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정의’에는 인간만 포함되나요? – 동물해방이라는 가능 세계

동물권 활동가로서 기후정의운동을 하며 느꼈던 감정들을 글로 풀어 보았습니다. ‘기후정의운동’ 이라는 거대한 연대의 테이블에서 인간동물뿐 아니라 비인간동물의 정의가 함께 이야기될 때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영국 석탄노조 파업을 지지했던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서 불리워진 연대의 노래 “Bread & Roses”. 더 많은 담론이 연대의 테이블에 자리할 때 비로소 우리가 꿈꾸는 ‘정의’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출처 : 유투브 Bread And Roses(Korea sub)

2017년, 울산에서 열린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집중행동에 참여했다. 단체버스로 아침 8시에 출발해서 행진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하루 종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 주최 측 활동가가 “다들 고생하셨는데 근처 해장국집에서 뒤풀이겸 식사하고 가시지요!” 라며 힘차게 외쳤다. 채식하는 동물권 활동가였던 나는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나는 하루 종일 어떤 사람들과 연대하며(혹은 연대한다고 착각하며) 걸었던 걸까, 마음속에 뒤엉키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을 다독이며 집으로 향했다.

2022년, 기후 ‘정의’ 운동은 달라졌을까?

얼마 전 부산에서 열린 고리 2호기 수명연장 반대를 위한 전국 집중행동에 참여하기 위해 버스를 탔을 때도 같은 경험을 했다. 휴게소에 먹을 수 있는 식사 메뉴가 없어서 맛밤과 두유로 허기를 때웠다. 씁쓸했다. 한 끼 식사를 굶어야해서가 아니라 여기 연대하러 온 ‘나’라는 존재가 여전히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해서다. 비건 참여자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면 주최 측도 비건의 생존권 -식사시간에 마땅히 밥을 먹을 권리, 나아가 다른 참여자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이야기 나누며 식사할 수 있는 여유(빵과 장미)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동물권이 비교적 가까운 의제인 기후-환경운동에서도 배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함께 연대하며 나아가려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기후운동에서 배제되는 동물권 : 동물권은 기후운동의 걸림돌인가?

오랜 시간 동안 지구온난화의 심벌은 인간 피해자가 아닌 ‘북극곰’이었다. 케이블카, 신공항 등 토건 사업을 막기 위해 소환하는 이미지도 피해자-사람보다는 비인간동물(주로는 멸종위기종)인데, “이 가엽고 귀여운 동물을 지켜주세요, 죽이지 말아주세요.”라는 시혜적인 외침을 담은 커다란 포스터에는 거대한 동물의 이미지만 있고 주체성을 가진 동물은 없다.

정육코너 매대에 깔끔하게 진열된 ‘고기’는 노동자가 생명을 죽이며 매 순간 경험하는 폭력과 비인간동물의 고통을 은폐한다. 
사진출처 : Darth Liu
정육코너 매대에 깔끔하게 진열된 ‘고기’는 노동자가 생명을 죽이며 매 순간 경험하는 폭력과 비인간동물의 고통을 은폐한다.
사진출처 : Darth Liu

기후진영에서 나오는 탈육식 담론 또한 대부분 탄소환원주의의 형태로 귀결된다. 결과물인 ‘고기’와 생산행위 부산물인 ‘탄소’, 원인인 ‘자본주의(공장식 축산업)’라는 삼각형 안에서 이야기가 맴돌며, 윤리 문제는 빠져있다. 고통받는 생명에 대한 윤리는 비단 비인간동물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육코너 매대에 깔끔하게 진열된 ‘고기’는 노동자가 생명을 죽이며 매 순간 경험하는 폭력과 비인간동물의 고통을 은폐한다.

생명을 고기생산 기계로 취급하며 탄생부터 죽음까지 극한의 고통을 겪게 하고, 대리 살생을 종용하며 노동자가 정신병을 얻게 하는 결과물로의 ‘고기’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본가가 ‘돈’이라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탄소를 배출하고 생태파괴를 묵인하는 것과 소비자가 ‘고기’라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대리 살생에 대한 임금이 포함된 ‘고깃값’을 지불하고 비인간동물의 고통스런 죽음을 묵인하는 형태는 어떻게 다른가? 소수가 겪는 부정의를 논하는 일이 정의로 가는 길의 걸림돌인가, 아니면 ‘대의를 위해 나중에’를 외치는 일이 걸림돌인가?

동물정의 없이는 기후정의도 없다

기후 위기의 진짜 원인은 성장주의, 팽창주의, 채굴 주의로 인한 무차별적 착취와 그로 인한 불평등이다. 이러한 부정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인간이 아닌 자연과 비인간동물에게 발현된다. 근본적인 문제점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착취관계에 대해서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한다면,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해결책’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요는 ‘정의’가 누구에게까지, 어떤 동물에게까지 적용되느냐가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 작동되는 착취를 완전히 분쇄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체제 전환도, 어떠한 종류의 정의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정의의 적용 범위를 나누는 것 자체가 정의를 온전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범위 설정이 아닌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동물권이 더해진 ‘정의’의 테이블에서 우리의 논의는 어떻게 확장될까?

동물원과 공장식 축사, 실험실에 갇힌 동물의 고통은 이주민 보호소라 불리는 감금소, 신체장애인의 이동권, 정신병원이 사회로부터 ‘병자’를 명명하고, 분리하고, 고립시키는 문제 등 감금과 이동권 박탈에 대한 더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동물 ‘보호법’에서 표시하는 감금과 ‘복지’의 조건을 짚어보며, ‘보호’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국가적 폭력에 대해서도 더 깊게 사유할 수 있다.

또한 우유와 달걀의 생산, 실험 동물의 판매를 이유로 강간과 임신, 출산, 아기 빼앗기를 반복하는 동물착취는 여성의 재생산과 도구화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재생산 도구로 착취당하는 여성성이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는 한 성 착취는 사라질 수 없기에 본원적인 문제 해결과도 직결된다.

포드주의의 모태인 공장식 축산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 생명을 기계적으로 착취하는 극단적 모습을 드러내며, 최대 생산 – 최대이윤을 목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권의 문제로 연결된다. 동물권은 생명이 도구화될 때 인간이 어떤 폭력적 착취까지 저지르는지에 대한 더 넓은 시야를 제시한다. 모든 폭력과 착취가 사라진 세상이라는 비전을 세울 때 동물권은 그 이상을 가장 멀리까지, 가장 조화롭게 그려낼 수 있는 동력이자 양분이 될 것이다.

‘동물 해방’이라는 가능 세계

정의란 호모사피엔스라는 특정한 종의 장벽에 갇힌 취약한 상품이 되어서는 안된다.

Carol J. Adams

동물권 담론은 동물 같은 삶, 동물로서의 삶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동물권 활동가들은 존재가 본연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동물이 동물답게 살 수 있을 권리를 오랜 시간 고민한 동물권 활동가들이 기후정의 운동에 뛰어들 때 이 운동의 지형은 훨씬 입체적이고 다각적으로 변할 것이다.

기후정의에 대해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같이, 동물권에서 제시하는 정의의 개념에 대해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실현 불가능하다’며 상상력을 닫아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가는 길이 멀고 험난할지라도, 연대의 폭이 넓어질수록 더 나은 세상에 대해 더 다층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동물권 담론은 기후정의를 더 정의롭게, 더 풍부하게, (물리적 확장으로)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며,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길고 담대한 여정의 든든한 동료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 갈 수 있고, 함께 가야만 한다.

인간동물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동물권, 기후정의 활동가.
지구공동체의 안녕에 관심이 많다.

댓글 4

  1. 전율이… 글 잘 읽었습니다. 매순간 실천하진 못하더라도 많은 선택의 순간들에 올바른 길을 갈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너무나 공감되는 글입니다. 제가 가진 생각을 이리 잘 정리된 글로 만나니 참 반갑고 고맙네요.

  3. 상상력에 대한 글이면서 지금-여기의 착취 구조에 대한 담담하고도 뜨거운 분석이라 느꼈어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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