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주의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후 위기에 대한 걱정은 많지만, 구독 중인 환경 관련 뉴스레터도 가끔 들여다볼 뿐인 사람이 어찌어찌 글을 기고하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기후 위기와 생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어떤 생각들을 가졌는지 짤막한 생각들을 적어보려 한다.

지구가 아파요

어린이집 졸업 선물로 지구온난화에 대한 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표지에는 지구가 울고 있는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아픈 지구에 감정을 이입해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놀이터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분리수거를 신경 써서 하고, 양치컵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 에어컨을 사지 말고 선풍기로 여름을 견디자고 말하던, 집에 자가용이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노력만으로 바뀌는 건 없었고, 어느새 우리 집엔 에어컨과 자가용이 생겼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 밑에서 이불 덮고 잠이 들거나 온수를 틀고 노곤해진 몸을 느긋하게 씻는 건 왜 그리 좋은지. 물티슈 한 장 뽑아 방바닥을 닦고 버리는 과정은 걸레를 빠는 것보다 훨씬 간편했고, 일터에 비치된 종이컵은 매일 텀블러를 씻고 말려서 챙겨가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에너지와 자원을 마음껏 사용할 때면 한쪽에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도 ‘다들 쓰는데, 나보다 더 심한 사람도 있는데, 귀찮은데 어떡해.’ 하고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지구온난화가 사기극이라는 이야기에 잠시 혹했던 적도 있었다. 죄책감은 있었지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거나 자세하게 공부해본 적은 없었다.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 위기입니다”

‘북극 최후의 빙하가 녹았다.’ 같은 제목의 기사를 볼 때면 걱정되고 겁이 나면서도 관심을 갖고 행동에 참여하기보다 체념하기에 그쳤다. 약간의 죄책감과 무기력함 속에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지내다가 2020년 호주 산불, 코로나19와 그해 여름 장마를 겪으면서 더 이상 눈감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2020년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마을이 잠겼다는 뉴스들, 한강 물이 강 인근 공원과 풀숲, 도로, 편의점이 있던 자리까지 차오른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야 기후 위기가 나에겐 정말 현실로 다가왔던 것 같다. 결국 자기 코앞까지 문제가 닥쳐야만 위기를 실감하고 움직이는 게 인간인 걸까.

이해받지 못한 날

신발 쇼핑몰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나의 업무는 신발을 검수하고 포장하여 출고하는 일이었다. 신발공장에서 온 박스 안에는 30쌍의 신발이 각각 비닐로 포장되어 있다. 비닐에 담겨 있는 신발을 꺼낸다. 사이즈가 표시된 스티커를 뜯어 버리고, 라이터 기름과 면봉, 물티슈를 사용해 얼룩을 닦는다. 신발 안에 깔창과 포장재를 넣고, 새 스티커와 텍을 붙인다. 신발을 습자지로 포장해 새 박스에 넣고, 그 박스를 택배 비닐로 포장한 뒤 송장을 붙이면 끝이다.

공장에서 포장되어 온 신발을 재포장하여 출고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나오는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보면서 ‘현타’가 자주 오곤 했다. 매일매일 생산되어 팔리는 새 물건들과 그 잔해물들을 보면 허망했고, 이렇게 돈을 벌어도 괜찮으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친구는 ‘그렇게까지 생각한다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도 쇼핑몰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이후 청렴(?)한 곳에서 일했던 건 아니었다.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며 쓰레기들을 계속 만들어냈다. 하지만 내가 느낀 ‘현타’를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의 반응을 보며 내가 너무 과한 생각을 했나 싶어 민망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썩지 않을 것들

한번 사용하고 몇백 년 동안 썩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플라스틱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사진 출처 : Nataliya Vaitkevich
한번 사용하고 몇백 년 동안 썩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플라스틱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사진 출처 : Nataliya Vaitkevich

2018년 쓰레기 대란, 2020년 코로나19 이후 사회적으로 기후 위기와 쓰레기 문제가 이슈화되었다. 사람들은 분리배출만 열심히 하면 재활용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허탈함을 토로했다. 재활용시장의 현실과 제대로 된 분리배출에 대한 뉴스들이 쏟아져나왔다. 나 역시 기후 위기를 실감한 이후 쓰레기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내 생활과 밀접해 있고 당장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장, 카페, 빵집, 식당에 재사용 용기를 가져가 포장해오고, 비닐봉지를 거절하고 장바구니를 사용해보고, 작은 플라스틱을 모아서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드는 참새클럽에 참여하고, 빈티지샵이나 당근마켓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노력했다. 한번 사용하고 몇백 년 동안 썩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플라스틱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기업들도 점점 기존 플라스틱 포장재를 생분해 플라스틱이나 종이 등으로 변경하거나 업사이클링 상품을 내놓거나 채식 상품들을 기획하고 재생에너지를 홍보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는 추세인 것 같다. 기후 위기, 친환경, 지속가능한 미래를 너도나도 이야기한다. 표면적으로라도 친환경을 표방하는 움직임은 반가워해야 할 것 같은데, 친환경이라는 명목 아래 펼치는 그린워싱을 보면 짜증스럽다.

나는 요즘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 ‘착한 소비’ 같은 문구에 조금 염증을 느낀다. 매번 텀블러, 반찬 그릇, 장바구니를 챙겨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의 의지에만 매달리고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것은 기후 위기의 책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가정에서 아무리 전기를 아껴봐야 기업들에서는 훨씬 많은 전기를 더 싸게 이용한다. 나는 마트나 인터넷에서 플라스틱 포장이 되어있는 간편식을 자주 구매하고, 일회용 KF94 마스크를 여전히 사용한다.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열정은 간편함에 밀려 얼마 가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나의 소비생활

나는 옷을 좋아한다. 액세서리나 머리, 메이크업은 답답하거나 귀찮아서 잘 신경 쓰지 않는 편이고, 꾸밈에 대한 관심은 모두 옷으로 향해있는 것 같다.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서 새로운 물건을 쉽게 구입하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선진국’에서 버려진 옷들이 소위 ‘개발도상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 쌓여있는 사진을 보면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한동안 코로나로 인해 외출을 삼가고 ‘아르바이트-집-온라인수업’의 생활만 반복하니 화장품이나 옷을 거의 구매하지 않게 되었다. 옷을 사고 싶을 땐 구제 옷 매장에 가거나 당근마켓 같은 플랫폼을 이용했다.

얼마 전, 비건식품 팝업매장에 방문하기 위해 대형 쇼핑몰에 들르게 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쇼핑몰은 시원하고 넓고 쾌적하고 반짝반짝했다. 기왕 간 김에 매장을 구경하는데 여름맞이 70% 세일 문구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옷을 고르고 있었고, 계산대와 피팅룸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나도 매장에 들어가 옷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약간 피곤한 상태였지만 쇼핑을 하다보니 활기가 솟으며 피로감은 희미해졌다. 꽤 괜찮은 옷을 몇 개 구매하고 매장을 나오면서 ‘어차피 내가 사진 않으면 버려질 옷이니 구매하는 게 나은 거 아닌가?’라고 합리화를 했다. 그러면서도 시즌마다 끊임없이 생산될 옷들을 생각하니 아득해지기도 했다. 이 수많은 매장들에서 수십 수백 가지의 옷을 생산하고, 팔리지 않은 옷들은 이월상품으로 판매되고, 그래도 팔리지 않은 옷들은 다른 지역 혹은 다른 나라에 떠넘겨지는 것이 참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중고 물건을 구매할 땐 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더 많이 든다고 느낀다. 사진 출처 : Vlada Karpovich
중고 물건을 구매할 땐 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더 많이 든다고 느낀다.
사진 출처 : Vlada Karpovich

중고 물건을 구매할 땐 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더 많이 든다고 느낀다. 발품도 많이 팔아야 하고 물건이 하나밖에 없으니 상태도 잘 확인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선택지가 넓지 못하다. 나에게 딱 맞는 물품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 괜찮은 수준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러다 가끔은 운이 좋게 원하던 물건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에게 가장 좋은 물건, 나와 딱 맞는 물건을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맞는 것을 찾기 위해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나에게 맞는 물건은 내 삶을 좀 더 낫게 만들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생템’이라는 용어를 광고나 후기에서 많이 보게 된다. 앞에 ‘인생’이 붙은 그 용어가 ‘나에게 딱 맞는 완벽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존재해야 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어떤 사람에겐 ‘인생ㅇㅇ’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까지 인생템을 찾아 헤매게 될까. 내가 스스로 만들지 않는 이상 나에게 딱 맞는 인생템이 과연 있을지 의문도 든다. 새것이 아닌 물건들을 구매하거나, 물려받거나,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계속 사용하면서 더 좋은 것, 가장 최선인 것을 찾기보다 적당히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자가 조금 있어도, 내가 원하는 모양과 조금 달라도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계속 사용하기. 나도 새 물건, 나에게 찰떡인 물건, 유행하는 물건, 비싸고 기능이 좋고 예쁜 물건을 사고 싶다. 그런데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걸 모두 가질만한 분수가 되지도 않는다. 지금 상태에서 만족하고자 하는 건 가지지 못하는 자의 자기합리화일까? 적어도 지구와 내 지갑 사정에는 덜 해로울 거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말로 소비하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기보단, 그저 잠시 유예해둔 것 같다. 당신에겐 부족한 것이 있고 이 물건이 필요하다고 열심히 외치는 광고들을 매일 본다. 할인행사는 분기마다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미 소비주의, 성장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모르겠다. 얼마나 내 속도로 나아갈 수 있을지. 이 빠르고 거대한 물결에서 비켜 나와 유유히 살아갈 수 있을까? 개개인의 의지와 소소한 실천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개인의 행동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실천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렵지만 계속해서 비건을 지향하고 샴푸바와 대나무 칫솔을 사용하려 노력할 것이다. 소비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볼 것이다. 실천의 실패와 성공 여부를 가리며 너무 일희일비하지도 않을 거다. 이러한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가 모이고, 밑거름이 되어 제도의 변화까지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냥그냥

신나는 날도, 울적한 날도. 그것은 그것대로 두고 그냥그냥 살아가고 싶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