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장] ⑰ 주민의 안부를 묻다

선흘2리 마을회는 지난 한해 마을가게 운영으로 발생한 수익을 활용해 마을복지사업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부족한 재원은 지자체의 보조금으로 마련해야 하기에 보조금 신청서와 사업계획서를 쓰기 바쁘다. 말이 많은 시골마을이지만 주민들을 믿고 사부작사부작 시작해 보자.

지난 2월 4일 폭설로 한차례 연기되었던 정기총회가 무사히 끝났다. 총회를 끝내고 한동안 맥이 풀려버렸지만, 바야흐로 봄은 시작하는 기운을 지니지 않았던가? 잔디가 쏙쏙 올라온다. 이제 이장도 새로운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올해 마을회는 마을 자체 돌봄사업을 한 번 추진해보기로 했다. 마을이 이장이 되고 이렇게 저렇게 주민들을 만나다 보니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기 힘든 주민들이 꽤 있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하지만 마을은 그래도 이웃을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부자들이 선심처럼 내놓는 시혜적인 돈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호혜적인 돌봄이 내가 사는 마을에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 건강이 좋지 않으시거나 홀로 거주하시는 어르신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안부를 챙기고, 소소하게나마 반찬과 먹을거리 꾸러미를 전달해 드리는 활동을 구상해 제안했다.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마을복지사업 재원 추가 마련을 위해 보조금 신청서를 작성중이다. 사진제공 : 이상영
마을복지사업 재원 추가 마련을 위해 보조금 신청서를 작성중이다. 사진제공 : 이상영

이 사업에 필요한 마을 자체 예산을 500만원 책정했다. 세계자연유산센터에 마을회가 직영하는 ‘오름보러가게’에서 발생한 수익금 2천만 원을 마을운영비로 이전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사무장 인건비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던 이전 상황과 달리 경제적 자립의 숨통이 트인 셈이다.

하지만 마을 자체 예산만으로는 돌봄사업을 내실있게 추진하긴 어렵지 싶었다. 부족한 금액은 지자체 보조금을 신청해 추가로 마련해야 한다. 제주도 공무원들의 인사이동과 인수인계가 끝난 2월은 한창 보조금 신청 기간이다. 이때부터 마을회나 민간단체들은 보조금 신청서를 쓰기 바쁘다. 나 역시 마감을 앞두고 컴퓨터에 앉아 ‘지역’ ‘봉사’ ‘화합’ 등등의 좋은 말들을 잘 엮어서 보조금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마을 이장으로 2년쯤 일하다 보니 보조금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지급하는 민간보조금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시설, 건물 등 민간의 자본 취득을 보조하는 ‘민간자본보조금(민자)’과 행사, 축제, 문화 등 여러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민간경상보조금(민경)’이다.

올해 마을복지사업을 위해 신청한 보조금은 제주도 민간경상보조금인데, 이 보조금은 사용할 때 제약들이 많아 야속할 때가 있다. 열심히 마을을 위해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최소한의 봉사비는커녕,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대접하기 힘들다. 제출해야하는 서류들도 한 가득이다. 행정이 모두 감당하지 못하는 역할을 민간에 맡기면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없는 셈이다.

보조금 사업을 진행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무료 봉사만 하라는 거냐는 원망이 들다가도 심심찮게 빵빵 터지는 ‘거액 보조금 횡령’ 사건들을 떠올리면 이런 복잡한 규정들이 이해 되기도 한다. 불법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조금을 눈먼 돈이라며 제 쌈짓돈처럼 쓰는 담대한(?) 분들이 놀랍기도 하면서도, 뒤를 봐주는 이가 없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요처럼 까탈스런 보조금으로는 집행할 수 없는 인건비를 마을회가 자체적으로 조달한 예산 500만원으로 보충해 어느 정도 사업활동의 자율성과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걱정되는 부분도 많다. 꾸준히 마을을 위해 자원봉사를 해 주실 분을 모집하는 일도 걱정이고, 돌봄대상자를 어디까지 할 것인지 범위를 설정하는 것도 고민이다. 누구는 돌봄 대상으로 삼고 누구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하기 때문. 언제나 말이 많은 생기는 동네에서 욕 안 먹으면 다행인 사업을 왜 한다고 했을까? 후회하며 안방을 서성이고 있으니, 아내가 어르신들을 한 번 만나 보란다. 자원봉사활동 경험이 많은 어르신을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여력이 되는 만큼 10가구 정도의 대상자를 선정해 지원하는 방식으로 시작해 보자고 하신다. 선뜻 도와주겠다고도 하시니 용기를 얻어 일단 지자체 보조금을 신청했다.

어랏! 갑자기 ‘3년차 징크스’가 눈에 보인다. 그 동안 내가 경험한 교장선생님, 목사님, 위원장님, 의원님 등등의 ‘장’들은 초기에는 기존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부임한 지 3년이 되면 꼭 자기만의 일을 추진하고 싶어 했다. 조직을 파악하고 적응했다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지만 지나친 자기 고집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딱 자신감이 차오르는 3년차다. 깡통인 마을 통장을 메워 보려 마을가게를 덜컥 시작해서 이래저래 이제 자리를 좀 잡나 싶은데 또 다른 일을 벌이는 거냐며 아내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있다. 이장도 ‘장’인데 징크스에 빠진 건 아닌지 조심해야겠다.

이 돌봄사업은 5월을 되어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에 함께 일을 할 사람들을 조직하고, 세부적으로 논의할 것들이 많다. 마음과 귀를 활짝 열고 사부작사부작 시작해보자. 이제 정말 봄이니까.

이 글은 『제주투데이』 2023년 3월 2일 자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사진저작권 : 이상영)

이상영

20년 가까이 중고등학교에서 지리(사회)를 가르치다, 2018년 한라산 중산간 선흘2리로 이주한 초보 제주인. 2019년 초 학부모들과 함께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으로 선출된 후, 2021년 어쩌다 이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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