 태도를 취했다면, 정동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정동의 흐름 자체를 유통되는 판을 개설하는 역할을 한다.

정동자본주의가 흐름의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사실상 정동의 흐름이 순환하고 유통되는 판과 구도가 플랫폼인지, 공동체인지를 식별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되고 있다. 플랫폼의 경우에는 공동이용으로서의 쉐어링(Sharing)으로 판을 깔지만 그것이 공동소유인 커머닝(Commoning)으로 가지 않고, 사적 이득의 취득으로 남게 된다. 결국 외양상으로는 플랫폼과 공동체 및 커먼즈가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더라고 공동의 규칙을 갖고 공동 소유와 공유자산으로 부의 흐름이 움직이는지를 살펴보면 엄밀하게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자본주의 다시 말해 플랫폼자본주의의 개막은 공동체운동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회가 아니라, 판의 주도성 전부를 빼앗길 위기의 상황에 직면한다고 할 수 있다.

흐름과 강렬도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정동의 상호작용은 끊임 없이 초과현실, 잉여현실을 만들어낸다. 이 능력과 결과를 플랫폼은 끊임없이 탐내겠지만, 탈주는 멈춰지지 않는다. by pxfuel 출처 : https://www.pxfuel.com/ko/free-photo-otgcg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정동의 상호작용은 끊임 없이 초과현실, 잉여현실을 만들어낸다. 이 능력과 결과를 플랫폼은 끊임없이 탐내겠지만, 탈주는 멈춰지지 않는다.
사진 출처: pxfuel

사랑과 욕망, 정동의 흐름이 강렬해지면, 가수가 아닌데도 노래를 부르고, 아나운서가 아닌데도 사회를 보고, 댄서가 아닌데도 춤을 준다. 흐름의 강렬도에 감응한 사람들을 주체성(subjectivity)라고 부른다. 주체성은 주체(subject)처럼 책임, 믿음, 역할, 직분, 기능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흐름의 강렬도가 만든 이색적인 출현적인 사람들이다. 주체성은 사랑, 욕망, 정동, 돌봄, 삶, 살림에 입각한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기능이나 기관이 주어지지도 않았는데도 불쑥불쑥 팔 역할, 다리 역할, 머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출현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기체(Organism)에 대항하는 기관들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라고도 하는데, 유기적인 관계양상으로서의 기관원처럼 바뀐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라 조각조각이 생성적이고 출현적인 신체양상을 띠는 것이 공동체의 판이라는 점에 대한 적시이다. 동시에 이를 칼 폴라니는 브리콜라쥬(bricolage)의 신체양상이라고 하는데, 공동체 사람들은 유능하고 능숙하게 주변의 소재를 활용하여 색다른 것을 생성시키는 예술 활동과 같은 판을 짠다는 의미이다.

사실 공동체의 판에서 생성되는 주체성은 모두가 판 짜는 자라는 점에서 선수이기는 하지만, 그 흐름의 강렬도에 맞추어 동작과 행동을 하면 모두가 아마추어이고 어색하고 서툴다. 여기서 흐름의 강렬도의 증폭의 부분은 사실상 국지적인 영역에서의 재귀적(再歸的)인 상호작용의 과정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의 각 부위는 벌집 유형의 모듈로 이루어져 있어서 술자리 옆에 사람들이나 곁과 가장자리의 사람과 국지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그러나 강한 상호작용은 센터에서 통제하고 조절하려는 사람들을 초과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에 따라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노래하는 등의 행위양식을 보이는 이유는 공동체의 판의 정동의 흐름의 판이 깔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모듈(module)단위의 강한 상호작용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의 흐름은 정동의 상호작용과 보완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동의 흐름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가 아니라, 국지화되면서 강한 상호작용으로 향한다. 그러나 정동의 흐름과 정동의 상호작용 간에는 심원한 차이가 있다. 정동의 흐름은 너와 나 사이에 너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우리 중 어느 누군가’라는 혼재면(混在面)의 발생과 생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혼합현실, 중간현실 등이 등장하여 흐름을 전염시키고 확산시킨다. 그러나 정동의 상호작용은 국지적인 영역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면서도 강한 피드백(feedback)을 통해서 흐름에 감응하여 구체적인 돌봄이나 살림의 영역으로 구현한다. 다시 말해 혼재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공동체의 판이라면 강한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은 공동체의 판 위에 있는 벌집 유형의 모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동의 흐름이라는 망원경과 정동의 상호작용이라는 현미경을 교차하면서도 응축과 팽창이라는 역동적인 미시정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정동의 흐름은 강렬해지고 더욱 증폭된다. 이에 따라 불쑥불쑥 주체성이 생산되고 그 일을 해낼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동의 흐름은 흐름의 잉여가치 양상으로 플랫폼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포획될 수 없는 바가 바로 초과현실, 잉여현실을 만들어내는 능력임과 동시에 정동의 상호작용과의 미시정치의 양상에 대해서 플랫폼이 모두 다 포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동의 순환과 흐름은 새로운 공동체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그 모든 흐름의 강렬도를 담아낼 수 없으며, 모듈의 국지화를 통해서 이에 감응할 뿐이다. 정동의 흐름이라는 대안세력의 전망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공동체운동의 전략적인 영역이락 할 수 있다.

이 글은 『공동체성』(알렙, 2022년 발간 예정) 출간 전 연재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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