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파 현실파 넘어 신샘파 -『근본파와 현실파 넘어서기』를 읽고

신승철 선생님의 첫 번째 유작이 정유진, 최소연 두 필자를 만나 『근본파와 현실파 넘어서기』 책으로 출간됐다. 책은 “새로운 녹색 운동을 위하여”라는 멋진 부제를 걸고, 근본과 현실의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녹색 운동의 방향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책에 대한 서평과 함께, 3월 8일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열린 출판기념 북토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함께 적어보았다.

꿈과 실마리

며칠 전 꾼 꿈 이야기 하나로 말문을 열어보려 한다. 테러가 났고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다. 나는 협상가였다. 무장을 한 테러 진압 부대가 주변에 대기하고 있고, 나는 협상장에 들어갔다. 족히 열 명은 되는 이들이 앉아있었고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손짓하면 진압 부대가 들어와 이들을 제압하는 상황, 나에게는 협상을 하는 임무와 협상하는 척 시간 끄는 연기를 하는 임무가 같이 주어져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적대적인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 날 선 목소리와 함께. 그런데 듣다 보니 이들이 이 일을 벌인 이유가 산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수많은 산들이 이미 파헤쳐진 끝에 황야가 되었고, 이들이 살던 터전은 온데간데없어졌다고 한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산에 모든 개발과 침입을 당장 물리고 해당 지역을 불가침으로 보호하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의아하다가, 아 그랬구나로, 하 그렇구나로 점점 마음이 복잡해졌다.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 비극을 더 겪지 않기 위해서 비극을 만들었다. 헌데 무전 인이어로 들리는 높은 분들과 본부는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개의치 않고 진압할 준비만을 서두르고 있었다. 갈등했다.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나. 일촉즉발의 상황, 입을 열었다. 요구 조건을 수용하겠습니다. 사람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적 협상에 임할 것을 약속해주세요. 인이어로 너 뭐 하는 짓이야 하고 고함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고 큰소리를 냈다. 협상은 사람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그깟 산 하나 보호지구 정하는 게 사람들 생명 보호보다 어렵습니까? 예상 밖의 언성에 높은 분들이 멈칫 당황하고, 앉아있던 이들이 얘는 왜 갑자기 우리 편을 드나 믿어도 되나 하는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기세를 몰아 말했다. 당장 사람들 안전을 보장하고 산지를 잘 보전하겠다고 약속하세요. 놀란 이들이 어, 어 그러지요 하고 주춤주춤 대답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적이 흘렀던가. 누군가 박수를 쳤던가. 나는 누군가 말했던 평화는 도둑같이 찾아온다는 말을 떠올렸다.

꿈에서 나타난 부조화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요새 주변에서 자주 부조화가 눈에 띈다. 부조리는 원체 많아 왔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부조화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기후·생태·불평등·전쟁 등 어미에 위기가 붙는 말들은 우후죽순 늘어만 가는데 위기들을 풀어가는 데는 철저하게 실패하는 것 같다. 이대로라면 기후위기가 갈등 관리에 실패해 전쟁 및 사회 붕괴로 이어진다는 다소 비관적인 이론과 전망이 가장 현실적인 경로가 아닐까. 꿈에서 본 이들은 어쩌면 에코파시스트라고 분류될 텐데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그들의 마음도 낯설지 않았다. 부조리가 부조화로 이어져 다시 부조리를 낳는 그 비극의 악순환. 우리가 마주친 위기의 순환고리는 이런 모양새를 띄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악순환을 끊어낼 지혜의 열쇠를 찾아다니고 있다.

신승철·정유진·최소연 저, 『근본파와 현실파 넘어서기 – 새로운 녹색 운동을 위하여』, (알렙, 2024)

아마도 저번 총선 무렵, 신승철 선생님(이하 다정하게 ‘신샘’)이 근본파와 현실파에 대해서 책을 써보자고 말씀을 건네주셨다. 그때는 무슨 의도인지 영문을 몰랐다. 막 시작한 일이 가빠서 아무래도 무리라고 답을 드렸지만 “근본파와 현실파”라는 자극적인 문장은 뇌리에 깊게 남았다. 그리고 2024년, 다시 선거가 다가오는 총체적 난국의 이 시기에, 생각하면 우리는 근본과 현실 사이에서 여러 고초를 치르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누군가 기후판에서 동고동락한 몇 년간 너는 뭐가 제일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단연 나는 이 근본과 현실의 부조화를 말할 것 같다. 한국의 녹색계는 몇 년 사이 생태계 전체가 급성장을 겪는 과정에서 성장의 그림자를 마주한 것 같다. 전략과 위치, 노선, 입장, 배치 등 다양한 차이가 생겨나고 있다. 그 사이에서 우리의 기후(atmosphere)는 괜찮은 걸까. 구분과 분리, 대립과 갈등, 쪼개지고 갈라지고, 미움과 적대의 정동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기분 탓일까.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 사람들은 왜 파를 나눌까. 이 갈등은 우리를 어디에 데려다 놓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지친 지도, 체한 지도, 오래된 것 같다. 해묵은 갈등을 풀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 평소처럼 고민을 상담할 신샘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첫 번째 유작인 『근본파와 현실파 넘어서기 – 새로운 녹색 운동을 위하여』1가 정유진, 최소연 님의 노고와 함께 세상에 나왔다. 나는 우리가 맞닥뜨린 지점을 넘어갈 실마리를 이 책에서, 신샘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근본파와 현실파를 넘어서

근본파와 현실파는 분명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모든 세상에 다 있다. 작년 6월 세계녹색당총회(Global Greens Congress)를 준비하면서 스웨덴 말뫼의 시의원 친구 울슨이 물었다. 한국 녹색당에도 딥 그린(Deep Green)과 라이트 그린(Light Green)이 나뉘어 있어? 그제야 아하 싶었다. 이 주제는 아주 오래된 뜨거운 감자였구나!

녹색, 그러니까 생태주의는 오래전부터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 왔다. 서구권에서 시작된 논의를 따라가 보자. 녹색은 녹색이 파괴될 때 나타난다.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전쟁, 핵, 화석연료, 도시화, 동물 등과 관련한 문제들이 대두되며 환경, 생태, 녹색 운동과 사상이 나타났다. 이를 아르네 네스(Arne Naess)는 심층생태주의와 얕은 생태주의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환경주의와 사회생태주의로 구분했다. “이렇게 생태주의는 ‘깊은 것’과 ‘얕은 것’, 혹은 ‘옅은 것’과 ‘짙은 것’으로 구분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78p).” 어떻게 보면 당연한 구분이다. 근본적이고 급진적이며 원칙적인 흐름과 현실적이고 제도(체계)적이며 실질적인 흐름은 세상만사에 모두 있다. 다시 세계녹색당총회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재미난 이야기 하나는 50여 개의 전체 세션들이 탈성장, 탈식민주의, 활동주의와 저항운동, 핵폐기물 등 근본에 방점이 있는 세션과 녹색 경제, 도시의 생물다양성, 선거제도 개혁 등 현실에 방점이 찍힌 세션이 반반씩 있는 구도를 띄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무 자르듯이 딱 나누어지지는 않지만, 많은 이야기와 활동이 근본과 현실이라는 축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어떤 것이 맞느냐는 질문이 던져질 때 시작된다.

기후위기 시대에 걸맞을 정도의 급진적 혁명인가, 현재 기성 체제에 안주하는 현실적인 전환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는 가장 급진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질문을 달리 해보자. 너무 멀리 나가서 사회에게 결국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급진적 혁명인가, 현실에 발을 딛고 우리의 체계를 한 걸음씩 바꾸어나갈 현실적 전환인가. 이에 대해서는 절실하게 무언가를 바꾸어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현실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답하겠다. 그렇다면 둘 중 뭐가 정답일까. 문제는 던져진 질문 설정 자체가 만들어낸 구도에 있다.

이처럼 이항 대립적인 설정 자체는 생태주의의 성격을 이접(disjunction)에 따라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배리의 논리로 이끈다. 동시에 이처럼 현실에서의 n차원의 다양체에 직면해 있는 생태주의가 아닌 이분법으로 단순화된 생태주의는 복잡한 사회 현실을 설명해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행되기 어려운 극도로 추상화된 이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파와 현실파 사이에는 n분절의 다양한 생태주의가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78p).”

기후위기 시대에 걸맞을 정도의 급진적 혁명인가, 현재 기성 체제에 안주하는 현실적인 전환인가. 문제는 던져진 질문 설정 자체가 만들어낸 구도에 있다. 사진 출처 : Markus Spiske

이것이냐 또는 저것이냐는 질문 자체가 오류 혹은 위험성을 품고 있다. “-은 –이다”로 쉽사리 나누는 말과 다르게, 현실은 수많은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근본파와 현실파라는 개념 자체도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겠다. 과연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100% 근본파와 100% 현실파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인 이상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사람 셋 이상 모인 모임과 조직에는 불협화음과 갈등이 끊이질 않는 걸까. “무엇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며 논쟁은 시작된다. 우리는 어떤 MBTI가 맞냐고 묻거나 논쟁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질문이 시작되는 것은 오직 특정 주제에서만 그렇다. 무언가를 바꾸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리에게서 그 질문은 너무 빈번하게 던져진다. 한국 시민사회와 진보정당의 역사는 분리와 불화가 가득한 부조화의 역사가 아닐까. 노선과 전략으로 갈리거나, 정파로 갈라지거나, 감정으로 갈라서거나, 제각각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혹은 차이를 인정할 수 없어서 나뉘고 만다. 아쉽게도 성숙하게 차이를 인정하고 각각에 집중하기 위해 나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그 결과는 다소 씁쓸하다. 책에서 진단하듯이 “지난 40여 년 동안 전 세계 곳곳에서 녹색 정치는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배타적인 양자택일적 선택지로 갈라져 그 이상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는 상황(12p)”인 듯하다.

현실은 복잡계이기 때문에, 이항 대립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설명력을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임의로 나누어본다면 원칙에 충실한 근본파와 현실 논리에 충실한 현실파로 나누어볼 수 있겠지만, 그 사이에는 n분절의 다양한 과정형적이고 진행형적인 다채로운 재특이화 과정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현실에 유능한 운동이 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사항이며, 굳이 둘을 갈라치기 해서 이념적으로 투쟁과 반목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80p).”

함석헌 선생님 말씀 중에 새기고 있는 말이 있다.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은 너·나를 갈라 생각하는 데 있다.”2 우리는 습관적으로 너와 나를, 그들과 우리를 나눈다. 이 분별의 마음이 무엇을 위한 나눔인지 생각해 본다. 차이의 발견이 연대와 시너지를 위한 것인가, 적대와 갈라섬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근본과 현실 사이에 과정형적이고 진행형적인 녹색 정치의 영역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근본파와 현실파가 서로 이념적으로 완결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늘 배치의 재배치 과정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행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114p).”

분명히 서 있는 곳에 따라서 풍경이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근본과 현실의 차이는 실은 이념과 접근법과 생각과 방향의 차이보다, 어느 위치에서 일을 하냐의 차이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녹색당을 예로 살펴볼 때 의회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이와 현장에서 운동하는 이들의 분명 온도 차가 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무수한 태도가 있다. 세계녹색당총회에서 나는 그것이 조화를 이루는 광경을 여럿 본 것 같다. 한 예로 호주녹색당에서는 의회 내 직을 맡았던 그룹과 당내 당(Party in Party)으로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 선주민 그룹이 함께 왔었다. 이들은 차이와 동시에 공존이, 어떤 존중이 있었다. 다르지만 함께하는 장면을 보면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분법에서 삼분법으로, 나아가 N분법으로

두 개로 가르는 법은 효과적이지만 위험하다. 우리와 그들의 구분은 대립 항을 만들어 적대의 구도를 낳기가 쉽다. 한국전쟁 이후에 남북으로 나뉘어 몇십 년간 증오의 말들을 주고받은 분단의 문법이나, 공룡 같은 거대양당이 독점해 적대적 공존을 하고 있는 한국 정치의 문법이 대표적이고, 사회운동 내에서 찾을 수 있는 사례는 무수히 많겠다. 차이가 다름이 아니라 그름으로 인식될 때 크고 작음의 차이만 있을 뿐 전쟁이 시작된다. 우리가 오늘날 넘어가야 하는 장벽은 비단 핵, 석탄발전소나 거대 양당뿐 아니라, 이 정체된 시스템을 만든 문법과 이야기 구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흑백논리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한 예로 “회색지대의 정치학”처럼 흑과 백으로 하나의 단일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토양을 만드는 정치가 있을 수 있다.3

나는 삼분법을 제안하고 싶다. 다리가 두 개인 의자는 없다. 삼각대처럼 다리가 세 개부터야 비로소 설 수 있다. 2차원의 평면이 3차원의 입체로 바뀌면서, 양적 증가뿐 아니라 질적 전환이 이뤄진다. 세 가지는 두 가지의 한계를 넘어간다. 책에서 제안하는 삼분법은 펠릭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에 기초해 사회생태학, 자연생태학, 마음생태학으로 생태를 분류하고 있다. 철학자 신승철은 이어서 이 세 가지 생태학이 각기 사회생태주의, 환경관리주의, 심층생태주의에 조응한다고 말한다.

“‘자연 생태라고 언급되었던 환경관리주의는 환경 보전과 보존, 기업에 의한 환경오염에 대한 견제와 감시 등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사회 생태라고 언급되었던 사회생태주의는 사회 변혁과 과학기술의 재전유를 추구하는 움직임이다. ‘마음 생태라고 언급되었던 근본생태주의는 생명 파괴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삶의 변화를 추구하며 생태 영성에 따른 대안적 삶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은 주체성의 문제, 사회적 관계의 문제,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문제 등을 각각 의미한다.”4

한국의 녹색계를 이 세 가지 생태학의 렌즈로 살펴볼 때 각기 기후정의, 녹색전환, 생명평화라는 세 가지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본다. 이 세 축은 저마다의 특성을 지닌다. 기후정의의 축은 사회 변혁을 위한 운동론으로서, 실천적인 전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녹색전환의 축은 사상 및 명분을 강조하지 않고 폭넓게 다양한 전환 경로를 인정하며, 실질적인 전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생태문명의 축은 내적 혹은 공동체적 변화에 역점을 두며, 근본적인 전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의할 것은 있다. 이 삼분법의 목적은 구분이지 분리가 아니다. 세 가지 녹색을 분할하는 경계선이 아니다. 우리는 세 가지 녹색의 다양한 배치와 전략을 살핌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지 살필 수 있다.

이는 최근 탈성장 운동에서 제시하는 전략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정치생태학자이자 생태경제학자 요르고르 칼리스와 자크모 달리사는 탈성장 정치를 실현하는 접근으로 에릭 올린 라이트의 모델에 근거해 시스템 전환에 필요한 세 가지 논리와 비전―파열, 틈새, 공생―을 설명한다.

파열 전략은 현존하는 국가기구 해체, 새로운 해방적 기구의 구축을 목표로 국가에 대해 정면 공격하는 것이다. 이는 혁명가들의 논리다. 틈새 전략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크랙 내에서 수평주의적 대안들을 증진시키고 국가의 외부에서 새로운 크랙들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전략은 시민사회 영역 내에서 자율 경영되는 평행적 시스템을 만든다는 아나키스트의 전략과 나란히 한다. 공생전략은, 지배적인 정치 경제적 힘과의 타협에 기초한 변환이라는 공진화 경로를 비전으로 한다. 이 접근은 보다 개혁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5

풀이하면 이 세 가지 접근법이 함께 갈 때 큰 변화를 위한 시너지가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전환은 의회, 광장, 집 혹은 절간과 교회에서 모두 이뤄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맞닥뜨린 정체의 정체는 한반도처럼 분단된 배치가 만들어낸 긴장이 아닐까. 배치가 달라지며 여러 전략의 공존이 이뤄지면, 신샘의 표현 따라 새로운 ‘주체성 생산’이, 전환의 활력과 정동이 생겨날 수 있다.

이 책은 세 가지 생태학을 기초로 다양한 배치를 선보이지만,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를 통해 촉발되는 n가지의 가능성이다. 사진 출처 : geralt

책은 세 가지 생태학을 기초로 다양한 배치를 선보이지만,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를 통해 촉발되는 n가지의 가능성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근본파냐 현실파냐의 양자택일 선택지를 넘어서, 생태사회주의냐 환경주의자냐 심층생태주의자냐를 넘어서, 자기만의 파를 만들고 내걸 수 있다. 나는 신샘파가 되려고 한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으로 신샘파. 물론 어떤 파를 걸어도 상관없다. 지혜파가 되든, 버섯파가 되든, 대파가 되든, 쪽파가 되든, 그건 모두의 자유다. 다만 이 파냐, 저 파냐의 오래되고 단순한 구분은 넘어갔으면 좋겠다. 수많은 n개의 파들이 우후죽순 나타나며 다르지만 모이면서 더 넓고 깊은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우리인가? 근본파도 현실파도, 세 가지 생태도 모두 우리인가? 답도 하나다. 한살림의 ‘한’은 ‘하나이다’와 ‘크다’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차이를 인정한 하나일 때 비로소 커질 수 있다. 커진다는 것은 성장만을 뜻하지 않고, 더욱 넓고, 깊고, 높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겠다. 건강한 생태계는 높은 생물다양성으로 구성되듯이, 수많은 차이로 이루어진 다양성은 우리를 살릴 것이다. 미증유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다양성의 전환을 만들어낼지가 어려운 희망이겠다.

덧붙이며

신승철 선생님은 녹색당 강령 전문의 초안을 함께 쓰셨다고 한다. 녹색당 강령의 전문은 떡갈나무 혁명과 같이 아리따운 말들로 그득해 10년이 넘도록 당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10년을 지켜보면서, 신샘이 지금의 녹색당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 이 책에 담겨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은 한국에서의 녹색당이 근본파와 현실파의 대립이라는 각국의 역사적인 흐름을 넘어서 이미 n분절의 생태주의, 스펙트럼으로서의 생태주의, 과정형적이고 진행형적인 재특이화 과정으로서의 생태주의, 원칙에는 철저하지만 동시에 현실에도 유능하기 위한 여러 결의와 실천 방안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강령 전문에 담았다는 것이다. (중략) (한국녹색당은) 근본파와 현실파의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 녹색 정치의 한 모습을, 아직은 씨앗의 수준이나 더 다양하고 포괄적이며 급진적인 형태로 나아갈 잠재력의 일면을 드러낸다. (중략) 한국에서의 녹색당은 근본생태주의, 환경관리주의, 사회생태주의의 삼분할에 따라 균형 잡히고 역동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93, 94, 219p)”

한 명의 후학으로 선거의 계절을 나면서 귀한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뜻 귀하게 받아서 우리를 살리고 돌보고 지키고 싶다.


  1. 신승철·정유진·최소연, 2024, 『근본파와 현실파 넘어서기 – 새로운 녹색 운동을 위하여』, 도서출판 알렙

  2. 함석헌, 2016(1961), 인간혁명, 한길사

  3. 현우식, 2024, “[회색지대의 정치학] ① 제3지대가 아니라 회색지대를 구축하자”, 생태적지혜연구소 미디어

  4. 신승철. 2011. “아, 지금이야말로 녹색당이 필요한 때다!”. 프레시안.

  5. 요르고스 칼리스·자크로 달리사, 2020, 「탈성장과 국가(Degrowth and the state)」, Ecological Economics 169

웹진 《생태적 지혜》는 혐오와 배제를 제외한 보다 다양한 관점을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본지에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 정책의 내용을 언급하는 글이 실린다면, 그것은 본지가 제시하고자 하는 다양성의 일부일 뿐이며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전체 조합원들의 합의에 의한 단일한 정치적 노선은 있을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장윤석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