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니츠의 『변신론』에 등장하는 가능세계의 피라미드 주변에서

이 글은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에서 묘사되는 가능세계가 끝없이 펼쳐지는 가상의 공간 주변에서, 현실성과 잠재성, 필연성과 가능성, 자유의지와 결정론, 운명과 구원의 문제를 나름의 설정 속에서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보려 했던 독창적인 사유의 궤적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선택의 순간, 우리는 선택에서 비롯될 미래의 모습들을 그려본다. 그리고 결과가 다가오면 과거의 선택에 대한 대안을 떠올려보며 또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을지 모를 현재를 상상해본다. 또 다른 현재는, 실재하는 현재와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울수록 더욱 가까이에 있는 듯 느껴질 수 있지만, 거울이 없는 곳에서 자신의 얼굴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처럼, 상상이 지워진 현실에서는 좀처럼 만나볼 기회도, 자리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마주할 수 없음에도 삶의 주변을 언제나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이러한 가정의 세계들, 또 다른 과거들과 현재들, 가상의 미래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실은 후회도 희망도 없이, 마치 연달아 넘어지기를 멈추지 않는 도미노처럼, 밋밋하고 허무하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뉴튼이 자연과학에서 이룬 위대한 성취로 대표되는 17세기 기계론적 자연관 속에서, 수많은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그 못지않게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남겼던 라이프니츠는 자기만의 독특한 사유의 길을 통해, 법칙에 따르는 물리적 세계의 필연성에서 벗어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고자 했다. 후기작인 『변신론』에서 그는 신은 전지전능하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하며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르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이 과정에서 인간의 또 다른 선택에 따라 무한히 펼쳐질 가능세계들을 담은 신화적 건축물을 묘사한다.

이 글은 이 가상의 공간 근방을 기웃대며 현실성과 잠재성, 필연성과 가능성, 자유의지와 결정론, 운명과 구원의 문제를 나름의 설정 속에서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보려 했던 라이프니츠의 독창적인 사유의 궤적을 조금이나마 되짚어보려 한다. 덧붙여 이 과정에서 새롭게 짜이는 과거, 현재, 미래의 새로운 시간적 틀을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주석가이기도 한, 철학자 들뢰즈의 해석을 참고하며, 한 인간의 정체성보다도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적 계열들의 형식에 대해 가늠해볼 기회를 만나보고자 한다.

가능세계가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이 소개되기 전, 『변신론』에서는 신의 전능함과 자유의지, 그리고 이에 따른 처벌에 관한 문제가 논의된다. 만일 신이 유다의 반역을 예견했다면, 그가 배반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배반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행위, 필연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죄과를 부여해야 할까?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처벌받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의견에 반하여 신은 죄를 예견했을 뿐, 죄를 짓도록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힌다. 죄는 당사자의 자발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나 현재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미래에 대한 선지식을 갖는 것도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하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과거나 현재의 일이 이미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필연성을 갖게 되는 것이라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일은 신의 선지식을 통해 비로소 고정되고 필연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신의 예언은 곧 인간에게 명령이 아닐까? 덧붙여 신의 예견과 예언은 미래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이러한 질문들은 가능한 것과 필연적인 것을 구분하려는 논의로 발전해나간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면 이들은 모두 가능하다. 단지 이들은 하나의 세계에 함께 가능하지 않고 하나의 세계에는 둘 중의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 결국 예언의 신인 아폴로를 거쳐 섭리를 주관하는 주피터에게 논의가 이어진다.

그 안에 들어가면 더 이상 홀이 아닌, 하나의 세계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는 현실과는 또 다른 삶의 여정이 펼쳐진다. by Pixabay 출처: https://www.pexels.com/ko-kr/photo/316080/
그 안에 들어가면 더 이상 홀이 아닌, 하나의 세계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는 현실과는 또 다른 삶의 여정이 펼쳐진다.
사진 출처 : Pixabay

주피터는 악한 의지에 대해 불행의 결과가 답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이 악한 의지의 자리에 선한 의지를 불어넣었다면 어떠할까? 죄를 방관하고 있는 신에게는 이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일까? 모든 문제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주피터는 자신의 딸인 팔라스가 머무는, 가능세계들이 펼쳐지는 궁전으로 안내한다. 팔라스는 주피터가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미리 가능세계들을 만들어 놓았고, 이 중 최선의 세계를 현실에 존재하게 한다고 말한다. 조건이 충분히 결정되지 않았을 때라면, 하나의 같은 질문에 서로 다른 대답들이 가능하듯, 누군가의 소망에 따라 다양한 세계들이 가능하게 된다. 이 세계들은 각각 질서 잡힌 계열을 형성하는데 이들 각각은 질문에 답하는 하나의 사례라고 볼 수 있으며 이들 계열들은 상황과 결말에 있어 서로 구분된다. 만일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현실의 상황에서 하나의 특정한 조건을 달리해서 물음을 던져본다면 이에 대해 특정한 하나의 결정된 세계만이 대답할 것이다. 이들 모든 가능세계들은 생각 속에, 관념들 속에 있다. 그곳에서 당신은, 진정한 당신만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서로 조금씩 다른, 당신을 닮은 다양한 당신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이제껏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당신을, 또는 미래에 마주할 수 있을 당신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하고 고상한 당신을 마주할 수 있고, 극도로 불행하고 비참한 당신을 마주할 수 있으며 모든 종류의 끝없이 다양한 형상의 당신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여신 팔라스는 궁전의 어떤 홀로 주피터를 안내한다. 그 안에 들어가면 더 이상 홀이 아닌, 하나의 세계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는 현실과는 또 다른 삶의 여정이 펼쳐진다. 현실 속에서 과도한 욕심과 악한 의지로 사람들의 저주 속에서 불행하게 파멸을 맞이할 어떤 인물은, 욕심과 나쁜 의도를 접고 마음의 평정 속에서 선한 선택을 하였기에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 홀에는 그 세계의 역사가 기록된 거대한 책이 있다. 그것은 운명의 책이다. 그곳에는 어떤 인물의, 현실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삶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문장에 손을 대면 그 문장이 지시하는, 세부적인 사항들을 포함하는 모든 장면이 실제로 재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홀을 방문하자 그곳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들 홀들은 하나의 피라미드 구조 속에 자리한다. 피라미드는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더 아름다운 세계를 담고 있다. 피라미드에는 시작만 있고 끝은 없다. 정상은 하나만 있지만 하부는 끝없이 증대되며 펼쳐진다. 이는 셀 수 없이 무한한 가능세계 중에 하나의 최선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신은 이 최선의 세계가 없었다면 어떠한 세계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부의 세계들은 단지 최선이 아닐 뿐이지, 보다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이들 중 정상의 홀에 입장하면 진정한 실재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곳은 가장 아름답고 경이롭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현실과 다를 바 없이 사악한 행위가 벌어지고 있고 또 이로 인해 불행을 겪는 인물들이 있다. 여신 팔라스는 아버지 주피터를 대신해서 말한다. 주피터가 어떤 특정 인물에게 사악함을 불어넣는 것은 아니다. 주피터는 단지 누구에게나 존재를 부여하고 그가 속할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시 말해 가능세계의 영역을 넘어 현실적인 존재들에 도달할 수 있는 지혜를 부여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또 영원히 자유롭다. 그리고 어떤 이의 사악한 행위와 뒤이은 불행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인과를 낳아 인류 전체에게 있어 유익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신화적 배경 속에서 이 단락의 논의는 모종의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만일 신이 전적으로 선하고 현명하며 전능하다면 어떻게 악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신학적인 차원에서 악의 현존에 맞서, 신의 선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긍정하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개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정당화하여 사회 정의를 확보하려는 시도를, 단지 메시지만으로 진부하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관점과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만 같다.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를 매우 창의적으로 해석해나가며 동시에 자신의 철학을 구축해나가는 들뢰즈는, 여러 가능세계가 가진 동시성에 주목한다. 질 들뢰즈 저, 『시네마II : 시간-이미지』(시각과언어, 2005)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를 매우 창의적으로 해석해나가며 동시에 자신의 철학을 구축해나가는 들뢰즈는, 여러 가능세계가 가진 동시성에 주목한다. 질 들뢰즈 저, 『시네마II : 시간-이미지』(시각과언어, 2005)

흥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가능세계들에 대한 묘사 너머로, 무엇보다 여러 가능세계에 동시에 거주하는 어떤 인물을, 혹은 어떤 인물을 닮은 다양한 인물들을 하나의 동일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진다. 흔히 일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나이를 먹고 변해가지만 하나의 통일체로서 변치 않는 무언가를 갖고 있으며, 이는 저기가 아닌 바로 여기에서만, 곧 스스로에게서만 느껴질 수 있는 지극히 고유한 것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나와 모든 면에서 다를 바 없지만 나와는 다른 선택으로 인해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가 어딘가에 있다면, 그는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또 한편에서 라이프니츠는 한 인물이 그가 행하는 행위들을 통해 정의된다고 말한다. 결국 한 인물은 그가 해온 행위들과 앞으로 행할 행위들로 총체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오직 신만이 어떤 인물이 평생 행할 행위의 완전한 목록을 알고 있다. 결국 명사인 인물이 동사로서의 여러 행위들을 주관한다기보다는, 동사로서의 움직이고 변화하는 행위에 의해 명사인 인물이 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또 다른 가능세계에 존재하는 나와 닮은 어떤 인물은 선택과 행위가 다르기에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한 사람을 결정짓는 것은 그 사람이 속한 행위들의 계열, 결국 시간적 계열인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한 인물이 이러한 행위의 계열을 구성해나간다기보다, 오히려 이러한 시간적 계열들의 형식이 한 인물을 조직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함께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동일한 세계에 속하며 함께 가능하지 않은 많은 세계들이 동일한 우주에 속함을 확인하는 것을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팽이라는 사람이 어떤 비밀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한 낯선 사람이 그의 방문을 두들긴다. … … 팽이 침입자를 죽일 수도 있고, 침입자가 팽을 죽일 수도 있다. 또는 두 사람 모두 살 수도 있고, 두 사람 모두 죽을 수도 있다. … … 당신은 이 집에 도착한다. 그러나 가능한 과거들 중 하나에서 당신은 나의 적일 수도 있고, 다른 경우 나의 친구일 수도 있다.” 이는 라이프니츠에 대한 보르헤스의 대답이다. 즉 시간의 힘, 시간의 미로로서의 직선은 두 갈래로 분기하고 계속 분기하는 선이기도 하다. 이 선은 함께 가능하지 않은 현재들을 가로질러 지나가면서 필연적으로 참일 필요는 없는 과거들로 돌아간다.


※참고한 자료

  • Theodicy, Freiherr von Gottfried Wilhelm Leibniz, Project Gutenberg
  • 시네마II : 시간-이미지, 질 들뢰즈 지음, 이정하 옮김, 시각과 언어
  •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데이비드 노먼 로드윅 지음, 강지훈 옮김, 그린비

한동석

일상 속에서 개인을 향한 여러 시각적인 요구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무엇보다 도시공간과 미디어공간을 가로지르며 개인을 사회적인 단위로서 구조화하는 권력의 시각적인 전략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영상과 사진을 주요 매체로 삼아, 음악, 애니메이션, 글쓰기 등의 작업을 병행하며 이들이 새로운 서사의 구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접점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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