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를 넘어, 인간을 넘어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장 자크 루소가 말했듯이, 선거는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는 제도일까? 과연 현재의 투표 방식으로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민주주의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대의제 정당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 지구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1. 대의제의 비민주적 속성1

근대 이후, 대의제, 다당제, 선거 등의 절차적‧형식적인 것들이 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로젠베르크에 의하면, 본래 폭력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왔다가, 1850년에서 1880년 사이 민주주의 개념이 오늘날과 유사한 의미로 변화했다(Rosenberg 1965). 예를 들면,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1권 1835년, 2권 1840년)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묘사한 반면, 1848년 9월 12일 제헌의회에서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립시켰다(Sartori 1987). 이렇게 민주주의의 의미가 변화된 이유 중 하나는 1848년 사회주의 혁명 때문이다. 사회주의에 직면하여 지배계급은 보다 많은 사회세력들을 자신의 편에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에 하층민들이 좋아할 만한 민주주의 개념을 자신의 이념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

서구 역사에서 대의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한 내지 차단하는 기능을 한 것이다. 사진출처 : wikimedia

그러나 본래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가진 민주주의를 그 자체 그대로 받아들 수는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민주주의 개념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하면,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는 ‘다수자의 지배’이지만 그것은 ‘모두의 지배’로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 ‘모두’는 ‘교육받은 소수’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교육받은 소수’를 찾기 위해 사람들 모두 시험을 보게 하기 어려우므로 ‘재산’으로 그 자격을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Mill 1951). 그렇게 구성된 대의제는 위험한 민주주의의 효과적인 안전장치로 기능해야 하는 것이었다. 즉 서구 역사에서 대의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한 내지 차단하는 기능을 한 것이다.

대의제, 공화제는 민주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인식되었다. 미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종종 대의제와 민주제를 대비시켰다. 메디슨은, “소수의 시민들이 모여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고대 도시 국가의 ‘민주정’과, 대표성에 기초한 근대의 ‘공화정’을 대립시켰다. 민주정과 비교했을 때 근대 공화정의 진정한 특성은 “집단으로서의 인민의 참여가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가 커지면서 시민들을 한데 모으기 어려워 기술적인 이유로 대의제가 필요해졌다고 본 것이 아니었다. 즉 그는 대의제가 고대 민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보다 ‘우수한 정치 체제’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대의제를 통해 “선택된 시민집단”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 대중의 견해가 정제되는 효과를 가진다고 보았다(Manin 1997). 서구 대의제의 역사를 보건대 선거구 조정 등 각종 수단을 통해 하층민이 대표되지 못하도록 한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만일 모두에게 평등한 일인일표제가 실현된다면, 사회 내 다수를 차지하는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그릇된 판단과 이기적 욕망을 대변하는 이들에게 표를 몰아주어, 대의제는 이들의 이익만을 실현시킬 ‘계급입법’을 실현시키는 장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밀은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복수의 투표권을 주자고 주장한다. 무지한 사람의 한 표와 자격을 갖춘 사람의 한 표는 동등할 수 없으므로 후자에게 한 표 이상의 권리를 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막을 안정장치는 계속된다. 복수투표제 등의 방식으로 다수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구성된 의회라 하더라도 혹여 하층민이 다수가 될까봐 그는 양원제를 제안한다. 즉 보다 귀족적인 상원이, 민주적인 하원을 통제하도록 한 것이다. 그 다음의 장치는 의회의 목소리가 강화되지 않도록 전문성을 갖춘 관료에게 권한을 많이 주는 것이다. 분쟁이 있을 시 최종 심판을 내리는 사법부는 대체로 기득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마지막 안전장치의 소임을 다한다. 이렇듯 민주주의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삼권분립’은, 결국 의회, 그 중에서도 민주적인 하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도록 이중(관료), 삼중(사법부)으로 민주주의를 견제하는 장치로 볼 수도 있다.

2. 정당정치의 한계와 대안2

현대에 들어와 시민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내세우는 것은 정당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민주적인 정치란 정당정치라고 우리 모두 믿고 있다. 대중 정당은 19세기 후반 선거권의 확대, 투표 제도의 변화와 함께 등장했다. 본래 대의 정부는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확립되었고 정당과 같은 파당은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19세기 후반 유권자들의 의견 표출을 조직화하는 정당이 대의 정부의 구성 요소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정당 등장 이전에 유권자들은 대표에게 지시할 수 없었고 선거 공약도 지켜지지 않기 일쑤였지만 정당은 ‘정강’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게 된다. 또한 정강은 선거 경쟁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제 대표는 재능과 부를 가진 엘리트가 아니라 정강, 즉 어떤 주장과 운동에 헌신하는 보통의 시민들이 되었다. 이로써 대표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즉 이제 ‘대표성’이 아니라 ‘동일성’으로, 또한 민중 통치로 나아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엘리트는 사라지지 않았고 단지 그 종류만 달라졌다. 지역적 지위와 사회적 유명세가 아니라 행동주의와 조직 기술을 가진 엘리트가 과거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마넹에 의하면, 정당민주주의는 활동가와 정당 관료의 통치다(Manin 1997).

정당의 등장 이후, 인물이 아닌,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것이 선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되면서 투표는 사회적 정체성의 문제가 되었으며, 이는 정당이 사회적 균열을 통해서만 재집권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사회 내 구성원의 의견 간에 별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차이를 만들고 균열을 일으켜야, 즉 적을 만들어야, 정당이 집권하기 유리해지는 것이다. 이렇듯 정당은 지속적 갈등을 통해 표를 자신에게 끌어와야 하는 속성을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정당들이 서로 상대를 헐뜯으며 사회 구성원을 편 가르는 이유다. 마넹에 따르면, 더 큰 문제는 ‘전체주의화’의 위험이다(Manin 1997). 이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그 정당에 자신을 완전히 위탁하며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이후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문화적 배경과 무관하게, 또한 매번 다르게 투표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정당이나 정강이 아닌, 인물을 보고 투표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마넹에 의하면, 이는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해 유권자가 후보를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정치적 활동가와 정당 당원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이제 “의사소통에 능숙한 새로운 엘리트들이 정치 활동가와 정당 관료를 대체”한 ‘청중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가 등장했으며, 마넹은 이를 ‘미디어 전문가의 통치’라고 불렀다(Manin 1997). 우리의 경우에도 미디어에 많이 나와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인물에 관심이 집중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정강을 대신해서 인물이 갖는 개성의 역할이 커졌다. 더구나 사회 환경이 계속 바뀌어 예측이 어려워지면서 정당이 구체적 공약을 제시하기 곤란해졌기 때문에 정강은 더욱 비실제적이 되었다. 이는 결국 한 인물의 자유재량권을 더욱 중시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초기 대의제의 특징인 ‘개인적 신뢰’가 다시 대두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표는 시민과의 ‘동일성’(정당정치에서 보여진)에서 다시금 ‘대표성’ 즉 우월성의 특징을 갖게 된다.

만일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의 부동층은 “정보에 어둡고,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학력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었던 반면, 현대의 부동층은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 관심이 많고,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마넹은, 과거에 유권자들은 한정된 정보 원천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존 의견을 지속적으로 강화시켜 왔는데 현대에 들어와 다양하고 비교적 중립적인 미디어로 인해 유권자들이 달라졌다고 보았다(Manin 1997). 그러나 오늘날의 미디어 현실은 다시금 기존 의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 양극화된 정치 상황과 더불어, 새로운 미디어인 유튜브 등 SNS의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맞춤형’ 정보는, 다시금 개인들 각각이 본래 갖고 있던 의견을 더욱 강화시키고 다른 의견은 돌아보지 않게 만들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정보들은 계속 새롭게, 빠르게 쏟아져 나오며, 조회수 증가를 위해 더 강하고 자극적이며 상호 혐오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내 적대감을 더 증폭시킨다.

정당정치를 통해 유권자의 의사를 비교적 고르게 또한 민주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방식은 비례투표제일 것이다.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지수를 보면, 상위 10개국은 ‘완전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선택하고 있다. 완전연동형은 민심만큼 정당이 국회의원을 가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민심에 밀착하는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전체 국회의원의 15% 정도에 해당하는 47석을 가지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만들었지만 두 거대 정당의 편법으로 결국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북유럽의 경우 100%, 독일의 경우 50%인데, 우리의 경우 15%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윤호창 2024).

현재 한국에서 비례대표제가 정 어렵다고 하면 2-3명이 선출될 수 있는 중대선거구제도로의 전환도 적극 고려해 볼 만하다. 또한 정당정치와 관련하여 현재 한국에서 지역정당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 선행과정으로 정당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3. 추첨의 장점과 선거의 한계3

아테네에서 실현된, 추첨의 원리이자 장점은 우선, ‘모두 돌아가며 한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 easy-peasy.ai

대의제에 있어 대표성이 아니라 동일성의 원칙이 지켜질 수 있는 방식은 추첨이다. 근대 이후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추첨은 통치자를 뽑는 아주 훌륭한 제도였다. 즉 추첨을 통해 누구든 당선되기만 하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듯이, 우리가 민주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선거는 사실 귀족제의 특징이고 추첨이야말로 민주제의 특징이다. 언뜻 생각하면, 아무나 선출될 수 있는 추첨은 비적격자를 통치자로 만들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한 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정치를 보건대, 차라리 추첨을 통해 뽑힌, 평균적 양심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 정치했더라면, 이토록 엉망진창의 정치와 처참한 전쟁의 비극이 전 세계를 휩쓸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마넹이 지적했듯이, 정치에 매우 능숙한, ‘정치 천재’들이었던 아테네인들은 이 추첨 제도를 200년이나 유지했다. 물론 여성, 노예, 외국인 등이 배제되었다는 아주 큰 결함이 있었지만, 어쨌든 추첨 제도를 유지했다는 것은 분명 이것이 민주주의에 아주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정치적 이상이 되고 있는데, 그 중심에 바로 ‘추첨’이 있었다.

아테네에서 행해진 추첨의 과정을 보면, 추첨제도는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니며 현대에도 얼마든지 적용 가능한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현재 사법부의 배심원단이나 공론화위원회의 구성원은 추첨의 형식으로 선정된다. 현재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입법, 행정, 사법 기구를 대신하거나 보완할 시민의 기구를 추첨으로 구성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아테네에서 실현된, 추첨의 원리이자 장점은 우선, ‘모두 돌아가며 한다’는 것이다. 즉 추첨으로 한번 임명된 자는 그 직을 또 맡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다. 대학의 학과장을 포함하여 많은 기관의 부서장이 돌아가면서 임명되고 있다. 이 원리는 ‘모두가 통치한다’고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시킨다. 또한, 이로써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교체’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정권 교체는 모든 국가, 모든 체제에 민주주의가 작동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다. 이러한 추첨의 정신은 ‘정치에 전문가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정치 전문가’가 있다면 이들은 오히려 시민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존재다. 왜냐면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계속 지속시키는 것에도 전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추첨과 달리 ‘선거’는 이러한 정치 전문가적 기질과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뽑히기 딱 좋은 제도로서, 현재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왜 공익이 아닌 사익에 전념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정치는 전문가가 아닌, 시민의 몫이 되어야 한다. 정치인은 시민의 의사를 집행하는 기능적 일만 해야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전략, 즉 멀리 내다보고 결정을 내리며 포괄적인 장기간의 정치적 기획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이상 지도자들이나 당 혹은 심지어 정치인들의 책임”이 아니며, 다중에게 위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리더로 여겨졌던 이들의 역할은 이제 전술 영역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재빠른 판단과 행동이 필요할 때 한시적으로 특정한 전문가가 활용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이들은 “항상 다중의 전략적 결정에 엄격하게 종속되게 해야 한다.”(Negri, Hardt 2020) 마넹에 의하면, ‘고대의 다중’이라 할 수 있는 아테네 시민들은 특정직에 추첨으로 뽑힌 경우 정치가로서의 전문성이 아니라 일반 시민으로서의 양심과 덕성을 갖고 있는지 심사되었다. 즉 법적 자격에 하자는 없는지, 부모를 잘 모시는지, 세금은 잘 냈는지, 군 복무를 마쳤는지 등이 심사되었다. 또 과두제에 동조하는 경우에도 탈락됐는데,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중요한 자격요건이었음을 보여 준다(Manin 1997).

한편, 앞서 보았듯이 초기 대의제 역사에서 선거에 나서는 후보의 경우 우월성이 요구되었고 그 증거로 재산 자격이 중시되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도 선거는 그러한 양상을 보였다. 결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는 고대 로마의 경우에도 후보의 재산 자격이 중시되었다. 역사 및 지성사를 보면 선거의 속성이 본래 불평등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선거의 여러 구체적·세부적 과정은 인민의 의지가 실현되는 것을 막는다. 현재 디지털 전문가들은 현재의 기술로 충분히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데 기득권을 가진 현 정치인들의 방해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선거는 혁명적 분위기와 함께 등장했다. 혁명적 분위기는 ‘동의에 의한 정부’가 민주주의라는 여론을 띄웠고 그 결과 ‘인간의 동의에 의하지 않은 방식’인 추첨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추첨은 인간이 아닌 ‘신의 동의’, 즉 ‘운’에 의한 것으로, 근대 이후 신의 자리를 대신한 인간 이성을 굳게 믿은 혁명가들이 이러한 추첨을 선호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다.

이렇게 선거가 대세가 되면서 발생한 큰 비극은, “관직이 시민들 사이에서 평등하게 배분되는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 관직에 올랐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했다.” 선거는 최소한 세습보다는 공정하고 평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추첨과 권력 배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에 대해 보수파들은 “매우 행복해했고 급진파들은 추첨을 옹호하기에는 동의의 원칙에 너무나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Manin 1997).

선거가 주요 정치 과정이 되면서 ‘우열’의 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결국 투표의 과정은 나보다 탁월한 사람을 내보내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선거에는, 이미 잘 알려진 사람이 유리하며, 또한 선거에 들어가는 비용도 감당해야 하니 부자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자들이 재산이 있어서 매수 등 부패에 덜 연루될 것이라 여겨서 선호했다. 결국 ‘나를 대표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뽑는 것이 되어 버렸다. 마넹에 의하면, 이는 ‘선거’라는 제도 자체가 갖는 본질적인 불평등성, 즉 고대로부터 강조되어 온 “선거의 귀족주의적 속성” 때문이다(Manin 1997).

선거는 생태적 관점에서도 치명적이다. 멀리 내다봐야 하는 생태문제는 빠른 선거 주기와 맞지 않은 문제다. 정치인들은 환경 이슈에 대해 “맨 나중에 관여하고 맨 먼저 빠져나오는” 입장을 고수한다. 선거 주기에 맞는 이슈로 성과를 얻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Nixon 2011).

4. 대의제를 보완할 시민의회

네그리와 하트에 의하면 대의제의 해독제는 바로 ‘참여’다. 현대사회의 새로운 운동들은 “남성 입법자들이 여성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백인의 권력구조가 흑인을 대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운동의 지도자들이 조직을 대표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거부”했다. “운동의 많은 부문들에서 대의제의 해독제로서 참여가 장려되었고 참여민주주의가 중앙집중화된 지도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네그리와 하트에 의하면, 사회적으로도 ‘지도자 없는 운동’이 널리 확산되고 있으며, 사회운동과 정치제도는 서로 키우며 섞일 수 있다(Negri, Hardt 2020).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대표’가 아닌, 그 자신이 스스로를 대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의제를 보완할 시민 참여를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시민의회’를 들 수 있다. 시민의회는 제안되기 시작한 지 오래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현재 별 진전은 없는 상태다. 2017년에 국회 개헌특위 산하에 시민 200명~300명을 무작위 추출해 ‘헌법개정 시민회의’를 구성하는 방안이 제안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세계 곳곳에서 제안되고 있는 시민의회는,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들로 국회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고대 아테네의 민회를 본 따 ‘추첨민주주의’, ‘추첨의회’라고도 한다. 시민의회를 도입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개헌을 위한 아일랜드(2012, 2016)와 아이슬란드 시민의회(2010-2012),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2004) 및 온타리오주(2006)와 네덜란드 시민의회(2006), 프랑스의 기후위기 시민의회(2020-2021), 지방의회 단위에서 구성된 동부 벨기에 시민의회(2019)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아일랜드의 2차 시민의회는 2018년 5월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를 전면 금지한 수정헌법 제8조를 개정해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정정화 2024; 이지문, 박현지 2017).

해외의 경우, 주로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경제위기 타개와 정치개혁을 위해 시민의회 창설을 공약한 뒤 법률을 제정해 발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정당과 정치인이 주도한 선거제도 개혁의 경우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시민의회 운영이 파행을 거듭했다. 특히 주류 언론과 기득권 정치세력이 시민의회 활동에 비우호적이거나 권고안 수용을 거부해 제도개혁이 무위로 끝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정화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아이슬란드 사례가 참고할 만하다. 아이슬란드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개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2009년 시민단체가 연대한 앤트힐(Anthill) 주도로 시민의회(National Forum)를 설립했다. 아이슬란드 의회는 이같은 시민사회의 압박에 2010년 헌법회의(Constitutional Assembly)를 설립하는 법률을 제정해 2차 시민의회가 출범하게 된다. ‘동부 벨기에 모델’(2019)은 기존의 공식적인 대의기관(지방의회)과 시민숙의기구(시민의회)가 융합된 형태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의원과 직접선거로 뽑힌 지방의원이 참여하는 공동위원회에서 정책권고안을 최종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방식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오리건주, 핀란드에서도 도입하고 있다. 오리건주에서 2008년부터 시행중인 ‘시민주도적 검토’(CIR)는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패널이 법안을 투표하기 전에 사전 심의한 시민검토서를 유권자들에게 제공하는 방식이다(정정화 2024).

5. 자연도 대표되어야

인도 고등법원은 빙하, 호수, 숲, 습지 등 생태계를 법인으로 선언하고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에도 법인격을 부여했다. 사진출처 : pickpik

생태적 관점에서 진정한 대의제란 자연 등 비인간존재도 대표되는 제도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조금씩 점쳐지고 있다. 2008년과 2009년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는 각각 헌법 차원에서 자연을 법인격으로 선언했다. 201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가 뒤를 이었고, 2014년 뉴질랜드는 황거누이강의 권리 실현을 위해 테 우레에라 국립공원을 법인격으로 선언했다. 2016년 11월 콜롬비아 헌법재판소는 아트라토 강을 법인으로 선언했다. 2017년 3월 말 인도 우타라칸드 주 고등법원은 빙하, 호수, 숲, 습지 등 생태계를 법인으로 선언하고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에도 법인격을 부여했다. 한편, 최근 미국에서는 한 환경 단체가 판사에게 콜로라도 강에 사람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해 달라고 요청한 소송이 2017년 12월에 기각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는 법무장관실로부터 자신의 로펌이 재정적 처벌을 받을 수 있고, 소송이 불법적이고 경솔하다는 이유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Collins & Esterling 2019).

이 중 비교적 성공적 사례로 널리 알려진 황거누이 강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대표를 갖게 된 과정을 보자. 2012년 뉴질랜드에서 황거누이 강에 법적 인격을 부여하고 강의 수호자가 강을 대변하도록 하는 원칙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는 2017 ‘테 아와 투푸아 법’으로 바뀌었고, 2017년 3월 뉴질랜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자연물에 법인격을 부여하는 개념은 1972년 크리스토퍼 스톤의 저서 『법정에 선 나무들(Should Trees Have Standing?)』에서부터 이론적으로 존재했다. 스톤의 기본 아이디어는 기업이나 신탁과 같은 많은 무생물이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법인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나무나 강과 같은 자연물로 확장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권리는 후견인을 선임하여 보호할 수 있으며, 후견인은 법정 소송에서 자연물을 대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스톤의 개념은 최근 몇 년 동안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2008년 에콰도르 헌법에서 자연의 권리, 즉 ‘파차 마마'(어머니 지구)가 인정되었다(O`Bryan 2017).

뉴질랜드는 특정 자연물에 법적 인격을 부여한 최초의 국가다. 또한 단지 환경보호적인 관점을 넘어 선주민인 마오리족의 개념과 가치에 의해 형성되고 반영되는 환경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자연 관리 구조를 뉴질랜드에 도입했다. 그런 점에서 선주민과 환경의 본질적인 관계를 인정하는 훨씬 더 총체적인 접근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는 스톤이 애초에 구상한 모델을 넘어, 마오리족 특유의 세계관 즉 강을 조상인 투푸나의 화신으로 보는 마오리족의 관점을 포함한 것이다. 강을 대변하는 수호자는 ‘테 아와 투푸아’의 인간 얼굴로 ‘테 포우 투푸아’이다. 테 포우 투푸아는 왕실에서 지명하는 한 명과 황거누이 이위에서 지명하는 두 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테 아와 투푸아를 대표하여 공동으로 활동하게 된다. 테 아와 투푸아 법은 강을 ‘나눌 수 없는 살아있는 전체’로 인정한다. 이는 마오리족의 강에 대한 관점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테 아와 투푸아의 안녕을 보호하기 위한 통합된 접근법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O`Bryan 2017).

황거누이강의 법인격 부여는 오래된 싸움의 결과다. 즉 1849년부터 지속된 싸움이었다. 선주민들은 1860년 유럽계 뉴질랜드인들의 이동에 통행료를 요구했고, 증기선 통과로 인해 어업에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 저항했다. 이에 뉴질랜드 대법원이 관습 어업권을 결정했으나, 왕실은 계속 이 관습적 권리를 침해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의회도 선주민의 요구를 무시했다. 지속적인 저항의 결과 2011년 강에 대한 최초의 인격적 인정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거누이 강은 법적 실체로서 존재하며, 특히 관습법적 재산법 상의 어떤 의미로도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여성과 노예의 역사처럼 황거누이 강은 재산상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법적 존재로 변모했다. Hsiao에 의하면, 이는 지속적인 탈식민화 과정을 통해 자연이 해방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Hsiao 2012).

이렇듯 이제 아주 작은 출발이지만, 인간만이 주체가 되는 데모크라시에서 모든 생명이 주체가 되는 에코크라시로 나아가고 있다. 정치의 주체는 이제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포함한 자연이 되어야 하고 대의제는 이러한 자연의 모든 존재를 대표하는 제도여야 한다.

참고문헌

윤호창, 2024, “길을 잃은 정치, 원인과 대책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24.1.29

이나미, 2001,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

이나미, 2024, “‘선거는 민주적’이라는 착각”, 『서울 리뷰 오브 북스』 13호

이지문, 박현지, 2017, 『추첨시민의회』, 이지문‧박현지, 삶창

정정화, 2024, “국민주도 개헌과 정치개혁, ‘시민의회’로 돌파하자,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24.2.5

Collins, Toni, Esterling, Shea, 2019, “Fluid Personality: Indigenous Rights and the Te Awa Tupua” Melbourne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 20.

Hsiao, Elaine, 2012, “Whanganui River Agreement: Indigenous Rights and Rights of Nature” Environmental Policy and Law, 42/6

Manin, Bernard, 1997, 곽준혁 역, 2004,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Mill, John Stuart, Utilitarianism, Liberty and Representative Government, (New York: E. P. Dutton and Company, Inc., 1951)

Negri, Antonio, Hardt, Michael, 이승준, 정유진 역, 2020, 『어셈블리』, 알렙

Nixon, Rob, 2011, 김홍옥 역, 2020,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에코리브르

O`bryan Katie, “Giving a Voice to the River and the Role of Indigenous People: The Whanganui River Settlement and River Management in Victoria,” Australian Indigenous Law Review, Vol. 20

Rosenberg, Arther, 1965, 박호성 역, 1990,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유럽정치사』, 역사비평사

Sartori, G., 1987, 이핵 역, 1990, 『민주주의 이론의 재조명』 II, 인간사랑


*이 글은 2024년 3월 22일(금)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과 동아대 융합지식과사회연구소가 공동개최한 제3회 탈성장대토론회 〈기후정치와 생태민주주의〉 발제문을 수정한 것입니다.

  1. 이나미의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책세상, 2001)의 내용 일부를 수정, 보완했음.

  2. 이나미의 “‘선거는 민주적’이라는 착각”(『서울 리뷰 오브 북스』 13호, 2024)의 내용 일부를 수정, 보완했음

  3. 이나미의 “‘선거는 민주적’이라는 착각”(『서울 리뷰 오브 북스』 13호, 2024)의 내용 일부를 수정, 보완했음

웹진 《생태적 지혜》는 혐오와 배제를 제외한 보다 다양한 관점을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본지에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 정책의 내용을 언급하는 글이 실린다면, 그것은 본지가 제시하고자 하는 다양성의 일부일 뿐이며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전체 조합원들의 합의에 의한 단일한 정치적 노선은 있을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나미

한국의 정치이념과 정치사를 주로 연구해왔다. 정의가 구현되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해법은 무엇인지가 주요 관심사이다.

댓글 1

  1.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시민의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 여유가 필요해 보입니다.
    서민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네 삶에는 사회적으로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다 하여도 나를 돌아보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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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유있는 삶으로의 사회적 환경 조성이 시민의회의 건전한 작동을 가져올 것이라 저는 개인적으로 보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시민의회의 건전한 작동이 여유있는 삶을 위한 사회적 환경 조성의 기초가 되네요.
    //
    지금은 성실한 다가감과 깨끗한 들음과 티없는 말함과 푸르른 기다림을 계속해서 주변에 심고, 이렇게 심는 사람들을 세워가야 할 때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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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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