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형으로서의 교육과 완성형으로서의 입시

현재의 한국교육은 배움과 성장이 중심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 상승을 위한 경쟁의 장이 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결국 삶을 위한 것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삶에서 끊임없이 좋은 삶에 대한 질문과 답을 하는 과정이다. 또한 관계성을 토대로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욕망의 창조와 생성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대학입시로 수렴되는 (교육) 현실

대학입시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기 위한 로드맵은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국제중-외고/자사고로 이어지는 일종의 명문학교 로드맵의 목적은 명문대학의 입학에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로드맵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의 표준처럼 작동하고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루저(Loser)로 위치지어진다.

그러다보니 ‘공교육’에서도 대학입시라는 기표를 향해 달려간다. 거의 모든 정권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언제나 걸림돌은 대학입시이다. 교육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도 대학입시에 있다는 건 흔하게 듣는 말이다.

거의 모든 정권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언제나 걸림돌은 대학입시였다. by Sam Balye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w1FwDvIreZU
거의 모든 정권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언제나 걸림돌은 대학입시였다.
사진 출처 : Sam Balye

학생의 배움과 성장을 중심에 두고, 개별 학교의 지역적 맥락과 특성을 반영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자 했던 혁신학교 정책 역시도 대학입시와 가까워지면 실패한다. 고등학교에서는 혁신학교의 정책도 대학입시와 연결된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학생들을 이중고에 빠뜨렸다. 이를테면 학생 참여가 활발한 수업, 학생의 다양한 자율 활동 등은 수능의 준비와 거리가 있으며 학교민주주의에의 학생 참여 역시 수능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활동이다. 그래서 혁신고등학교 학생 일부는 수능을 준비하기 위해서 방학이나 방과 후에 학원에서 준비를 하고, 대학입시의 수시 전형을 위해서 학교에서의 활동을 참여한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교육 정책이 만들어져도 대학입시로 인해 왜곡된다는 말이 나온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 좀 더 명확하게는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가가 곧 존재의 의미를 결정해왔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대학 평준화 혹은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와 같은 운동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그 운동은 실패했다. 학벌이라는 카르텔은 한국사회에 대단히 뿌리깊이 내재되어 있으며 사회 내에서 권력을 독점한 이들이 그들의 자리를 다른 존재들에게 내어줄 리 만무하다.

교육이 계층이동의 사다리라는 도구인가?

어쩌다 이렇게 대학의 이름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일까. 그 원인을 교육을 사회적 지위 상승의 도구로 두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능력주의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삶이 정해졌던 봉건사회에 대한 비판, 능력에 따른 차별이 당연한 능력주의가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 잡으면서 교육은 능력주의를 공고하게 한 일등공신이다.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능력주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공교육 정상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이었다. 계층이동이 가능하면, 공교육의 정상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다보니 교육은 경쟁의 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2010년으로 기억한다. 김예슬이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선언을 했고, 그 선언문1에는 경기장의 정해진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의 삶을 거부하고, 경기장을 탈주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현재의 한국 교육은 경주마들의 경주를 위해서 존재하는 경기장이다. 공정에 천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규칙이기 때문이다.

교육: 대안적 욕망의 지도그리기

교육은 욕망의 비강제적 재배치이며, 그것은 민주주의, 곧 모두의 좋은 삶을 위해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by olia danilevich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5088188/
교육은 욕망의 비강제적 재배치이며, 그것은 민주주의, 곧 모두의 좋은 삶을 위해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사진 출처 : olia danilevich

교육은 결국 삶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학령기 학생에게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필자는 ‘욕망의 비강제적 재배치’라고 말하는 스피박의 교육에 대한 정의에 공감한다. 욕망의 비강제적 재배치는 민주주의, 곧 모두의 좋은 삶을 위해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교육에서의 주도성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이자 그것을 삶으로 실천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주도성은 모든 존재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연대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되며, 따라서 그것이 공교육이 말하는 주도성이어야 한다. 이런 맥락으로 교육을 정의하면 교육은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좋은 삶에 대한 질문과 답을 하는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가타리가 말하는 욕망과도 연결된다. 가타리는 욕망의 생성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안적이고 창조적인 욕망은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와 같은 관계망 속에서 배치를 다르게 하고 배치와 배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새로운 욕망의 지도를 그려가는 과정이 역동적이고 혁명적인 힘으로서 욕망의 생산이다.

필자는 가타리가 말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생성과 창조의 과정이 곧 교육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교육을 과거와 미래 사이로 명명하는데, 과거의 존재인 교사가 존재 자체로 새로움을 담지한 학생을 만나는 장이 교육의 공간이라고 본다. 교육의 공간에서 다층적으로 다양한 관계들 속에서 학생들의 새로움이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곧 교육의 역할이다. 교사는 세계의 질서를 교육과정으로 구성하고 그것을 매개로 학생과 만나지만, 그 만남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교육은 관계성을 토대로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욕망의 창조와 생성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1.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남미자

보잘 것 없는 삶이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시의 시간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한 편 혹은 여러 편의 시로 살아가는 모든 빛나는 존재들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연구자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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