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존재 사이에 분명한 경계는 없다

인간중심적 사고로 자연을 대하고 파괴하면서 기후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타자와의 관계를 재고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생명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생명의 흐름 속에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계성에 대한 생각을 심화시키고 그 흐름을 온전히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기후 위기의 징후가 현실화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폭염으로 인해 곳곳에서 산불이 발생하고 있고 남부유럽에서는 2022년 7월 첫 주에만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기후 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인류가 자신의 당장의 이익과 욕망에 몰입하여 자연을 파괴하고 과도하게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 결과이다.

UN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이라는 국가들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고, 인류가 생태계를 파괴한 행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지구 생명들과 화합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너무나 멀어 보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 중심적 사고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자신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사진출처: congerdesign
모든 생명은 자신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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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인간 중심적 사고가 문제라고 말을 하지만 보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중심적 사고라기보다 ‘인간 우월적 사고’다. 모든 생명은 각자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관계 맺고 살아간다. 식물은 뿌리를 내려 자기 주변의 양분을 흡수하고 잎으로는 주변의 이산화탄소를 호흡한다.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동물은 물론이고 하루살이조차도 자기를 중심으로 주변에서 먹을 것을 찾고 짝을 찾는다.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이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주변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를 주위의 존재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태도이다.

이런 우월적 태도는 타자를 자신과 구분하고 그들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자리매김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 나와 타자와의 엄밀한 구분이 선재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것을 구분한다. 생물과 무생물, 세균과 바이러스, 파충류와 조류, 식물과 동물, 인간과 원숭이, 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 심지어는 모체와 수정란까지. 모든 것을 구분한다. 하지만 세상의 존재 사이에 분명한 경계란 없다.

모든 존재는 대체로 종(鐘) 모양의 표준 분포 곡선을 따른다. 많은 개체는 종의 중심부에 분포 하지만 주변에는 무수한 변이와 혼종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보통 엽록체의 유무나 움직임으로 식물과 동물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엘리지아 클로로티카(Elysia chlorotica)라는 바다 달팽이가 있다. 이 달팽이는 태어났을 때에는 여느 달팽이와 그다지 다르지 않으나, 성장하면서 섭취한 조류로부터 엽록체 유전자를 받아들여 광합성을 한다. 그럼 광합성 하는 클로로티카는 동물일까 식물일까? 미국 콜로라도 섬에 서식하는 야자나무 워킹 팜(Walking palm)은, 햇빛이 내리쬐는 곳으로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이전의 뿌리는 고사시킴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햇빛이 있는 곳으로 움직인다. 그 거리가 1년에 4cm에서 20cm 정도이다. 움직이는 워킹 팜은 식물일까? 동물일까? 생명에 명확한 구분은 없다. 생명의 구분은 인류의 편의에 따른 임의적인 구분일 뿐이다.

다음으로 성(sex)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흔히 유기체를 수컷과 암컷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성은 바둑돌의 흰 돌이나 검은 돌처럼 둘 중에 하나가 아니다. 포유류의 성은 다양한 성적 경향뿐만 아니라 수컷과 암컷 사이에 간성(인터섹스)도 있다. 사람의 경우 0.17%가 간성이다. 성은 유전적으로 결정지어진다 생각하지만, 물고기는 물의 온도에 따라 성이 결정된다. 또 수컷 물고기의 개체수가 부족한 경우 다 자란 암컷 물고기가 수컷으로 성전환되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너무 강해, 특히 특정 종교의 경직된 교리의 영향에 의해, 성을 암수 두 가지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성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하다. 엄밀히 성이라는 것은 나와 다른 유전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명의 시발점인 세균은 유전 정보를 플라스미드(plasmid)를 통해 서로 주고받았다. 플라스미드는 매우 다양하다. 그만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 경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물질적으로 고정불변의 상태가 아니다. 호중구는 0.9일 만에, 장 세포는 3~5일 만에 그리고 적혈구는 120일 만에 교체된다. 우리는 음식물을 먹으면 그저 칼로리만 얻고 나머지는 배설물로 분비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성인의 경우 하루 80g이 이들 음식물로 교체된다. 음식물이 내 몸이 되고, 내 몸이었던 세포가 ‘물질’이 되어 몸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이러한 교환은 온몸에서 미시적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몸 곳곳에서 생물과 무생물의 전환이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저명한 분자생물학자인 후쿠오카 신이치는 생명을 “요소의 흐름이 유발한 효과”라고 했다. 그럼 그렇게 교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물질을 생물과 무생물로 구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그러한 끝없는 흐름 속에서 나와 타자를 엄밀히 경계 지을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요소의 끊임없는 흐름이 유발한 효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실제적 자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릇된 관념”이라는 의미의 ‘아상(我想)’은 생명의 존재론적 의미를 꿰뚫는 직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행하고 있는 모든 구분은 임의적이다. 그러한 구분은 왜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 목적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백인과 흑인의 구분이 그 한 예다. 사실 노예무역이 극성을 부리던 1500년대 이전에는 백인과 흑인의 구분이 없었으며 유럽의 백인들은 자신이 백인이라는 것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1500년대 이후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을 노예무역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노예로 삼으면서 너무나 많은 흑인 노예가 생겨났고 그러한 흑인 노예를 관리할 수단이 필요했다. 노예무역 이전에 백인의 노예는 백인이었다. 그렇기에 피부색을 근거로 노예와 노예주를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흑인 노예가 급증함에 따라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노예주들은 소수가 된 백인 노예로 다수의 흑인 노예를 부려 먹기 위해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구분은 차별과 폭력을 합리화하기 위한 선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목적에 따른 구분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언젠가부터 이루어진 여성의 몸과 태아의 구분, 그리고 태아조차도 일령에 따라 생명과 비생명으로 구분하는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다. 몇 시간을 차이로, 아니 몇 초를 차이로 태아는 물질과 생명으로 평가가 달라진다.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몸에 잉태된 생명을 생명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사진: 삶은 생명의 흐름 속에서 또 누군가의 삶으로 이어진다. 사진출처: suju-foto
사진: 삶은 생명의 흐름 속에서 또 누군가의 삶으로 이어진다. 사진출처: suju-foto

모든 생명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삶은 다른 생명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중층적인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또 모든 생명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러한 삶은 생명의 흐름 속에 또 누군가의 삶으로 이어진다. 세계적인 생물학자로 인정받는 베른트 하인리히의 표현대로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인류가 자연을 파괴하기 전,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자본세가 생태계를 자본의 이윤 축적의 수단으로 삼기 전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삶에 충실했고 그러한 삶은 지구 생태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미국의 조류학자였던 존 제임스 에듀본이 “들소들이 지금까지도 이토록 많이 살아남아서 바다처럼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는다. 그 방대한 규모는 제대로 설명하거나 심지어 상상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라고 기술했듯이 지구 생태계는 생명의 경이로움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인류가 스스로를 우월한 존재로 규정하고 다른 생명들을 구분하고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마구 대하고 멸종시킴으로써 오늘날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자초하였다.

홀로 존재하는 생명은 없다. 생명은 오랜 생명의 역사를 거쳐 공진화해온 생명공동체인 공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흐름 속에서 에너지와 물질이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다시 생명의 흐름 속으로 흩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자연의 어느 생명도 종우월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이끼든, 바퀴벌레든, 사슴이든, 독수리든 태어난 종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세대를 이어가고 생명의 흐름 속으로 흘러간다. 그러한 온전한 흐름이 지구 생명을 살린다.

그럼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태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내면에 숨기고 있는 우월적 태도를 직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은 것이, 지금의 사회 구성원들은 어릴 때부터 끊임없는 경쟁 교육 시스템 속에서 살아왔다. 그로 인해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타자를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내면화되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영어나 수학 점수로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교육이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를 익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음은 나의 수학 성적이나 영어 성적이 아니라 타자들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또 내가 너보다 무엇이 우월한지를 내세우는 교육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스스로 최고의 지성을 갖추었다고 자화자찬하는 인류는 지구에 함께 살고 있는 이웃 종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박종무

지구 생명의 근원은 해님이라고 믿는 생태주의자. 해님의 에너지를 받는 지구 모든 생태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희망한다. 특히 동물들이 생태구성원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아픈 동물을 치료하고 동물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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