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세기 대서양 자본주의가 오늘에 보내는 소식 : 『히드라』 독후기

17~19세기 대서양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었던 대륙들, 즉 영국과 아일랜드를 포함한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는 혁명, 식민지 쟁탈, 노예매매, 플랜테이션 등으로 표상되는 변화와 교류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대서양 자본주의라고 집약하여 말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히드라』는 2000년에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펴낸 피터 라인보우가 2008년에 마커스 래디커와 함께 펴낸 책이다. 원제는 THE MANY HEADED HYDRA 이니까, ‘여러 머리 히드라’ 정도로 번역될 것이다. 번역본에는 ‘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은 1600년부터 1835년까지, 대서양을 둘러싼 여러 지역 특히 영국, 서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카리브해,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헤라클레스’와 ‘히드라’ 사이의 갈등을 상세히 예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헤라클레스를 ‘지금’과 같은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찼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히드라는 ‘지금’과 같은 세계에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삐죽삐죽 벗어나려고 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본 부제목 속의 다중(多衆 multitude)이 이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인 듯하다.

피터 라인보우 · 마커스 래디커(저), 정남영 · 손지태(역), 『히드라』(갈무리, 2008)
피터 라인보우 · 마커스 래디커(저), 정남영 · 손지태(역), 『히드라』(갈무리, 2008)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를테면 ‘대서양사 : 1600~1835’를 통하여 지금의 세계가 빚어진 내력을 남 이야기처럼 관조하는 것이다. 관조는 나를 되돌아보는 데로 귀결될 수도 있는데, 그렇듯 자기를 되돌아보는 사람은 지금의 세계에 대해서 이전과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돌연 자기가 헤라클레스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자기가 히드라임을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아니면서도 헤라클레스라는 확신을 더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는 사람, 헤라클레스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사람, 자기가 헤라클레스이면서도 헤라클레스가 나쁘다고 하는 사람, 자기가 히드라여서 좋다는 사람, 분명 히드라인데 자기는 헤라클레스라고 전혀 의심 없이 믿는 사람, 히드라이므로 이번 생은 망했다고 단정하는 사람 등등 이 책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을 계기로 자기를 되돌아 본 결과 도달하게 되는 자기인식은 다양할 것이다. 영락없는 헤라클레스인데 그런 자기가 너무 싫다면서 부득부득 히드라가 되겠다는 사람도 있기는 할 것이다.

헤라클레스 VS. 히드라

“대서양 경제의 건설자들은 고전적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헤라클레스-열두 개의 노역을 수행함으로써 불멸성을 획득한 고대의 신화적 영웅-에게서 힘과 질서의 상징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영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게 눈을 돌렸는데, 헤라클레스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영토 위에 건립된 중앙화된 국가의 통합자였으며 로마인들에게는 원대한 제국적 야망을 뜻하였다. 헤라클레스의 노역은 경제적 발전을 상징하였다. …… 지배자들은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화폐와 옥새, 그림, 조각, 궁전들 그리고 개선문들에 재현하였다. …… 존 애덤스도 “헤라클레스의 심판”이 새로운 국가인 미국의 국새(國璽)가 되어야 한다고 1776년에 제안하였다. 헤라클레스는 진보를 나타냈다. …… 바로 이 지배자들은 여러 머리 히드라에게서 헤라클레스와 반대되는 무질서와 저항의 상징 즉 국가, 제국 및 자본주의의 건설에 가해지는 강력한 위협을 발견하였다.”

11쪽

1600년대 이전부터 유럽과 아메리카의 지배집단 사람들에게 헤라클레스는 경제발전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경제발전 특히 1600~1835년 시기 유럽과 아메리카의 경제발전은 그 이전의 경제발전에 비교할 때 속도도 빠르고 그 발전에 따르는 저항도 컸기에, 그 발전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하기를 거부하거나, 발전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등 발전의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발전을 원하며 그것을 주도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은 발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향들을 무질서와 저항으로 규정하면서 여러 머리 히드라에 비유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헤라클레스에 비유한 것은 설득력이 좀 떨어져 보였지만 발전의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여러 머리 히드라에 비유한 것은 설득력 있는 언어 사용이었던 듯하다.

이 비유는 아마도 여러 머리 히드라로 비유되는 사람들에게도 점차 사랑받는 이름이 되어갔을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절대로 완전히 절멸시킬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자부하였을듯한데 마침 지배집단 내의 식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멸칭으로 지어준 히드라라는 전설의 생물이 머리를 베어내도 다시 새 머리가 자라나는 극한의 생명력을 자랑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1600년 이후 자본주의는 그에 저항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자들에게 승리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애초에 멸칭이랍시고 히드라라는 이름을 발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붙여줌으로써 그들의 생명력을 널리 알려버리고 만 오류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원하는 집단의 사소한 오류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질서가 많은 사람들에게 원천적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저항을 유발하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1600~1835, 대서양 자본주의

노예무역은 아프리카가 대서양을 둘러싼 자본주의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상품이 된 것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aptives-being-brought-on-board-a-slave-ship-on-the-west-coast-of-africa—slave-coast--c1880-802464822-59fb46fc0d327a003632d7d3.jpg)
노예무역은 아프리카가 대서양을 둘러싼 자본주의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상품이 된 것이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책은 1600~1835년의 대서양을 둘러싼 역사 전개를 다시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1) 1600~1640년 : 우연인지 필연인지 1600년에 영국이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는 것과 함께 시작된 시기다.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시작되어 무역과 식민화를 통해 대서양 지역에 퍼진” [508쪽] 시기다. 서부 아프리카나 서인도제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영국, 버지니아 사람들이 “장작 패는 자들과 물 긷는 자들” [63쪽] 이 되었다. 장작 패는 자들과 물 긷는 자들이란 노예를 말한다. 장작과 물이 없었다면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사람들의 일상 뿐만 아니라 대서양 항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가 가장 먼저 노예가 되었을까? 서인도제도 사람들? 일단 서인도제도에 가야 서인도제도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수 있었을 테니 거기로 가는 배에 필요한 장작과 물을 마련하는 노동력은 영국에서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요컨대 1600년대 영국에 노예 혹은 노예에 아주 가까운 노동자나 농민이 있었다면 그는 영국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영국인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서인도제도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전에 영국인들을 노예나 노예적 노동자 농민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시사한다.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에서는 영국인이 영국인을 노예적 노동자 농민으로 만드는 일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아일랜드인들을 노예적 노동자 농민으로 만드는 일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서인도제도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노예적 노동자 농민으로 만들 틈도 없이 전염병으로 멸종되다시피 하자 거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영국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사들여 충당하면서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과는 달리 영국인들에게 사람을 노예 삼는 일은 쑥스러운 일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그들은 급한 대로 같은 영국인을 노예적 상태에 묶어두는 일을 서슴지 않았음을 이 책은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노예적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이 책은 씨벤처호 파선의 전말을 예로 이 대응을 설명한다. 영국에서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로 향하던 배가 어쩌다 서인도제도의 버뮤다에서 파선되었다. 타고 있던 사람들이 버뮤다에 상륙하였고,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냈다. 우여곡절 끝에 원래의 목적지인 버지니아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선원 일부가 버지니아로 가기를 거부하였고 한다.

“씨벤처호의 파선과 그 배에 탔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반란의 드라마들은 초기 대서양 역사의 주된 주제들을 시사한다. 비록 선원들과 종교적 급진주의자들 모두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 사건들은 해상에서의 영국인의 위대함과 영광의 이야기에 기여하지도 않고 종교의 자유를 위한 영웅적 투쟁의 이야기에 기여하지도 않는다. 이는 오히려 자본주의와 식민화의 기원들에 관한 이야기, 제국의 건설과 세계무역에 관한 이야기이다.”

30쪽

이 책은 씨벤처호 선원들이 꽤 긴 기간 동안 버뮤다에서 만들었던 공동체에서의 생활이 영국에서 겪었던 생활이나 예상되는 버지니아 식민지에서의 생활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고 보았다. 영국에서 그들은 내부식민지 그 자체였고,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그들은 노예적 노동자 농민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 비하여 버뮤다에서 그들은 주도적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서 생활했으므로 만족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버뮤다에서 선원들이 만들었던 공동체가 정교하거나 견실하지는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예상태의 연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선원들이 노예상태를 원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1600년의 영국 자본주의는 일부 영국인을 노예 내지는 노예적 노동자 농민으로 만들어서 그들이 ‘장작과 물’의 조달을 떠맡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체제였다고 이 책은 시사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노예적 노동 없이는 시작부터 곤란한 체제였던 것이다.

(2) 1640~1680년 : 이 책은 이 시기에 영국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발생하였으나 그 저항은 탄압받아 소멸되고, 식민지 플랜테이션의 구축과 그를 밑받침하는 노예의 매매가 관행화되었다고 보았다.

“크롬웰과 유산자층인 그의 동맹 세력들은 혁명을 함에 있어서 머리가 여럿인 히드라의 급진적인 목소리들-수평파와 디거파, 병사들과 선원들, 도시의 봉기자들과 농촌의 평민들-에 의존해야 했다. …… 급진 세력의 사상들은 결국 크롬웰과 그 일파에 의하여 억눌러졌다. 그러나 이 사상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그리고 나중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118~119쪽

이 책은 크롬웰이 혁명을 위하여 허용했던 급진적인 목소리들을 혁명이 어느 정도 성공한 후에는 억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억압을 당하였음에도 이 목소리들이 나중에는 영향력을 가지고 살아남았다고 덧붙였다. 재세례파의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는 성경 해석과 반율법주의는 영향력의 중요한 일부로써 이 책에서 거듭 언급되었다.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것,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것 등은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병사들과 선원들, 도시의 봉기자들과 농촌의 평민들”은 혁명의 동력의 일부로 ‘동원’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영국 노예 집단형성 초기의 노예 내지 노예적 노동자 농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동원되기도 하고, 억압되기도 하였지만, 아마도 무엇보다도 점차 숫자가 부족해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식민지에서는 넓은 경작지에서 환금성이 뛰어난 특용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아프리카가 대서양을 둘러싼 자본주의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상품이 된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때마침 푸트니 논쟁을 통하여 기독교도 아프리카 사람은 노예로 만드는 것을 용인하였다.

이렇듯 아프리카 사람들이 노예라는 상품으로 매매되는 상황 속에서 “프랜시스라는 이름의 검둥이 하녀”[117쪽]처럼 변화를 이끄는 종교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한 아프리카 여성이 활동하였다고 한다.

(3) 1680~1760년 : 이 책은 이 시기에 해양국가를 통하여 대서양 자본주의가 안정화되었다고 본다. “이 시기 세계화의 특징적 기계인 항해 선박은 공장의 특징과 감옥의 특징을 결합시켰다. 이에 대한 대항으로 해적들은 자율적이고 민주적이며 다인종적인 사회질서를 바다에 건설하였으나 이 대안적 삶의 방식은 노예무역을 위험에 빠뜨려 근절되게 된다.” [508~509쪽] 자본주의 국가 영국은 해양국가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해양국가의 근간이 되어주는 배는 공장과 감옥의 공통된 특징 즉 감시와 통제에 의하여 자본주의에 복무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영국 자본주의가 시작될 때부터 배의 선원 혹은 해적들은 구체제를 무력화시키는 데 동원되었으면서도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된 후에는 억압을 받은 집단이며 선원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영국 자본주의로부터 격리되는 동시에 식민지 유지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라는 다면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17세기 후반의 두 가지 연관된 사태전개―위로부터의 해양국가의 조직화와 아래로부터의 선원들의 자기조직화―를 지칭하기 위해서 브레스웨잇의 히드라국hydrarchy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브레스웨잇이 말한 선원들의 굳건한 손으로 대서양 지역이 자본의 축적을 위한 지대가 되자 선원들은 다른 이들과 의리와 유대감으로 합치기 시작하여 해양의 급진적 전통을 산출하였고 이것이 또한 자유의 지대를 만들었다. 따라서 배는 영국 부르주아 혁명의 여파로 자본주의의 엔진이 된 동시에 저항의 배경이 되었다. 즉 크롬웰에 의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찰스 왕에 의해 패배당하고 억압당한 혁명가들의 사상과 실천이 옮겨가서 재형성되고 유통되고 존속했던 장소가 되었다.”

232~233쪽

‘히드라국’으로 지칭되는 선원 혹은 해적들은 민주적인 해양국가를 세웠다고 이 책은 평가하고 있으나, 또한 이 책에 의하면 노예무역을 위험에 빠뜨리는 면은 통제되었다고 한다. 통제는 잔인한 살해를 포함한 가혹한 처벌이었다.

(4) 1760~1835년 : 이 책은 이 시기를 잡색 부대(Motley Crew)가 대서양 지역에서 혁명의 시대를 연 시기라고 하였다. Motley Crew는 ‘잡색 부대’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오합지졸’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들은 다양한 개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잡색 부대라 할 수도 있고, 그런 특성 때문에 군대치고는 약체일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오합지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집단이 무력이 아닌 요소로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 수도 있고, 역사에 인상적인 흔적을 남김으로써 어떤 가치를 후대에 전달하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미국 독립 혁명에서 잡색 부대는 나름의 역할을 하였지만, 앞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하나인 존 애덤스가 헤라클레스를 중시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건국 후에는 경제발전과 정치안정을 목표로 하면서, 영국에서 혁명 후 크롬웰이 그리하였듯, 여러 가지 변수들을 정리하려 하였을 것이다. 식민지 지배체제를 작게나마 뒤흔들었던 잡색 부대는 정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잡색 부대는 독립 혁명 후 미국에게 배신당하였지만, 이 책에 의하면, 혁명의 동력으로, 1790년대에 아이티, 프랑스, 아일랜드, 영국에서 가지를 뻗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에 대한 항의와 반작용은 영국의 도시에서 영국인에 의해서도 조직되었고, 당대에 심한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었던 아일랜드에서도 즉각적으로 조직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1640~1680년에 재세례파가 제기한 문제의식인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는 성경 해석과 반율법주의를 계승 발전시켰다. 그럼에도 이 시기 영국의 도시에서 영국인들이 주동하여 벌인 운동들에 대한 통제는, 교수형에 처하여진 에드워드 데스파드 대령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가혹하였다. 영국 도시 소요에 대한 통제는 영국 사람, 아일랜드 사람, 아프리카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이 책의 9장은 서인도제도에서 희년을 실현하고자 했던 로벗 웨더번과 그의 이복형제인 자메이카의 마룬 엘리자벳 캠블에게 할애되어있다. 자메이카에서 노예 소유주와 노예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로벗 웨더번은 군대 생활을 거쳐 매매춘 중개를 하는 등 신뢰와 존경을 받기 어려운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고, 1838년 영국령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노예제의 종식으로 이어진데다가, 영국 본토를 중심으로 대서양을 둘러싼 많은 곳의 소요에 영향을 주었다.

“해방의 계획인 희년은 구약에서는 토지재분배의 법적 의식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이사야의 예언의 실현으로 나타난다 이 개념은 6개의 요소들을 포함했다. 첫째, 희년은 50년마다 왔다. 둘째, 토지를 원래의 소유주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셋째,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넷째, 노예와 종들을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다섯째, 농사를 짓지 않는 해였다. 여섯째, 노동을 하지 않는 해였다.”

449~450쪽

지금도 그렇지만 희년을 구약과 신약에 적혀있는 바와 똑같이 행하여 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희년은 불평등과 부당한 억압이 완화되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희년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신뢰와 존경을 받기 어려운 경력을 가진 아프리카계 영국인에 의해 제기되고 대서양을 둘러싼 영국과 서인도제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으며, 영국령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노예제의 종식이라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 ◇ ◇

* 노예주 아버지와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존경받기 어려운 불량스러운 일상을 살았으나 영국령 카리브해 일부 지역의 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주고 대서양 주변의 전 지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로벗 웨더번과 관련하여 이 책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웨더번은 무언가 더 크고 이동적이며 강력한 것의 필수적 부분이었다. 그는 시간의 차원에서는 고대 근동의 공산주의적 기독교도를 영국의 수평파와 연결시켰으며 자메이카의 원주민 침례교도와 연결시켰다. 공간의 차원에서는 노예와 마룬을 선원 및 부두노동자들과 연결시켰으며 평민, 장인 및 공장노동자들과 연결시켰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을 페인주의자들과 연결시켰다. 노예를 노동계급 및 대도시의 중산층 중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연결시켰다.”

502쪽

“웨더번은, 영국 혁명에서 기원해서 서쪽으로 식민농장과 아메리카 흑인들에게로 퍼졌으며 마지막으로 1780년대와 1790년대에 런던으로 되돌아온 해방신학을 이어받아 계속시켰다.”

449쪽

웨더번이 벌인 일이,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편적이며 전 지구적인 사회운동으로 번져나갔다고 평가한 것이다.

웨더번의 경우는 가장 강한 압박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민감하게 그것에 대응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재확인 시켜준 것 같다. 책에서는 미처 상세하게 다루지 못한듯하나 많은 백인 운동가들 역시 개인사에서 다양한 모습의 억압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낀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미미하다 생각하는 대신 최대한 활용하여 상황을 개선하려고 시도하는 데에서 자기들의 운동을 시작한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이 넉넉한 관용 속에서 그러한 운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1835년에 근접한 시기에도 사회운동들에 대한 억압과 처벌은 가혹하고 잔인한 것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영국 사람들 상호간에도 사람을 대상화하고 신체를 훼손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음을 이 책은 풍부하게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을 뚫고 진보를 이루어낼 수 있는 잠재력 또한 충분하다는 것 또한 풍부한 예를 들어 보여주었다.

* 영국인들이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 초기에 같은 영국인들을 노예적 노동자로 삼았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었다. 나는 이와 같은 상황을 내부 식민지라는 용어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600년 전후의 영국은 영국인 노예라는 내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1834년 영국 의회의 빈민구제법 개정안 통과와 1835년 영국 의회의 도시단체 개혁법안 통과에 주목하였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을 보면 20세기에도 영국에는 거지같은 사람들이 많았고, 국가는 그들이 머물다 갈 수 있는 시설을 운영하였다. 1600년에는 어땠을까? 1834년의 빈민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835년에 문제된 도시단체는 어떤 단체였을까? 1600년대처럼 사람들을 식민지에 노예적 노동자로 끌고 갈 필요가 없어지고, 공장들의 생산성이 향상되어 노동자 수가 감소하였다면 1830년대에 영국에는 이도저도 아닌 거지같은 사람이 더 많아졌고 그들이 도시단체를 중심으로 집단화할 기미를 보인 걸까? 1835년이라는 시점이 빅토리아 시대[1837~1901]가 시작하기 직전이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존 애덤스의 행적은 여태까지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아주 구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대의의 편에 섰으되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은 억울한 죽음이나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나는 제대로 인식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 1800년대에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그때 아일랜드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영국이 대단히 가혹하게 탄압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하여 엿볼 수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아직도 영국을 향하여 테러를 가하고 있는 상황을 좀 더 실감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 글 앞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서양사 : 1600~1835’를 통하여 지금의 세계가 빚어진 내력을 남 이야기처럼 관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관조는 나를 되돌아보는 데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하였었다.

어쩌다보니 나는, 식민지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세계 랭킹 10위를 넘나드는 교역대국에 살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내가 만든 것은 하나도 없는 삶을 나는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누군가의 어마어마한 돈벌이의 거미줄에 딱 걸려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전적으로 헤라클레스일리 만무하지만, 내 삶이 어느 정도 헤라클레스적인 기획에 기대고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동시에 나는 내가 곧 잘려나갈 히드라의 여러 머리 가운데 하나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나는 내가 곧 잘려나갈 히드라의 여러 머리 가운데 하나라서 ‘이생망’ 즉 이번 생은 망했다고 말할 뻔하였는데 그건 너무 미성숙해 보여서 얼른 거둬들였다.

나는,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각각 한 명의 헤라클레스나 곧 잘려나갈 히드라의 여러 머리 가운데 하나라기보다는 여러 머리를 가진 히드라 하나같다. 사람의 표정과 생각은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여러 얼굴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담대한 얼굴을 보여주는 날도 있을 것이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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