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⑪ 가부장적이지만, 그나마 나은 남편

셋째를 출산하고 몸이 힘든 보성댁을 같은 집에 사는 데레사 씨가 종종 도와준다. 데레사 씨는 인정이 많고 착한 사람이지만 팔자가 기구한 사람이다. 그런 데레사 씨를 보며 보성댁은, 가부장적이지만 그나마 나은 남편에 대해 안도하게 된다.

순천으로 이사하면서 마루를 같이 쓰며 한집에 살게 된 데레사 씨는 광양으로 가기 전부터 알던 사이여서 서로 어색하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데레사 씨는 참 인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셋째딸을 낳은 후 보성댁은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낳은 데다가 2,3년 터울로 여섯 번의 출산을 하다 보니 그만큼 몸이 축나 있었던 것이다. 보성댁의 어머니도 생계를 이어가기 바빠 자주 들여다보지 못하는 중에 데레사 씨가 자주 들여다봐 주었다.

“안나 씨, 오늘은 좀 어째? 밥 좀 드셨어? 아이구…… 뭘 좀 먹어야 기운을 차리제.”

보성댁이 먹다가 윗목에 밀어 놓은 밥상을 들고 나가더니 국을 데워서 다시 가지고 들어와서 보성댁 앞에다 내려 놓았다. 보성댁이 여섯째를 낳았다 하니 이 사람 저 사람에 미역국에 넣으라고 소고기를 떼어다 줘 끓인 미역국이었다. 스스로는 돈 주고 못 사먹을 소고기를 아기 덕분에 먹는 셈이었다. 아이들도 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을 주니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밥 한 그릇씩 뚝딱 해지웠다.

“자, 나가 다시 디어 왔응께, 얼른 한 숟가락해요.”
“오메, 데레사 씨 미안해서 어쩐다요.”
“아이고 뭘, 서로 돕고 살아야제. 얼릉얼릉 뜨셔.”
“근디 데레사 씨, 나가 부탁이 잠 있는디요.”
“이? 무슨?”
“이잉, 야 대모 좀 서주시씨요. 야 대모를 데레사 씨가 좀 서주믄 좋겄는디. 좀 해주실라요?”

누워 있는 갓난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럽시다. 나 말고 딴 사람한테 대모 서주라 했으믄 서운할 뻔 했는디.”
“아이고 고맙소. 데레사 씨가 유제 살아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겄소.”
“뭔 별말을, 아이고 이 가시내 잠 봐라. 눈이 단추 구멍맹키로 째깐해가꼬 왜 이리 못생겼다냐. 흐흐”
“아, 인자 봉께, 신부님 밥은 어쩌고 왔다요”
“아 다 채래드랬제. 글고 아가다 씨보고 상치는 거 좀 하라 그랬어요. 안나 씨 딜다 본다고”
“그랬구만요. 아가다 씨한테도 미안하고 고맙네요.”
“아이고 아이 야가 왜 운다냐? 금방까지도 얌전히 있더니만”

아이를 낳고 삼일이 지나자 보성댁은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몸을 일으켜 깨끗이 씻고 단정하게 옷 챙겨 입고 아이를 안고 성당에 갔다. 아이의 세례식이 있는 날이었다.
사진 출처 : dodo71
아이를 낳고 삼일이 지나자 보성댁은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몸을 일으켜 깨끗이 씻고 단정하게 옷 챙겨 입고 아이를 안고 성당에 갔다. 아이의 세례식이 있는 날이었다.
사진 출처 : dodo71

말은 그러지만, 데레사 씨는 웃는 얼굴을 하며 안고 있던 아이를 넘겼다.

“아이고 야가 밥값 했는갑다. 쌌네, 쌌어.”

보성댁은 갓난아이를 받아 기저귀를 갈아 주고 젖을 먹였다.

“애기 젖 멕이고 안나 씨도 얼릉 밥 먹어요. 모세 씨는 신부님이랑 밥 먹었응께 걱정말고. 나 인자 가요.”
“예, 고맙소.”

아이를 낳고 삼일이 지나자 보성댁은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몸을 일으켜 깨끗이 씻고 단정하게 옷 챙겨 입고 아이를 안고 성당으로 갔다. 성당 뜰에 있는 집에 살다 보니 먼 동네에서 겨울에 새벽미사를 오는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 미사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럴 때면 성당에 집이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영대를 걸치고 있는 신부님과 세례 줄 때 사용하는 도구들을 챙겨든 상덕 씨와 대모를 서기 위해 역시 단정하게 차려입은 데레사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모랑 놀고 있던 위의 두 딸이 이모 손을 잡고 따라 들어 왔다.

“애기 본명은 뭘로 하실 컵니까?”

신부님은 멕시코에서 한국이 온 지 5년이 넘어 한국말이 많이 익숙해졌지만 발음만큼은 정확하게 따라하기 어려운지 서툴게 느껴지는 발음을 섞어 질문을 하였다.

“오늘이 막달레나 축일이니 막달레나로 하지요.”

남편 상덕 씨가 대답했다. 아기는 입에 소금을 넣을 때는 가만히 있더니 이마에 물을 붓자 깜짝 놀라며 울기 시작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막달레나에게 세레를 줍니다.”

세례식을 마치고 보성댁이 아기를 안아 토닥거리자 울음을 그쳤다. 성당에서 나오자 여회장인 도로테아 씨가 막 들어오다 마주쳤다.

“영세식 끝났어요?”

자기가 안겠다고 달라는 동생에게 아기를 안기며 보성댁이 대답했다.

“예, 금방 끝났어요.”

아기가 예쁜지 까꿍까꿍 하며 얼르고 있는 보성댁의 동생을 보며 도로테아 씨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이 피어났다.

“아이, 소피아야. 그 못난이가 뭐시 이쁘다고 그러고 물고 빨고 하냐?”
“머시가 안 이뻐요. 이쁘기만 하구만.”

동생이 얼굴이 빨개지며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도로테아 씨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놀려댔다.

“머시가 이뻐야? 한나도 안 이쁘구만. 눈도 째깐해가꼬”
“글믄 보지 마요!”

동생은 아기를 안고 집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아이고 멀라 그리 놀려싸. 지 조카라고 이뻐서 죽고 못 산디.”

데레사 씨가 옆에서 핀잔을 주자 도로테아 씨가 대답했다.

“흐흐 놀리는 재미가 있잖아요. 저러고 꼬라지 부리고 들어가는 게 얼마나 재미있어요. 흐흐”
“으이구…… 엥간히 놀려싸. 글다가 진짜 근 줄 앙께.”
“흐흐 알았어요.”

말은 못난이, 못난이 놀려 댔지만 여회장 도로테아 씨는 보성댁네 아이들을 모두 예뻐했다. 특히 여섯째로 태어난 막내딸을 보면 두 눈에 사랑을 가득 담은 채 못난이, 못난이 하면서 귀여워했다. 같은 마루를 쓰며 한집에 사는 데레사 씨도 마찬가지로 보성댁네 아이들을 사랑해 주었다. 거기다 대모, 대녀의 관계까지 맺고 나니 셋째딸을 특히 더 예뻐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젊었을 때부터 눈이 크고 콧대가 오똑한 데다 하얀 피부를 가져 서구적인 미모라 평가되던 그녀는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다. 보성댁과 달리 비교적 여유있는 집에서 자란 그녀는 고등학교 공부까지 마친, 그 시절 나름 인텔리 여성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 있는 은행에 취직해 한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식까지 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의 고향인 여수에 부인과 4남매가 살고 있었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전쟁 고아라더니 본부인이 여수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 둘을 낳고 셋째로 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하는 중에 찾아온 본부인을 만나면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정하게 굴던 남자가 언제부터인가 툭 하면 물건을 던지고 욕을 해대며 아이들에게도 함부로 대해 힘들어 하던 차에 그걸 알고는 그대로 살 수 없어 결별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순천으로 넘어 왔다. 그렇게 사는 처지라 친정에서 남부끄럽다고 외면을 해 사는 것이 어려웠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외국에서 온 신부님들의 주방일을 하게 되었다. 데레사 씨의 아이들도 데레사 씨를 닮았는지 착하고 다정했다. 그러면서 공부도 잘 해 어머니인 데레사 씨의 삶의 힘이 되었다. 둘째 아들인 프란치스코는 그림을 뛰어나게 잘 그렸다. 어려운 중에도 그림실력이 뛰어나 그림으로 대학을 가고 싶어 했다. 막내 마리아는 학교 다니는 중에 학교 끝나고 오면 보성댁네 딸아이들과 곧잘 놀아주곤 했다. 다만 큰아들이 이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 받았는지 툭 하면 밥상을 차고 성질을 부려 댔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고 집을 나가 버렸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소식도 모르게 되고 집안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없어지니 생활은 시끄럽지 않게 되었지만 이따금 소식을 모르는 큰아들 걱정에 한숨 짓기도 했다. 데레사 씨는 본인이 고등학교까지 마쳐서인지 남은 아이들 둘을 가르치려고 기를 썼다. 그러나 벌이가 시원치 않다 보니 학교에 내야 하는 월사금을 밀리기 일쑤였다. 자신의 월사금 문제로 힘들어 하는 엄마를 보던 고등학생 딸이 어느 일요일 아침에 나가더니 하루종일 보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딸은 지쳐 있었고 울었는지 눈이 부어 있었다. 하루종일 보이지 않아 애태우던 딸이 그런 몰골을 하고 돌아오자 데레사 씨는 애가 타고 속이 상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나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 보성댁은 그 점이 무척 고마웠다. 사진 출처 : Alfonso Scarpa
남편이 아이들에게나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 보성댁은 그 점이 무척 고마웠다.
사진 출처 : Alfonso Scarpa

“아이, 이게 뭔 꼴이다냐? 하루종일 어디 있다가 지금 오는 거여 응?”
“엄마 내가.”
“이 니가”
“아버지란 인간한테 갔었거든?”
“에? 여수에? 왜? 거긴 뭐 하러 가?”
“아니 엄마가 나 학비 땜에 속을 썩이고 있응게 아버지면 책임 좀 지라고 찾아갔제.”
“아니 금메 니가 거길 왜 가야.”“월사금 좀 달라 글라고 갔제. 근디 그 사람이 돈 없다고 못 준대. 재개는 근사한 양복에 차려입고 어디 가등만 나 월사금 줄 돈은 없다고 다시는 오지 말래. 그게 아버지야?”
“아니 그니까 거길 뭣 흘라고 가 가기를”
“엄마 너무 힘들어 항께 그랬제. 양심이 있으믄, 그러고 모른 체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여?”
“괜찮아 엄마는 괜찮응께 다시는 거기 가지 마라. 알았냐? 알았제?”
“우리 아부지라는 인간 진짜 나쁜 사람이여. 엄마는 어짠다고 그런 사람을 만나가꼬 이게 뭐여, 이것이!”

그러고는 두 모녀가 안고 우는 걸 보성댁은 마루에 걸터앉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을 한 그릇 떠서 마리아에게 마시라고 주며 데레사 씨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하는 것이 다였다. 데레사 씨는 그것도 고맙다고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데레사 씨를 보며 보성댁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면서 남편 상덕 씨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상덕 씨는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이기도 해서 제 손으로 밥을 차려 먹거나 밥그릇 하나 치워주는 법이 없었다. 혼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어머니를 만나러 보성에 가면서 집을 사흘쯤 비웠던 적이 있었다. 국도 끓여 놓고 반찬도 뭐뭐 있다고 일러두며 남편이 밥만 해서 먹을 수 있게 준비를 해놓고 갔었다. 그렇게 갔다 돌아오니 남편은 보성댁이 없는 사흘간 배를 쫄쫄 곯으며 지내고 있었다. 베틀에 앉아 덜그덕덜그덕 베를 짜며 ‘어이 자네 없는 동안 밥을 못 먹었네. 배고파 죽겄네. 얼릉 밥 좀 주소.’하는 거였다. 차마 자신의 손으로 밥을 해먹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런 남편을 보며 ‘나가 참 어디를 맘 놓고 다닐 수가 없겠그만.’하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가부장적인 남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큰 소리를 내거나 욕을 하거나 하는 법도 없었다. 여수머리에서 순천으로 이사하는 일 때문에 시어머니와 갈등을 할 때 한번 때린 이후로 다시는 때리는 일도 없었고 맘에 안 드는 것이 있을 때면,

“어허이, 그것이 그러믄 쓴당가.”

하고 그만이었다. 때론 말이 길어지더라도 화내지 않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며 납득하기 쉽게 설명을 하곤 했다. 남편이 그러면 보성댁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가급적 남편의 요구에 맞춰주려 노력하는 편이라 그다지 큰소리가 날 일도 많지 않았다. 다정하고 자상한 면도 없는 남편이었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아이들에게나 보성댁에게나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어서 보성댁은 남편이 고맙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돈을 많이 버는 재주가 없어 사는 게 팍팍하기도 했지만 데레사 씨 남편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은 게 다행이었고 좋은 이웃들이 많아 힘들 때면 힘이 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어 주기도 해서 견딜 만했다.

보성댁은 가난한 살림이지만 신앙에 의지하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재미로 긴긴 세월을 살아갈 수 있었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