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재조직화와 재생산노동, 『혁명의 영점』을 읽고

여전히 자본축적의 자양분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의’ 재생산노동은 현대 생산의 새로운 특질이라고 일컬어지는 정동노동의 부상과 새로운 형태의 노동가치 이행 속에서도, 모티브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타자화된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모든 노동의 재구조화는 재생산 노동의 재구조화라는 큰 축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여성주의의 변천사

『캘리번과 마녀』로 더 잘 알려진 이 책의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혁명의 영점』은 여성투쟁의 본질에 대한 페데리치의 40년간의 연구와 이론 작업을 집대성한 저서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에 의해 조직된 소외된 노동, 즉 재생산 노동에 내재된 모순 이면에 일상적인 현실을 변화시키는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 영점(zero point)이 있음을 그의 이론적, 실천적 사례를 통해 기술하고 있다.

가사노동의 이론화와 정치화

실비아 페데리치 저 『혁명의 영점』(갈무리, 2013)
실비아 페데리치 저 『혁명의 영점』(갈무리, 2013)

임금노동이 자유로운 계약관계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윤으로 전환된 부불노동을 감추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본은 가사노동의 젠더화를 가부장제와 자연스럽게 결탁시켰다. 1970년대에 촉발된 ‘가사노동의 임금화 운동’은 가사노동이 여성 본성의 표현이라는 인식을 거부하고, 자본이 여성에게 할당한 역할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혁명적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여성 노동의 시작과 끝, 그리고 제도화된 모델을 거부하는 욕망의 시작과 끝을 찾는 움직임이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여성의 몸이 상품화되면서 자신의 몸을 전유하지 못함을 자각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재단된 여성의 몸은 가사노동이라는 재단된 노동으로 일괄 편재되었고, 사적 영역으로 분리된 노동의 가치는 사회적 인정에서 배제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가 증가했지만 결과는 임금 차별의 고착화와 노동시장에서 특정 영역을 젠더화시키는 선긋기였다. 더군다나 여성의 사회 참여 증가와 상관관계를 일으키지 못한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은 결혼과 출산의 포기라는 선택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여성 스스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절감 행위였다. 1970년대 후반에 서구에서 발생한 이러한 사회현상은 시간차를 두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임금으로 환산될 수 없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논쟁을 차치하더라도,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zero point로서의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문제는 무엇보다도 부불재생산노동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시작하고, 양육과 돌봄이 사회적 책임임을 밝히는 문제로서 의의가 크다. 양육과 돌봄이 여성들의 책임인 한 평등에 대한 그 어떤 개념도 환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운동인 것이다.

세계화와 사회적 재생산

여성주의적 공유재 운동은 자본주의로 인한 재생산의 완전한 사유화가 이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지경에 이른 지금, 생명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절하와 파편화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by Lindsey LaMont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hUWINRMPvsc
여성주의적 공유재 운동은 자본주의로 인한 재생산의 완전한 사유화가 이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지경에 이른 지금, 생명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절하와 파편화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사진 출처 : Lindsey LaMont

세계자본주의는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키면서 빈곤, 질병, 전쟁을 양산하고 집단 간 분열을 조장하며 확대되었다.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위치에 있는 여성은 빈곤, 질병, 전쟁에서 더 많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의 존립 기반인 집단 간 분열의 최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식량 원조’, ‘인도주의’ 등과 같은 외피를 입은 다국적 자본은 꾸준한 전쟁상태 유지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세계경제를 잠식했다. 이로 인해 소농과 같은 지역경제는 붕괴했고, 극심한 빈곤 속에서 벌어진 생존투쟁을 위한 분쟁은 사회연대의 조건을 무너뜨렸다.

세계 주요 자급 농민인 여성들이 토지에서 더 많이 이탈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일거리를 찾아 북반구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는 세계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한 노동 비용 삭감 효과로 이어졌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상업화와 세계화를 통해 다양한 주체들에게 재분배된 것이다. 이렇듯 재생산노동의 조직화, 영토화는 더 저렴한 노동력으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려는 노동 시장의 구조화와 긴밀히 관계하고 있으며, 재생산 노동의 기술화도 그에 내재한 착취를 제거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이 흘러가고 있다.

재생산노동의 조직화를 기반으로 한 자본의 세계화과정을 통해 볼 때, 재생산 노동에 대한 가치 절하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한 임금노동을 위한 투쟁은 반쪽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식품 생산의 시장화가 우리의 건강악화에 기여한 것처럼, 재생산 노동을 상업화하는 식의 방법은 여성 내 새로운 불평등을 양산할 뿐 전혀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드러났다.

공유재의 재생산

임금 노동시장에서 생산성을 잃은 노인들은 돌봄노동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전환되어 재생산노동의 영역으로 다시 진입하게 된다. 자본은 생산성 효율이 떨어진 이들 집단에 대해 고령화사회가 되면 젊은 세대들이 노인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리라고 부단하게 경고하면서 세대간의 갈등을 주도해 왔다. ‘생산’이라는 기호로 대표되는 자본은 그 자체가 영속성과 불멸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병듦과 나이듦과 죽음 같은 ‘비생산적인’ 것은 가정의 영역에 가두어 은폐해야 했다. 돌봄노동자, 노인이 있는 가족, 무엇보다 노인 자신들이 얽혀 있는 노인돌봄 문제는 재생산 노동의 주 행위자인 여성의 노동을 가중시키면서도 재생산 노동이 결코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노동 형태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본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는 ‘생산적 인간’에 한정되지 않고, 탄생과 질병과 죽음 전체를 아우르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의미를 다시 탈환하여 재정의하려는 ‘돌봄노동의 공유재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공유재는 인간의 재생산 활동이 지구상에서 가장 노동집약적이고, 전체적으로 기계화 환원 불가능한 노동인 것과 관련이 깊다. 공유된 책임과 협력적인 노동만이 적절한 돌봄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과거 수 세기 동안 돌봄 노동은 공유된 책임과 협력적 노동이었음이 이를 증명해 준다. 따라서, 여성주의적 공유재 운동은 자본주의로 인한 재생산의 완전한 사유화가 이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지경에 이른 지금, 생명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절하와 파편화를 종식시키고자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정동노동과 재생산노동

페데리치는 이 책을 1990년대 중반, 세계경제의 재구조화를 통해 나타난 새로운 노동형태인 감정노동에 관한 글로 마무리한다. 네그리와 하트의 ‘비물질노동의 자율성’에 대한 낙관을 비판하면서 비물질노동의 주체인 ‘다중’이 주로 대도시 남성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감정노동의 젠더화에 관한 부분에서도 감정노동이 때로 ‘여성의 노동’으로 규정되긴 하지만, 젠더특정적인 노동형태가 아니라 노동의 상호작용이라는 특성을, 의사소통의 흐름을 촉진하는 능력을 지칭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노동의 여성화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남성들이 하는 노동의 ‘여성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여성노동이 감정노동이라는 입장과 관점의 차이가 있다. 즉, 노동의 모든 형태에 감정 노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주장은 여성재생산노동과 이 영역에서 여성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의 특수성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다시 비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남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물질노동이라는 신자유주의 노동형태의 변화는 임금노동과 노동시간이라는 가치 척도와 그에 의한 노동가치법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흐름을 읽어내며 새로운 주체성 형성의 동력을 찾는다. 이에 마이클 하트는 여성노동으로부터 삶정치적이고 해방적인 힘을 읽어내면서 정동적 노동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탈근대화 시대의 계급 개념이자 새로운 조직화의 기획 주체로 설정된 다중은 과연 누구인가. 상품화 네트워크를 상품형태를 벗어난 ‘정동들과 지성들의 네트워크(관계)’로, ‘협력의 자율적이고 확장적인 운동’ 그 자체로 전환시킬 주체인 다중은 페데리치가 지적했듯이 오랜 시간동안 정동적 재생산노동의 주체로서 감정노동이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기능을 가진 재생산노동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해 온 서발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여전히 자본축적의 자양분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의’ 재생산노동은 현대 생산의 새로운 특질이라고 일컬어지는 정동노동의 부상과 새로운 형태의 노동가치 이행 속에서도, 모티브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타자화된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은 감정노동과 같이 노동의 젠더화를 가늠하는 지침이 아니다. 또한 많은 잠재력을 지녔음에도 그동안 노동가치의 논의에서 늘 제외되었던 노동형태의 예시도 아니다. 여기서의 부정은 포함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이제까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모든 노동의 재구조화는 재생산노동의 재구조화라는 큰 축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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