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활력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 갈등에 참여하기: ‘그들’을 알고, ‘우리’를 세력화하기

마을의 활력은 서로 다른 차이와 다양성을 드러낼 때 생겨납니다. 흔히 좋은 결과라고 여기는 ‘통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점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필요한 조건은 공동체입니다. 조직되지 않은 개별 주민의 의사는 반영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직화할 수 있는 공동체를 구축하고, 갈등에 참여해야 합니다.

“구 지회에 한 번씩 가야 해서 갔더니 글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이 노래를 틀고 다 같이 부르는 거야.”

이 이야기는 2000하고도 21년, 서울 은평에서 직접 들은 실화입니다. 주민자치회 지원관으로 일하며 만난 70대 새마을부녀회장님이 들려주었습니다. 마을에는 이렇게 독재 시대의 잔재인 ‘새마을노래’를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이어 부르는 사람과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마을부녀회장님처럼 어색하지만 마을에 봉사하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는 주민도 있습니다. 또 그 마을에는 필자처럼 ‘새마을운동’이 여전히 지속된다는 사실을 불편해하는 사람과 공동체도 있습니다.

‘마을’이라고 하면 어딘가 따뜻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마을은 하나의 포괄적 공동체가 아닙니다. 마을에 사는 ‘주민’이라는 단어에서도 맑고 순수한 느낌을 받았던 때가 있긴 하지만 ‘주민’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마을은 하나의 ‘통합’을 이룰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마을의 활력은 서로 다른 차이와 다양성을 드러낼 때 생겨납니다. 흔히 좋은 결과라고 여기는 ‘통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점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필요한 조건은 공동체입니다. 조직되지 않은 개별 주민의 의사는 반영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직화할 수 있는 공동체를 구축하고, 갈등에 참여해야 합니다. 마을의 활력은 ‘갈등’을 다룰 수 있을 때 생겨날 수 있으며, 그 갈등에 참여하려면 개별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력화해야 합니다.

갈등에 참여하기

갈등(葛藤)의 어원은 칡 갈(葛)과 등나무의 등(藤)에서 왔다. 갈과 등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감아 오르는데, 위에 서는 시기가 때마다 바뀐다고 한다. 사진제공 : 김유리
갈등(葛藤)의 어원은 칡 갈(葛)과 등나무의 등(藤)에서 왔다. 갈과 등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감아 오르는데, 위에 서는 시기가 때마다 바뀐다고 한다. 사진제공 : 김유리

물론, 양극화 현상을 볼 때면, 통합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등은 그런 극한의 대립은 제외합니다. 극단적 대립은 심각하고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문제이지만 여기에서 그 논의를 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말하는 갈등이 전쟁에서 전제하는 갈등과는 다르다는 점 또한 강조하고 싶습니다. 전쟁에서의 관계는 동지와 적입니다. 상대는 적일뿐이며, 그 적은 말살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와 달리 마을에서의 정치적 갈등은 공존 가능한 형태의 ‘우리’와 ‘그들’ 사이의 문제를 말합니다. 조금 비약을 하자면 통합은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의도를 지니지만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제거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을의 활력은 서로 다른 이들과의 통합이 아니라 갈등의 인정에서 올 수 있습니다.

정치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하나의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건 외부를 전제한다는 의미이기에 최종적이고, 포괄적인 전체 공동체는 현실화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라고 하는 건 ‘그들’과의 구별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갈등은 언제나 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등을 지양해야 할 무엇으로 보면 갈등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정작 대응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무페는 갈등을 인정해야 현실 대응이 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무페 2007, 114, 223). 무페에 따르면 갈등은 나쁘고 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 활력을 찾고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사체 다원주의

갈등을 지양해야 할 무엇으로 보면 갈등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정작 대응이 어렵습니다. 갈등을 인정해야 현실 대응이 가능합니다. by Tamara Gak,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uvTqhAnaf6s
갈등을 지양해야 할 무엇으로 보면 갈등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정작 대응이 어렵습니다. 갈등을 인정해야 현실 대응이 가능합니다.
사진 출처 : Tamara Gak

주민자치회 지원관으로 일하기 전까지 ‘주민’을 너무 단순화하여 상상했습니다. 주민은, 마을이 통합되지 않는 공동체인 것과 같이 하나의 공통된 정체성을 취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정말이지, 개별 주민의 입장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민이 다양한 만큼 주민 공동체가 다양화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마을의 활력은 갈등의 인정에서 올 수 있지만 그 갈등의 주체가 다양화되지 않는다면 많은 이들에게 갈등은 외부에 있는 무엇이 되어 협소한 현장이 되고 맙니다.

다원주의가 중요합니다. 더 정확히는 ‘조직적 다원주의’입니다(달 1999, 416). 조직되지 않은 의사는 반영되기 어렵습니다(달 1999, 556). 주민자치회 지원관으로 일하며 지역 유지와 행정의 관계, 지역 주민과 구 의회의 관계, 그리고 행정과 의회를 지켜보며 이 세계가 ‘그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갈등의 현장에 참여하지 않거나 못하는 주민이 많습니다. ‘그들’은 거대 정당 내, 혹은 거대 양당 간 대립이나 협상을 합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우리’ 역시 그 세계에 없습니다. 더 큰 문제의식은 ‘그들’은 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 사실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역 이슈는 ‘원래’ 적극적으로 공개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파악하고, 그간 갈등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이 ‘우리’를 세력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만 세력화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 1915-2014)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Dahl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 1915-2014)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더 많은 주민이 지역 이슈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참여민주주의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참여민주주의는 조직화를 경계합니다. 조직화를 불공정하거나 부당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개별화를 이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개별화될수록 불리한 입장에 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여민주주의는 참여를 주장하지만 실제 ‘모두’가 발언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소수가 역할을 하게 되고, 모두의 참여를 고려해 투표를 한다고 하지만 이는 대의 체계에서도 시행하는 방식입니다(달 1999, 431, 578).

모두의 참여에는 한계가 있기에 한 공동체 내에서 구성원에게 필요한 정보를 취합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여 대의를 모아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 역시 ‘참여’입니다.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은 현대 민주주의는 결사체 다원주의(associational puluralism)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달 1999, 561). 대규모 국가에서 하나의 공동선을 명백히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달 1999, 569). 그리고 그는 참여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민주주의에서 필수적이어야 하는 건 한 집단에서 구성원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대안은 없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하고도 동등한 기회 보장이라고 설명했습니다(달 1999, 578). 그는 이를 계몽적 이해(enlightened understanding)라고 부릅니다(달 2008, 58).

각 시민들은 (결정에 허용되는 시간 이내에) 결정되어야 할 사안에서 시민들의 이익을 최대로 보장할 수 있는 선택을 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하도록 적절하고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

신문방송학자 장호순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참여는 결과 행위이지 원인 행위가 아니기에 참여의 권유보다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하지만 선별된 정보가 범람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정보를 강조하며 네 가지 조건·네 단계를 설명합니다. “정보information → 관심 attention → 공감/반대 dis/agreement → 행동 action”, 먼저, 정보를 접합니다. 꼭 정보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정보에 관심이 없다면 거기에서 끝입니다. 그런데 만약 관심이 생긴다면 동기 유발이 되어 이에 공감할 건지, 반대할 건지 입장을 정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끝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어서 참여, 어떤 행동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보에서 시작해 참여의 결과까지, 이 네 단계 안에서는 건너뛰는 게 불가능하고, 각 단계별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만 참여라는 결과 행위가 이어집니다(장호순 2021).

주민자치회 지원관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를 이상화했습니다. 모두가 참여 가능한 제도라니 이보다 평등한 제도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원관으로 일하는 동안 주민자치, 민주주의 공부를 이어했고, 지금은 무엇보다 대의민주주의, 결사체 다원주의, 정당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단, 언뜻 생각해봐도 현대 대규모 국가에서 모두가 공직을 돌아가며 맡는 직접민주주의는 현실화될 수 없습니다. 또 고대 아테네에서 정치 참여를 했던 사람은 사실 ‘모두’가 아니라 ‘남성 시민’이었습니다. 노예와 여성을 소유한 남성 시민만이 생존과 생계를 타인에게 맡기고,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역시 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이 정치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달 역시 대의민주주의의 엘리트주의를 문제로 인식했습니다(달 2008, 152-153). 하지만 그 해결 역시 대의민주주의의 결사의 자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돈과 시간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조직화입니다. ‘우리’를 세력화를 해야 갈등에 참여할 수 있고, 그렇게 다원화의 문이 열립니다.

또, 고대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의 유죄 판결을 보더라도 다원주의가 허용되지 않았던 사회입니다(달 1999, 417). 현대 사회는 다원화되었습니다. 작은 단위인 마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동 단위를 마을이라고 해봅시다. 한 개의 동에 대략 2~3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마을이라는 단어가 아무리 따뜻한 인상을 준다고 해도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는 주민이 있는 한 마을은 갈등의 현장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중에 반영되는 갈등이 있고, 그렇지 않은 갈등이 있다는 겁니다. 갈등에 참여하는 이들은 마을의 활력을 느끼며 참여를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갈등이 외부에 있는 주민은 활력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공동체를 구축할 때, 마을의 활력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갈등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을의 활력은 갈등에서 오고, 그 갈등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의 공동체를 구축해야 합니다.

【참고문헌】

  • 달, 로버트 저·김왕식 외 역. 2008. 『민주주의』. 경기: 동명사.
  • 달, 로버트 저·조기제 역. 1999.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서울: 문학과지성사.
  • 무페, 샹탈 저·이보경 역. 2007. 『정치적인 것의 귀환』. 서울: 후마니타스.
  • 장호순. 2021. 〈자치분권의 필수조건 – 정보와 참여〉, https://youtu.be/BOtXES7c7V0(검색일:2021. 8. 15).

김유리

지역과 생태를 키워드로 일하고, 놀고, 공부하고, 어울리며 살려고 합니다. 직업은 주민자치회 지원관입니다. 그리고 지역에서 친구와 함께 불광동친구들이라는 팀을 구성해 앎과 애정을 기반으로 도시숲에서 “생물번개(생물다양성 조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은평녹색당 운영위원장으로 지역 정치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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