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食)문화계의 전쟁기계 –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 『SUSTAIN-EATS』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 『SUSTAIN-EATS』의 김정모 편집자가 이야기하는 ‘이 시대의 식문화’와 ‘전쟁기계로서의 식문화운동’에 대하여.

홈이 패인 식문화

“뭐 먹을까”
지인을 만나면 나누는 대화 중에 수위를 다투는 질문이다. 식사 메뉴나 장소를 정하는 질문은 본격적인 대화를 위한 탐색전이다. ‘식(食)’에는 맛 말고도 다양한 것이 담겨 있다. 사람에게 ‘식’은 육체 만족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음식은 냄새, 분위기, 사람, 관계, 문화, 역사, 시간 등이 어우러진 복합체로 우리의 존재를 자극한다. 최근에는 환경과 생태(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재조명되며 ‘식’은 또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고도의 복합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재의 패러다임에서 진정 ‘잘 먹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시대에 ‘식문화’는 무엇일까?

식문화는 인간 사회에서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현대 문명에 뿌리가 되는 고대 문명은 주식에 따라서 밀문화권, 쌀문화권, 옥수수문화권으로 규정되었다. 밥상을 이루는 근간은 삶과 사회를 형성했다. 모든 문명의 맨 아래 지층은 누가 뭐래도 식문화이다. 아무도 인식하지 않았던 식문화가 최근에 사회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우리 사회의 식문화는 양면적이다. 먼저는 자본주의에 포섭된 식문화다. 현대인의 식사는 빠르게 자본주의에 흡수되었다. 생산에서는 환경을, 유통에서는 노동자를, 판매에서는 소비자의 건강을 착취한다. 자본주의식 식문화에는 행복이 관능의 수준으로 넘친다. 모든 식사가 외식이 되었다. 감사, 책임, 절제, 건강, 성찰과 같은 음식의 본질은 사라지고 맛과 화려함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배민맛’이라는 찰나의 우스갯소리에도 씁쓸한 식문화가 녹아있다.

밥상을 이루는 근간은 삶과 사회를 형성했다. 모든 문명의 맨 아래 지층은 누가 뭐래도 식문화이다.
사진출처 : Livier Garcia
https://www.pexels.com/ko-kr/photo/1459339/
밥상을 이루는 근간은 삶과 사회를 형성했다. 모든 문명의 맨 아래 지층은 누가 뭐래도 식문화이다.
사진출처 : Livier Garcia

또 하나의 형태로는 공생을 추구하는 식문화다. 대표적으로 채식(비거니즘)을 들 수 있다. 사람마다 채식을 시작하는 계기는 동물 보호, 환경 보호, 건강 등 다양하다. 그러나 결국에는 공생을 추구하는 식문화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안에는 육체와 정신의 공생부터, 생산자와의 공생, 동물과의 공생, 다양성과 문화와의 공생까지 포함된다. 다만 채식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프랜차이즈, 대기업, 국가로부터 주목받았고 상품화(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과정)가 진행되고 있다.

들뢰즈는 이처럼 고착된 흐름을 홈이 패인 공간이라고 표현하고 이 흐름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를 국가라고 상징한다. 즉 식문화라는 공간에 자본주의는 자신을 중심으로 도로를 깔고 공간을 지배하는 흐름을 만든다. 공생을 추구하는 식문화 초기에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지만, 거대 자본을 움직이는 프랜차이즈나 대기업 그리고 국가가 공생, 친환경, 채식을 상품화시켜 자본주의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전쟁기계로서의 식문화

오늘 다룰 이야기는 자본주의적 흐름에서 탈주하는 전쟁기계의 가능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를 정의하지 않지만 전쟁기계의 목적을 밝힌다.

“전쟁기계는 본질상 매끄러운 공간의 구성요소이며, 이 공간에 점거, 이 공간에서의 이동, 또 이 공간에 대응하는 인간편성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전쟁기계의 유일하고 진정한 적극적인 목표이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초래된다면 그것은 전쟁기계의 적극적인 목적에 대립하는 홈 파는 세력으로서의 국가나 도시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전쟁기계는 국가와 도시국가적 및 도시적 현상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절멸을 목표로 삼는다.”

『천개의 고원』, 799-800.

짧게 요약하면 전쟁기계는 국가[기존 시스템]에 포섭되지 않고 홈이 패인 공간[범주]들을 밀어내고 매끄러운 공간[창조]으로 만드는 ‘어떤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를 ‘~이다’라고 하는 순간, 창조성이 파괴된다고 여기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전쟁기계를 생성한 유목민은 벡터(운동성을 포함한 움직임)의 형태로 공간을 유목한다.

나는 현재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 『SUSTAIN-EATS』을 발행하고 있다. 이 매거진은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가능한 멀리까지 끌고 나간다. 매호 소재를 정해서 그것이 품고 있는 역사, 이야기, 사회적 상징, 환경에 시선을 던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렇기에 매호 매거진의 형식이 변칙적이다. 소재를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고, 방점의 위치도 다르다. 변주의 시작은 초기화와 맥락이다.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까지 파고 들어간다. 이 복합체가 갖는 문제가 각기 다르기에 문제를 다루는 분야도 달라져야 한다.

『SUSTAIN-EATS Vol.3 지구를 위한 식탁』 표지 (공공책방, 2021.12.)
『SUSTAIN-EATS Vol.3 지구를 위한 식탁』 표지 (공공책방, 2021.12.)

가령 모든 음식의 종착점인 음식물류 폐기물(이하 음식물쓰레기)을 소재로 한다면, 음식물쓰레기로 인식조차 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것들에서부터 시작한다. ‘음식물쓰레기는 먹고 남긴 것’이라는 통상적인 관념을 벗어나기 위해, 음식물쓰레기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요소들을 담는다. 못난이 농산물, 유통기한, 영양소를 뽑아내고 버려지는 부산물 등이 그렇다. 문제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면 퇴비화나 업사이클링 등으로 긍정적인 움직임을 제시한다.

또 세계 최고 수산물 소비국으로서 어업 문제를 다룰 때는 해저에서부터 수산시장까지 문제를 그물처럼 엮어나간다. 어린 물고기 남획과 유통 문제, 이주어선원 노동권 문제, 어업 폐기물 문제는 결코 개별적이지 않으므로. 지속가능한 어업을 위한 노력을 소개할 때는 개론적 형태를 취할 것이다.

나는 이를 들뢰즈의 말따라 ‘유목하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들뢰즈는 유목이 이주와 다르다고 말했다. 이주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과 도착의 과정이라면 유목은 식문화라는 공간에서 질문을 방향으로 삼아 돌아다니는 것이다. 식문화 매거진이면서 ‘식’에만 머물지 않고, 식문화 범주 안에 있는 다양한 양태를 이어가는 탈주가 ‘자본주의에 포섭된 식문화’와 ‘공생을 추구하는 식문화’에겐 변종이자 모순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잡지를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채식/환경 잡지인가요?”였고, 그럴 때마다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는 지속가능한 식탁이라는 청사진에는 자기 나름의 지속가능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양태가 차려져 있다. 우리의 핵심은 균형감과 삶이다. 그랬을 때 진짜 미식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에게 매거진 『SUSTAIN-EATS』는 자본주의적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쟁기계이다.

잡지를 만들며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도 대개 그랬다. 종자의 다양성과 토종 보전을 위해 활동하는 분은 엄격한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자급자족에 가까운 식생활을 하다 보니 거의 채식에 가까운 생활을 하신다. 음식물쓰레기 퇴비화를 실천하며 소농과 교류하는 다른 분도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식생활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은 먹기의 범주를 넘어서 종자와 분해의 범주에서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실천하고 있다. 토종씨를 찾아내고 키워 씨받이를 하는 사람은 종자 개량을 통해 생산의 극대화를 노리는 종자회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예견된 종의 멸종을 극복할 희망을 일구고 있고, 퇴비화를 실천하며 분해공동체를 형성한 사람은 자연순환 퇴비를 통해 에너지를 절약하고 음식물쓰레기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아내고 있다. 이들은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면역력이 좋은 종자를 개발한다든지, 도시 주변에 더 많은 음식물처리 시설을 짓지 않는다. 즉 기존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이들의 존재는 기존 식문화를 과감하게 뒤흔든다.

제언

다시 처음의 질문이다. ‘식’이라는 복합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 삶의 일부로 인식해야 할까? 길은 각자의 선택이지만 그 과정을 홀로 걷는 것보다 함께 걷는 것이 덜 외롭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식탁은 어떻게 차려져 있는지 보고, 내 식탁도 꾸며보는 방식으로. 어쨌든 사람은 먹어야 한다. 이왕 먹을 거면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환경과 사회에도 좋은 먹거리여야 하지 않을까?

김정모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는 매거진 ‘Sustain-Eats’ 편집자
다양한 경험과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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