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농업

저성장 시대의 대안, 사회적 농업 – 사회적농업연구회 발족에 부쳐

‘사회적 농업 육성법안’이 2018년 12월 28일 서삼석 의원 발의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위원회에 제출되어 현재 계류 중이다. 사회적 농업이 사회통합과 치유와 돌봄에 기여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도권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우리는 농업이 사회 전반에 대한 가치와 작동을 바꿀 수 있는 색다른 역할에 더 주목하게 된다. 사회적 농업은 농업의 사회화를 통해서 보다 통섭적이고 다기능적인 주체성 생산의 가능성을 여는 교두보임에 분명하다.

사회적 농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 시대, 지금 여기에서 사회적 농업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토대를 이루는 거대한 판이 바로 농업이자 먹거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분리되어 있으며, 그 영향으로 우리의 마음 역시도 생명과 자연과의 공존과 치유, 돌봄과 멀어져 있다. 이에 따라 농업을 우리의 삶의 일부로 만드는 첫 단추는 바로 사회적 농업이 주장하는 ‘농업의 사회화’에 있다. 우리는 신중하지만 유쾌하게 이 첫 단추를 끼워야 할 것이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현재의 생태계 위기가 농업으로의 전환사회를 요구한다는 점에서의 ‘사회의 농업화’라는 필요조건과 현재의 농업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확산함으로써 풍부하고 다양한 사회생태계를 조성한다는 점에서의 ‘농업의 사회화’라는 충분조건을 분리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농업은 이 두 영역을 통합한 새로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의 농업은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일단 대지를 양육하고 돌보고 살리는 방향으로 향할지, 대지를 쥐어짜고 약탈하는 방향으로 향할지에 대한 갈림길이 있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을 포이에시스(poeisis)의 방법론이라고 하고, 제작(poein)이라고 불린다. 이는 대지를 살림, 돌봄, 보살핌, 섬김, 모심으로 향했던 유기농업을 지칭한다. 이에 비해 후자는 테크네(techne)라는 방법론이고, 관행농업과 첨단농업에 해당한다. 이 두 방법론에 따라 농업의 위치설정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를 대지에 투하하는 관행농이나,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첨단농이 사회통합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농업

지금까지 우리는 흔히 농민이라고 하면 토착성, 연고성, 장소귀속성에 따라 대지에 예속된 사람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순환적 세계관은 곧 토착성에 따라 자유롭지 않는 소농에 대한 개념으로 향한다. 이런 점에서 농민이라는 주체성의 위치에 대해서 새롭게 재규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즉, 오히려 시민(citizen)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의 위상을 갖는 자유인의 위상으로 설정해야만 농업의 사회화과정에서 유리한 배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이라는 주체성은 마을공동체, 도시재생, 푸드플랜(Food Plan), 도시농업 등과 별도의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새롭게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진 자유인으로서 규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장소귀속성이나 토착성에 따라 사유되었던 농민이 이제는 농업의 사회화, 즉 사회적 농업에 따라서 자유인으로서의 색다른 주체성으로 재창안되어야 할 것이다.

농업의 사회화와 동시에 사회의 농업화 역시도 매우 시급한 상황이다. 기후변화, 생물 종 대량멸종, 생태계 위기에 목전에 와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식량위기는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의 삶을 재편할 핵심변수이다. 왜냐하면 유사 이래 우리는 한 번도 흙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에 대한 대안은 단연코 농업이다. 환경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소농의 역할과 위상이 매우 커져가고 있음을 누구나 직감하게 된다.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 녹색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농업화가 가장 큰 숙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위해서는 농업을 정규과목으로 만듦과 동시에 은퇴세대와 시니어들에 대한 농업의 의무교육의 제도화를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50~60대 세대의 의무교육임에 분명하며, 그 내용은 사회적 농업일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농업은 하나의 교두보이다. 농업의 사회화와 사회의 농업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작은 단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농업을 전환사회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기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농업의 대지에 대한 부드러운 양육과 돌봄의 약속에 모두가 더불어 참여할 수 있는 사회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농업의 다기능성을 통해 기능 분화된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오래된 지혜가 소농에 있음은 분명하다. 오늘날 그것은 과거적 지혜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적 지혜이다. 소농은 통합성, 전일성, 다기능성 등을 갖춘 존재이며, 전문가사회인 자본주의 이전에 2만년 동안 인류의 삶에 뿌리내려 있었다. 기능, 역할, 직분에 기반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모든 일을 유연하게 해낼 수 있는 지혜와 정동(affect)을 갖고 있던 존재가 소농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소농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산업화에 따라 소농의 공동체는 기능분화되어 도시사회로 진화하였고, 이에 따라 자원-부-에너지를 도시생태계에 순환시키며 자립적인 토대를 갖게 되었던 자유도시 전통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자유도시의 회복탄력성의 긍정성은 이제 메가시티의 등장으로 인해 획일화되고 동질적이며 관계망이 와해되어 복잡화될수록 원자화되는 방식 즉 개인주의밖에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문명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 농업은 소농이 갖고 있는 통합성과 다기능성을 어떻게 재전유할 수 있을까?

먼저 소농이었던 사람이 도시로 이주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일단 소농으로서의 통합성과 전일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도시에 재코드화(=재의미화)되어 가게점원, 회사원, 학생, 노동자, 배우, 음악가 등으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기능 분화는 결국 다기능성을 획일적인 자동성이나 기능성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시는 이러한 기능분화에 따른 특이점으로서의 무수한 코드화된 주체성을 통해서 무한한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아마 소농이 도시에 들어온다면, 별천지와 같은 자유로운 선택지가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 분화된 도시의 회복탄력성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국면들이 점점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소농의 미분화된 전일성과 도시 시민들의 기능 분화된 회복탄력성 모두의 영역을 동시에 통합해 내는 것이 사회적 농업의 과제이다. 여기서 정동에 기반한 최근의 자본주의의 비물질화 국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등장한다. 직업, 직분, 역할, 기능 등이 하나의 모델로 귀착되는 전문인의 시대가 아니라, 여러 모델과 기능을 넘나들 수 있는 통섭적인 과정의 인간형을 이 시대 역시도 요구한다. 이제 사회적 농업은 여러 모델과 기능을 넘나드는 횡단코드화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때인 것은 분명하다. 소농의 전일성과 도시민의 회복탄력성 모두를 갖춘 앙상블이 바로 사회적 농업이다. 이에 따라 농업의 사회화의 국면은 색다른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이를 테면 농촌인데도 도시 같은 마을이 만들어져 프라이버시와 거리조절이 가능한 사회적 관계가 될 수 있고, 도시임에도 농촌 같은 마을이 만들어져 통섭적인 소농의 주체성으로서의 제작활동을 수행할 국면이 찾아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농업은 진정한 다기능성을 융합해내는 지평을 열 것이다.

커뮤니티도 너무 크다. : 모듈로, 컨비비움으로

우리가 농업의 사회화로서의 사회적 농업을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저성장 시대가 되면서 사회 자체가 대부분 작동하지 못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퇴행적 증후들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탈성장(=역성장)을 통해서 녹색사회로의 전환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도 대두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제 사회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구성하고 창안하고 만들어야 할 결과물임에 분명하다. 비단 최근 공동체 활동가들이 커뮤니티 혹은 공동체가 무기력지층에 마주하게 되는 국면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여기서 사회는 간(間)공동체에 따라 조직된 사회생태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화된 개인이 직면하는 무차별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원자화된 개인과 무차별 사회라는 한쌍은 획일적이고 무정형의 대중사회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간공동체 사회의 구성을 마을공화국이라고 규정하면서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지역주의(=연방주의)의 가능성과 접속하게 된다. 이는 국지적인 영역에 대한 재발견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삶에 대해서 재발견하고 재창안하는 새로운 지평을 의미한다.

그런데 공동체와 커뮤니티 역시도 주체와 대상, 주인공과 관객으로 이분화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관계의 설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을이나 공동체 구성에 적절하다고 얘기되었던 200~1000명 단위의 사람들이 더욱 미세하고 국지적이면서도 유대적인 관계망을 요구하는 현재의 국면에서는 너무 많고 국지성을 재발견하기에 무차별적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우리 사회가 초극미세사회로 접어들면서 관계의 지평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농업의 현장에서 모듈(module)의 설립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3~10명 단위의 기능적으로 완결된 모듈단위는 일종의 결사체이다. 작은 소집단으로서의 모듈은 다기능적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자기완결적이고 자족적인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모듈단위에서 사회적 농업의 기본단위를 찾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생태계 위기가 오더라도 하나의 모듈이 다른 모듈과 작동방식의 차이가 있음으로 인해, 모두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구상도 가능하다.

그러나 최근 사회적 농업 담론이 이제 막 회자되기 시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듈 단위조차도 너무 크다는 지적조차도 생기고 있다. 이에 따라 소농들이 2~3명이서 술자리를 가졌던 공락(共樂)의 단위, 컨비비움(convivium)의 단위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컨비비움은 한국의 유기농협회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던 작은 단위이다. 술자리의 기본 단위라고 생각 되도 좋고, 작은 단위로 느슨한 네트워크이지만 재미를 추구하고 함께 즐겁게 연대하려는 단위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농업은 가장 미세한 단위로서의 컨비비움의 연합체로서의 커뮤니티로, 커뮤니티의 연합체로서의 사회로의 외연과 내포를 가질 것이다. 외연=1은 사회지만, 그 내포에서는 무수한 커뮤니티와 모듈과 컨비비움이 작동하는 형태일 것이다. 소농들의 연합의 방법인 컨비비움은 이제 사회생태계의 특이점이 되고 있는 셈이다. 사회가 온전히 작동하게 되려면 이제 새로운 도전과 실험,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적 농업은 사회통합을 할 수 있을까?

‘사회적 농업’의 쟁점 중 몇 가지만 언급해 보았다. 사회적 농업은 하나의 이미지나 도상(圖像)으로서 먼저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걸 느끼는 순간, 활력과 재미와 흥이 확 느껴지는 개념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우리는 전략적 지도제작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농업의 사회화와 사회의 농업화’라는 이중적 과제를 가진 사회적 농업의 교두보를 통해서 전환사회의 전망을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농업연구회라는 새로운 커뮤니티를 구성하려고 한다. 모듈로 갈지 컨비비움으로 갈지 선택지를 갖고 있는 다기능적인 연구공동체이다. 그러한 제도적 구상과 관계망의 창발을 함께 하는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상상력이 발동하여 비오는 날 저녁 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는 이미지를, 공동체가 흥이 나서 이야기판을 벌일 이미지를, 서로의 관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친구와 벗의 이미지를 사회적 농업연구회가 가졌으면 좋겠다. 컨비비움에서 모듈로 그리고 커뮤니티로 다시 사회로 나아가는 사회적 농업의 구상은 결국 사회통합이 미세한 단위에서의 자족성과 완결성, 다기능성에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글은 사회적 농업연구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 사회적 농업연구회 e-mail: lama0@hanmail.net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