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컴퍼니] ⑧ 적의를 보이는 것들

"적·의를 보이는 것·들"은 문장 교정에서만 찾을 수 있는 불필요한 표현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서도 ‘적의를 보이면서’ 사회적 적대감의 긴장을 높이려는 시도가 자주 접한다. 서로의 문장과 논리만 옳고, 대화 방식과 태도에 대한 성숙한 성찰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 안의 ‘적의를 보이는 것들’에 맞설 새로운 상상력과 삶의 태도가 절실하다. “새로운 대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며 우리 모두가 적의(敵意)를 넘어서 창조적이고 연대하는 방식을 찾는 일만이 적대감을 넘어서 희망과 환대, 우정의 힘을 실천하는 방향을 설정하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문장을 교정·교열해 온 편집자 김정선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대중을 위한 글쓰기 안내서를 펴냈다. 책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에 소개되는 여러 표현 중에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 남는 표현이 있다. “적·의를 보이는 것·들”.

김정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서울: 유유, 2016.

글을 쓰다 보면 접미사 ‘적’, 조사 ‘의’, 의존명사 ‘것’, 접미사 ‘~들’을 쓸 때가 많다. 편집자에 따르면 ‘의’와 ‘들’은 각각 일본어와 영어에서 온 표현법이라 한국어 사용에서는 빼더라도 문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가 많다고 한다. ‘것’과 ‘적’ 역시 마찬가지로 관용구처럼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쓰지 않아도 문장이 어색하지 않음을 배운다면 쓰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들이 바로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다.1

무조건 이런 표현을 다 빼 버릴 수는 없지만 굳이 쓰지 않아도 될 표현을 습관처럼 사용하는 데에 문제의식을 느낀 편집자는 너무 익숙했지만, 막상 빼보니 훨씬 자연스러워지는 단어와 문장 앞에서 새로운 편집 기술을 익힌다. 이를테면 이런 표현이다.

“정치적 갈등, 문화적 차이, 철학적 논리, 사회적 관계”를 “정치 갈등, 문화 차이, 철학 논리, 사회관계”로 바꿔 써도 뜻이 달라지지 않고도 훨씬 수월하게 단어와 문장 사이를 이어갈 수 있다.

“적의를 보이는 것들”, 며칠 전 이번 호의 주제를 생각하다가 이 표현이 떠올랐다. 마침, 안국역을 지나치며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채로 서로에게 적의(敵意)를 내보이며 저마다의 정치적 표현을 표출하고 있는 수많은 인파를 가로질러서인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에 어느샌가 익숙하게 자리 잡은 또 다른 의미로의 ‘적의를 내보이는’ 현실이 보였다.

적의(敵意), 사전적으로 “적과 같이 대하는 마음”, “해치려는 마음”을 나타낸다. 다른 사람이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위험하고, 불편하고 성가신 대상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행동 방식은 상상하는 적의를 통해 드러날 때가 있다. 지난 겨울 이후 한국 사회가 정치 혼란과 극단적인 언어와 행동을 통해 직면하고 있는 적의의 농도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특히 상대가 나와는 다른 정치 견해를 갖고 있다거나, 낯선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 문제는 더 커진다. 낯섦에는 지역 구분이나 사회경제적 구분짓기도 포함될 수 있고, 무엇보다 외국인과 약자, 소수자를 향한 선을 넘는 적개심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영문학자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사회 구성원이 타자를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를 “가해 행위의 원인과 그 행위로 인해 표출된 문제, 둘 다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스캐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실체를 믿는 데 곤란을 겪기 때문에 상대를 가해하고, 동시에 상해(injuries) 자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실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앞에 분명히 존재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상해를 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2

우리는 상대를 적으로 보는 생각과 언어(적의)가 행동으로 표현되면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겨나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을 잘 알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서 상대에게 적의를 보이면서 혼란과 분열에 돌파구를 찾는 모습은 어느 진영인지를 떠나서 서글픈 현실이다.

적의를 내보이면서도 나의 주장을 움켜쥐려는 몸부림, 내가 살기 위해서는 사실 관계도 무시하고 비난과 원망을 다 뒤집어쓸 한 사람이 필요한 시대에 과연 우리는 ‘적의를 보이는 것들’을 넘어서 새로운 질문과 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신승철은 우리가 대화할 때 “고정되고 멈추어선 기성 질서를 사용할 메시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으로 여기고 그대로 전달하거나 오려붙이기 식으로 대화하지 않는다.”3는 점에 주목한다. 달리 말해 누군가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정치적, 선동적” 구호나 “무조건 가르쳐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대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신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상대방의 눈빛, 향기,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등”.4

기성 질서가 가진 기표성으로는 잘 이어오던 대화도 순식간에 길을 잃고 관계적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설교로 빠져들기 쉽다. 심각하게는 지금 우리 사회가 치닫고 있는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자칫 실체 있는 폭력과 잔인한 행동으로 드러나진 않을지 우려한다. 실제로 법원을 습격한 폭도의 행동은 많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사건이었다.

“상대방의 눈빛, 향기,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등”. 사진 출처: Joe Caione

고조되는 양극단에서 적대심이 실체화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신승철의 말대로 대화 질서의 재편이 시급하다. 우리는 “예측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질서에서 벗어난 관계망, 흐름, 상호작용의 과정과 이를 통한 미지로의 여정이라고 여긴다면 더 풍부하고 다양한 결과”5를 가져올 수 있다. 마치 ‘적’, ‘의’, ‘것’, ‘들’이 문장에 들어가야 뭔가 갖춰진 문장이라고 여기던 기존 질서에서 사소하지만 아주 작은 표현 하나씩만 덜어내도 그동안의 표현과는 전혀 다른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문장이 이어지듯 우리 삶에서도 지금까지의 언어 사용, 행동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생각 방식, 창조적이고 연대할 수 있는 주체성이 필요한 시대다.

적의를 보이는 것들, 나와 너 사이에 적대성은 화해할 수 없는 신념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적의는 그들의 행동 양식일지 몰라도, 우리는 이제 적의를 넘어선 대화와 행동 방식을 익힐 때다. 그리스도교 성서에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21)는 구절이 있다. 종교적 신념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절실히 필요한 상상력은 악에 맞설 더 큰 힘과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를 보이는 것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창조적 대응이 필요할 때이지 않을까. 순간순간 나에게 적의를 보이는 그들을 향해, 또 그들을 초대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꾸준히 발견할 태도가 필요하다. 우선 우리가 속한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사소한 행복한 낙관, 유머, 해학(신승철)을 찾아보면 어떨까. 물론 얼토당토않은 적대심과 혐오, 차별의 태도에는 매서운 눈으로 맞서지만, 그 눈을 갖고도 우리가 이어갈 일은 똑같은 ‘적의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희망과 환대, 우정의 힘을 분명히 내보이는 삶 아닐까.


  1. 김정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서울: 유유, 2016), 22.

  2. 마사 누스바움 외 지음,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 오인영 옮김, (서울: 삼인, 2003), 146.

  3.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서울: 알렙, 2019), 161.

  4. 신승철(2019), 161.

  5. 신승철(2019), 163.

김준영

세상에 여러 얽힘, 연결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계기독교와 상호문화를 공부하고 있고,달리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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