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정발산

사람들은 이 산을 아낌없이 오르고 내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내게는 끊임없이 표현할 거리를 주는, 언제나 마음 좋은 벗, 노래하고 싶은 정발산이다. 나도 이곳에 마음 거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정발산은 안다. 초등학생 때 소풍 가서 수건 돌리던 날을, 첫사랑을 하며 몸부림치고 달려나갔던 날을, 록 음악 이야기하며 친구와 다닌 날을, 대학입시에 서러워 울던 날, 고독을 삼키던 날, 목련나무 아래서 몇 자 적어보던 날, 은사님 운구하고 돌아왔던 날, 잠잠히 걸어본 날 모두 기억할 거다.

서쪽에 정발산역, 정발산역 내려가는 길에 전통정원과 고양아람누리, 동쪽에 국립암센터, 암센터로 내려가는 길에 족구장과 배드민턴장과 축구장, 동북 면 안쪽으로는 생태학습원, 넝쿨식물터널 지나가면 마두도서관, 정상에 전망대 평심루, 중턱에 마련된 운동기구들, 서북 면 유아숲체험원 등이 있는 정발산(87.1m)은 이 동네의 뒷산이다.

언제나 오를 수 있는 뒷산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서울에서 시간 대부분을 보내며 자주 찾진 못하지만 주택가 너머 언제나처럼 있는 정발산을 생각하고 안심하곤 한다. 일산살이 22년, 정발산이 준 기억 몇을 낱개 단편으로 써보고 그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 본다.

꾀꼬리를 찾으러 다닌 날

여름철새인 꾀꼬리를 보고 싶어 정발산에서 오후를 보낸 날이 있었다. 조용필 선생님의 곡 ‘못 찾겠다 꾀꼬리’를 흥얼거리며 쌍안경과 카메라를 매고 진입한 정발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꾀꼬리의 아름다운 “오리올리올”1 울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청각을 곤두세우고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나무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며 이리저리 찾았지만 그는 영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분홍빛 부리에 황금빛의 그를 한 번 본다면 금방 눈으로 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름철 무성한 활엽수림 상층부에서 노니는 꾀꼬리를 숲속에서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가지와 가지 잎들과 잎들 사이로 스치듯 그의 모습을 본 게 전부였지만 명랑하고 예쁜 소리 마음에 안고 한껏 청아한 시간이었다. 이날의 경험과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책을 만들었다. 그림의 제목은 ‘못 찾겠다 꾀꼬리’라 지었고 그림책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라 지었다. 아래에 그림 사진을, 그림책은 링크로써 첨부한다.

그림 ‘못 찾겠다 꾀꼬리’ 한승욱 Oil on canvas 410x273mm 2023
그림책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 출처 : 한승욱 네이버 블로그

흰뺨검둥오리의 포식과 조심조심 친구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망원렌즈를 구입해 성능을 볼 겸 정발산 유아숲체험원 작은 연못을 갔었다. 흰뺨검둥오리 한 쌍이 느긋하게 연못가를 돌고 있었다. 삼각대를 펴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을 때 까치는 주의를 주듯 “까악까악” 울어댔는데 촬영하면서 섬뜩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흰뺨검둥오리는 먹이활동을 하는지 물속으로 거듭 고개를 담그더니 이내 개구리2 한 마리를 물었다. 혼을 빼놓으려는 듯 부리를 앙다물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개구리는 사투를 벌였지만 곧 꿀꺽 삼켜졌다. 목구멍을 타고 내부로 흘러 들어가는 개구리를 흰뺨검둥오리의 살갗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간혹 울어내던 꿩도 조심조심 다니는 순간이었다.

이날 촬영한 영상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영상을 볼 때면 먹는다는 것의 숭고와 감사가 아닌 무서움을 느끼곤 한다. 생과 생이 서로를 뜯고 먹고 먹히고 죽는다. 식食 앞에서 겸손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YouTube 영상 ‘흰뺨검둥오리의 포식과 그의 조심조심 친구들’ 갈무리.

소쩍새 찾아다닌 날

5월 소쩍새를 보고 싶어 낮과 밤, 새벽 정발산을 다녔었다. 소쩍새는 해마다 울음소리로 풍년을 점쳐준다고 한다. 그가 “소쩍소쩍” 울면 다음 해 흉년이 들고 “솟쩍다솟쩍다” 울면 솥이 작다는 의미로 풍년을 알리는 거라 한다. 내게도 풍년이 올까, 지점토로 소쩍새를 빚어보기도 하고 틈날 때마다 정발산을 갔다.

소쩍새 울음소리는 정발산 북쪽 일대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지만 “소쩍소쩍”과 “솟쩍다솟쩍다” 소리를 판별하긴 어려웠다. 이른 아침이면 볼까, 낮이면 혹 잠자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밤이라도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장노출 기법으로 사진 촬영하면 보일까 했지만, 우연에 기대서는 쉽게 발견할 리 없었다. 민감할 그의 터전에서 계속 기척을 낼 수는 없는 일이었고 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시각적 즐거움이 아니더라도 탐조의 묘미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웅크려 그의 음성을 녹음하던 밤이 좋았고 호랑지빠귀 귀신같은 소리도 좋았다. 새벽을 먼저 알고 뛰어나가던 청설모, 이 나무 저 나무 날아다니며 노래하는 새들, 그러며 온몸으로 깨어나는 숲의 신비가 좋았다.

정발산에서 아침을 맞고 돌아온 날 일기처럼 영상을 만들었는데 아래 링크로 접속하면 볼 수 있다. 봄이 목련 꽃잎을 거두어 갈 때면 그의 목소리 듣기를 기다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와 주면 고마워 돌아가는 길이라도 소리가 들리는 근처로 방향 틀어 지나갈 거다.

YouTube 영상 ‘소쩍새를 생각하며’ 갈무리.

친구와 벚나무와 참새의 위안

사랑하는 정발산. 사진제공: 한승욱

또 한 번 사랑에 실패하고 나니 4월의 시작이었고 벚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나의 탐조 친구이자 초등학교부터 동창인 용재는 바쁜 일정 중 시간을 같이 보내주었는데 먹기 싫다는 내게 샌드위치를 들려주었고 함께 정발산으로 꽃구경을 갔다. 용재와 벚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관목 속에서 관목과 관목 사이에서 관목 앞 계단에서 와글와글하고 재잘대며 다니는 참새들을 바라보았다. 말 몇 마디 없이도 충분한 위로를 받은 한낮이었다.

그날 후 갖가지 일에 어지러울 때면 정발산에 가 물끄러미 참새와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같은 작은 새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쭁쭁거리며 다니는 수다스런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낫지 않을 마음의 일은 없다.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참새, 직박구리, 까치, 청딱따구리, 아물쇠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 흰뺨검둥오리, 꿩, 멧비둘기, 큰산개구리(추정), 청설모, 소리로만 확인한 소쩍새와 검은등뻐꾸기와 호랑지빠귀, 은행나무, 목련, 벚나무, 밤나무, 철쭉, 개나리, 상공을 지나던 말똥가리 서너 마리, 정발산엔 몰라서 보지 못한 훨씬 더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이용객이 많은 작은 숲에도 계절마다 돌아오는 새들이 있고 사계절 터전 삼아 살아가는 생물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 산을 아낌없이 오르고 내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내게는 끊임없이 표현할 거리를 주는, 언제나 마음 좋은 벗, 노래하고 싶은 정발산이다. 나도 이곳에 마음 거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1. 꾀꼬리의 영문명은 Chinese oriole인데 나는 꾀꼬리 울음소리를 “오리올리올”처럼 듣곧 한다.

  2. 큰산개구리로 추정

한승욱

회화를 중심으로 글쓰기, 사진, 영상, 도자, 등을 다루며 창작하고 있습니다. 예술강사 활동을 했고 동료 예술가들과 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환경 활동을 하고, 탐조를 즐깁니다.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간사로 일하며 창작과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댓글 5

  1. 저도 근처에 살아서 이런저런 일로 정발산엘 종종 갔더랬죠.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도 우주가 있군요~

  2.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정발산과 생태계 의 느낌이 글과 사진으로 전해지네요~
    제가 오늘 읽은 부분인데, 핸리 데이빗 소로의 에서의 ‘동물 이웃들’ 챕터 느낌이 나네요 ㅎㅎㅎ

  3. 점점이 녹빛에 배어가는 마음을 작가님의 경험담으로부터 떠올립니다. 나무의 정수리를 올려다보지만 작은 것들을 위해 보폭을 헤아리는 사람의 글은 행간이 넓다고 느꼈습니다. 세상이 만발하고 쪽잎을 떨어트리는 시기에도 제 봉우리를 닫아둔 관목이 좋았습니다. 참새 떼의 그것처럼요. 그런 위안은 사람의 것으로 번역될 수 없는 것임을 제가 오래 기억하길 바랍니다. 다리가 되어주는 글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4. 정발산이라는 마음 거처가 있어 얼마나 든든할까… 가슴앓이 나눌 동무들도 그 안에 다 있으니 안심됩니다. 작가님 짝은 정발산에서 꼭 찾아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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