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눈이 어두운데, 처음 방문하는 집에 시간 맞춰 가야 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앞뒤 일정이 빽빽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중 으뜸은 대치동 은마아파트도 울고 갈 둔촌동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예컨대 101동에서 103동 입구 찾기가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대체로 깜깜한 밤에 가서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최근까지도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낭설이 있다.

88서울올림픽을 상징하기 위해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아파트 건물들이 오륜기 모양처럼 보이도록 설계하느라 보행자 동선이 엉망이 되었다”라는 거다. 실제로는 중앙 상가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방사형 구조였는데, 처음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미로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과외 업계 은어로 ‘새끼를 쳤다’라고 표현하는, 기존 학부모의 소개로 늘어난 수업들이 주로 그 단지 내에 몰려 있어 몇 년간 참 자주도 드나들었다.
예체능계 학생도 많았지만 미술이나 무용 전공이 음악 전공 학생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중에서도 피아노나 현악기 전공이 대부분이었기에, ‘거문고’를 전공으로 한 아이는 전무후무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거기엔 단순한 기억을 넘어선 사연, 아니 서사가 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발걸음을 승희 어머니가 불러 세웠다.
“선생님, 이것 좀 가져가세요.”
정성껏 싸맨 금색 보자기를 내밀고 계셨는데, 그 속에는 시루떡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잠시 앉자, 어머님이 시루떡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으셨다.
“같이 사는 저희 엄마가 조왕신(부엌신)을 믿으시거든요. 철이 바뀔 때마다 떡을 바치시는데, 수업하러 오시는 선생님들한테도 나눠 드려요. 혹시 종교가 있으시면 기분 나빠하실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네요.”
지금은 시중에서 잘 팔지도 않는, 찹쌀로 빚은 정성 가득한 시루떡이었다. 받지 않을 리 없었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아니에요, 귀한 떡인데 정말 고맙습니다.”
이 대목에서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보통 ‘제사음식에는 붉은 팥을 쓰지 않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또 조왕신의 ‘신’ 자가 귀신 신(神) 자인데, 이 정도의 치성이면 결코 잡신일 리 없겠다는 궁금증도 일었다. 조왕신(竈王神)은 글자 그대로 ‘부엌 아궁이 조(竈)’, ‘임금 왕(王)’, ‘귀신 신(神)’ 자를 쓴다. 여기서 ‘신(神)’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조금 넓게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삶에 깊숙이 영향을 주는 존재로서, 신령이나 수호신, 혹은 특정 장소가 가진 영성 같은 의미로 되짚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조왕신은 ‘부엌과 가정을 지키는 신령(家神)’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조왕신이나 성주신에게 정성을 올릴 때 시루떡을 올리는 풍습이 오랜 전통으로 존재했다. 결국 붉은 팥고물이 들어간 시루떡은 잡귀를 막아내고 순수한 안녕을 바라는 극진한 소망인 게다. 중국의 가신(家神) 중에도 비슷한 존재가 있는데, 부엌을 관장할 뿐만 아니라 집안 대소사에 판결을 내리는 재판장의 면모까지 갖추고 있다고 한다. 승희 할머니의 시루떡은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져, 옛사람들에게 부엌이란 단순한 조리 공간을 넘어 생명 유지와 집안의 복, 그리고 여성의 신성한 노동을 중시하던 상징적 공간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가장 강력한 치성의 의례 음식이었던 셈이다.
타오르는 아궁이 앞에서 집안의 안녕과 자식의 복을 빌던 옛 어머니들의 마음. 승희 할머니가 정성껏 찌어낸 시루떡 역시 그 온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온기 속에서 자란 거문고 소녀에게도 결코 잊지 못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거문고 소녀의 입시 이야기로 돌아간다.
승희는 수능 전날, 엄마와 대판 싸우고 울고불고 난리였다. 그날 ‘눈탱이 밤탱이’가 된 아이를 수업 시간 내내 달랬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일 시험, 어떻게 봐요. 엉엉.”
아이가 울자, 거실에 있던 어머님이 소리 질렀다.
“그러게 내가 공부 좀 하랬잖아”
그들의 다툼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없었다. 속으론 아이 어머님이 아이처럼 원망스럽기도 했다. ‘시험 앞두고 애를 울리나… 쯧쯧’
승희의 입시 결과를 알게 된 건 시간이 지나서였다. 승희의 이모 그러니까 아이 어머님의 언니가 같은 단지에 살고 있었고, 그 아들 즉 승희의 한 살 적은 사촌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 걔요? 이대 붙었어요. 빨간 스포츠카 몰고 학교 다녀요”
자신이 동생이면서도 말끝마다 ‘걔’라고 했다. 그게 내심 웃겼는데, 이어 그는 묻지 않은 소소한 일상 얘기까지 풀어 놓았다. 고3 때도 화이트 데이에 사탕 바구니를 선물 받고 곱상한 얼굴로 의기양양했던 모습을 알고 있는지라 웃음이 나왔다.

입시 면접에서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자태’ 또한 중요한 심사 요건이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한 장면이 머릿속에 연상되었다. 한복을 차려입고 거문고 줄을 고르는 소녀의 등 뒤로, 조용히 아이를 보살피던 조왕신의 자태가 겹쳐 보인 것이다. 수능 전날 세상이 무너질 듯 울먹이던 여린 소녀를 말없이 안아주던 가신의 따스한 숨결이, 그 정성스러운 시루떡의 온기처럼 그 애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던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