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추방된 곳은 어떻게 변했나?

아이들이 추방된 곳은 어떻게 변했나?

노키즈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욕망은 무엇일까?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원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상 아이들의 모습을 그들이 원하는 형상으로 박제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더 커 보인다. 아이들의 활기, 생명력, 호기심이 추방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사회생태를 만드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장면1.

여자는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하다 면역력이 떨어져 병을 얻었다. 며칠 입원을 하고 약을 장기로 복용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전세 계약이 끝날 때마다 전세금은 연봉만큼 뛰었고, 집값도 덩달아 들썩였다. 회사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어린이집에 늦게까지 남아 있던 아이를 챙겨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은 너무 힘들어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식당으로 갔다.

아이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식탁을 짚고 일어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걸음을 옮겼고, 수저통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수저를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여자는 돌아다니는 아이를 쫓으며 아이의 행동을 제지했다. 수저통으로 향하는 아이의 손을 움켜잡았다. 어서 음식이 나와 이 자리를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주인이 곁눈질을 하며 싫은 내색을 완연하게 내보였다. 남편이 후다닥 밥을 먹고 아이를 데리고 식당을 먼저 나갔다. 여자는 혼자서 남은 밥을 대충 먹고 식당을 빠져 나왔다. 그날 아이와 부부는 환영받지 못했다.

장면2.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자라 서너 살 경이 되었다. 또래에 비해 말이 빨랐고 간혹 문맥에 맞지 않는 단어를 쓸 때가 있었지만 어휘력이 발달했다. 어느 날 부부와 아이는 나들이 후 식당에 들렀다. 식당 종업원은 친절하게 그들을 맞이하였다. 좌석을 지정하고, 서빙을 인원에 맞게 준비한 후 세심하게 그들을 배려해 주문을 받고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조잘조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 궁금하다는 듯 부부에게 물었다. “왜 저 사람은 손님을 이렇게 잘 대접하는 거지요?” 아이는 그날 환영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기다릴 수만 있으면 아이들은 언젠가 자란다. 그런 아이들이 작은 식당에서, 공원에서 환영 받았던 기억은 세상은 어떻게 변화시킬까? 혹시 환대받지 못한 채 쫓겨난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왜 개와 유대인들은 가게에 들어갈 수 없어요?”

전이수 군(12, 동화작가)은 동생 우태의 생일을 맞아 2년 전에 가본 적이 있는 식당에 갔다. 스테이크가 맛있어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태가 어리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났다. 노키즈존이라고 하는데, 이수군과 우태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전이수 군은 인스타그램계정(@jeon2soo)에 그날 있었던 일을 쓰면서 아래와 같이 마무리 했다.

어른들이 조용히 있고 싶고 아이들이 없어야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생각한다.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 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 거니까. 어른들은 잊고 있었나 보다. 어른들도 그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빠에게 물어보던 아들의 대사가 생각난다. “아빠 왜 개와 유대인들은 가게에 들어갈 수 없어요?”

전이수 인스타그램계정(@jeon2soo) 중 우태의 눈물, 2018.11.19.
동화작가 전이수 군의 인스타그램 계정@jeon2soo
동화작가 전이수 군의 인스타그램 계정 @jeon2soo

아이들이 추방된 곳은 어떻게 변했나?

아이들은 뛰고 구르고, 궁금한 것은 손으로, 입으로, 말로, 행동으로 해결하고 싶어 한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예전 할머니들은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건 필시 아픈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빌리면, 아이들이 가만히 있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아픈 사회일지 모른다. 아이가 어른처럼 식당에서 제 자리에 얌전하게 앉아 식사 예절을 지키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써서 말을 조용조용 하고, 행동에 품위가 있기만을 바란다면, 그는 자신에게 더 솔직해져야 한다. 생명력을 가진 아이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박제된 아이들을 원하는 것이라고.

아이들은 경계를 모른다. 놀이터에서 그네 타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아이들은 그네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줄 하나에 두 발을 꼬고 손을 잡고 매달려 타거나, 빙빙 돌려 회전그네를 만들어 논다. 그네를 중심으로 술래잡기를 할 수도 있다. 그네는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경계를 뛰어 넘어선다. 정해진 방법대로 안전하게 타라고 말하는 사람은 주위의 어른들이다. 어른들이 경계를 말해 줌으로써 아이들은 서서히 어른이 된다.

노키즈존이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어른을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그들이 원하는 형상대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읽혔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활기, 생명력, 호기심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 장소에서 지워버리려는 어른의 혐오와 배척이 보였다. 편안한 식사와 조용한 분위기를 위해 아이들을 쫓아낸 다음 그들은 어떻게 될까? 모두가 아는 이야기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동화 『욕심쟁이 거인』1을 다시 상기시켜주고 싶다.

거인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나무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새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다. 거인이 돌아와 무섭게 소리 지르자 아이들은 도망갔다. 거인은 높은 담을 쌓아 올리고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써붙였다. 거인의 정원은 이제 봄이 찾아오지 않았다. 시린 바람이 불고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쳤다.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꽃도 열매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어린이는 내일의 희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지금, 여기 이미 존재합니다.

어린이는 미래를 살 사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어린이를 대할 때는 진지하게, 부드러움과 존경을 담아야 합니다.
그들이 성장해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건 간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모든 어린이의 내면에 있는 ‘미지의 사람’은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언젠가는’ ‘지금이 아닌’
‘내일’의 사람이 아닙니다.2

  1. 오스카 와일드, 『행복한 왕자』 중 <욕심쟁이 거인>, 이지민 옮김, 창비, 2001, 26쪽

  2. 야누슈 코르착, 『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 중 <어린이는 내일의 희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지금, 여기 이미 존재합니다>, 노영희 옮김, 양철북, 2002, 26쪽

나무

숲을 이루고 싶은 나무입니다.
다양한 숲이 많이 생겨, 지구와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평안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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