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시대를 살고 넘기 위한 안내서 – 『정동의 재발견』을 읽고

신승철의 책 『정동의 재발견: 가타리의 정동이론과 사회적 경제』는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동이 갖는 의미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노동, 살림, 돌봄, 젠더, 인지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 사회적 경제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을 정동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그것의 함의를 기술한다.

바야흐로 위기가 폭발하는 시대다. 기후위기, 생태위기, 금융위기, 경제위기, 식량위기, 재생산의 위기 … 다양하게 불리는 위기들이 우리를 에워싸며 서로 다른 고난의 양상을 전한다. 그러나 그 다양한 양상 속에서도 우리는 공통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위기를 해결할 주체가 없다는 것, 그 위기의 스케일과 무게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미약하게 느껴진다는 것, 그에 따라 우리는 점점 우울하고 무기력한 주체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모든 위기는 주체의 위기로 나타난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알던 세계가 조금씩 붕괴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늘날 위기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늘 마음 한구석에 갖고 있을 이 질문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우리는 쉽게 압도당한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신승철, 『정동의 재발견: 가타리의 정동이론과 사회적 경제』 (모시는사람들, 2022)
신승철, 『정동의 재발견: 가타리의 정동이론과 사회적 경제』 (모시는사람들, 2022)

신승철의 책 『정동의 재발견: 가타리의 정동이론과 사회적 경제』(모시는사람들, 2022)는 이 위기 시대에, 그리고 그 안의 우리에게 정동이 갖는 의미를 아주 상세하게 전하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노동, 살림, 돌봄, 젠더, 인지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 사회적 경제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을 정동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그것의 함의를 기술한다. 이를 살피기 전에 먼저 우리는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정동(affect)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우리는 정동의 정의를 이 책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자는 정동이란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다시 정동이란 무엇일까?

물론, 이미 많은 이들이 정동을 설명해왔다.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스피노자), “누군가의 존재 능력의 연속적인 변이”(들뢰즈), “개체화나 개체 이전의 전개체적이고 전인격적이며 비에너지적인 역량, 즉 강도적 역량”(조정환), “행동 능력을 높이거나 줄이는 신체적 힘 혹은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신체 능력으로 정의되며, 무엇보다도 인간/비인간 신체들 사이의 만남과 조우에서 출현하는 관계적이고 전염적인 현상”(이항우) 등의 설명이 그렇다. 표현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스피노자의 정의를 따르는 이러한 설명들을 이미 여러 차례 보았지만 그럼에도 뭔가 와닿지 않는, 무언가 풀리지 않은 매듭이 나에겐 남아 있었다. 이 책 이곳저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저자의 설명 역시 주로 스피노자와 가타리에 기대어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계열에 있다. 가령 “사건과 개체, 인물의 발생 전에 있는 미묘한 에너지와 활력의 흐름”1과 같은 설명이 그렇다. 그러나 많은 설명 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표현은 이것이었다.

감정이나 정서는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라면 정동은 ‘움직일 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P.5)

이 ‘움직일 때의 마음’이라는 표현이 나를 움직였다. 그동안 꿈쩍하지 않던, 풀리지 않던 어떤 매듭이 풀리기 시작했다. 책이 나에게 말을 걸어 나의 몸이 움직이는 순간, 다시 말해 정동이 작용하던 순간이었다. 이 책의 1부(「정동에 주목한 두 철학자, 스피노자와 가타리」)는 이렇게 정동을 힘과 에너지로 정의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위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좀 더 자세하게 풀이된다.

그 ‘꼼짝 안 할 때의 생각’은 바로 감정과 정서이다. 어떤 자기원인과 일관성도 없는 일시적이고 휘발적인 생각들이다. … 반면 정동은 보살피고 아끼고 행동하고 이행하고 움직일 때의 생각이다. 삶의 내재성, 즉 배치가 분명히 있는 생각들이다.(P.37)

이 부분을 읽고 언젠가 우울했던 어느 날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만화책을 읽던 내가 떠올랐다. 만화는 재밌었고 우울함은 사라진 것 같았지만 그 기분은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책을 덮으니 난 다시 책을 펼치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서에 머무를 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깔깔깔 웃고 있는 고립된 개인은 자신의 슬픔의 정서와 정동에 대한 무능력을 속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P.39) 그러므로 슬픔의 정서는 “무능력이자 백지상태”(P.50)다. 여기에 머무르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 어떻게 슬픔의 무기력에서 기쁨의 활력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단초를 저자가 들려주는 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이들 — 가타리, 들뢰즈, 스피노자 등등 — 과 역시나 쉽지 않은 그들의 개념을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자가 풀어놓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그러한 곤란함을 넘어설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책 전체에 거듭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개념의 바다에 빠져 헤매는 우리에게 색다르게 말을 걸고 덕분에 우리는 계속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아래는 그중 하나로, “소파에 딱 들러붙은 그림자인간”이 무기력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이야기다.

그림자인간에게 돌연 강아지가 다가온다. 그에게는 강아지의 행동이 강렬도로 다가온다. … 강아지는 연신 그림자인간에게 꼬리를 흔들고, 몸을 비비고, 핥으면서 정동을 전달한다. 무정형으로, 무차별적으로, 무균질로 다가왔던 현실에서 강아지라는 특이점은 점차 그림자인간의 정동을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그림자인간은 … 마지못해 강아지를 쓰다듬고 다시금 강아지에게 밥을 주고 산책 줄을 맨다. … 자신의 정동의 선택지 중 하나인 강아지 산책이 그를 그림자인간으로부터 탈출하게 했다. 어찌 되었건 강아지는 산책을 시켜야 하고, 강아지를 돌봐야 하고, 강아지와 함께 정동을 발휘해야 한다.(P.105)

우리는 어쨌든 강아지를, 고양이를, 아이를, 노인을 돌보아야 한다. 
사진 출처: __ drz __
우리는 어쨌든 강아지를, 고양이를, 아이를, 노인을 돌보아야 한다.
사진 출처: _ drz _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어찌 되었건 강아지는 산책을 시켜야 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가 지적했듯이 돌봄 노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소위 ‘생산적인’ 노동과 달리 완전히 거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2 우리는 어쨌든 강아지를, 고양이를, 아이를, 노인을 돌보아야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우리를 소진시키지만 — 이것은 주로 고립된 조건에서 돌봄을 수행할 때 발생하는 일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즉 강아지가 정동을 발휘할 하나의 촉매로 등장하는 것이다. 강아지가 짖으면, 아이가 울면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이렇게 돌봄은 정동을 활성화하는 장으로 나타난다. 이와 비슷하게 실비아 페데리치는 우리가 재생산 능력을 공유할 때 정동이 작용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면서 ‘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로 고립된 조건에서 수행하는 혹은 상품화된 관계로 소비하는 돌봄을 공동체의 배치로 가져가는 것이다. 페데리치가 이를 재생산의 집합적 재구성으로, 즉 재생산 커먼즈(commons)로 기술했다면, 저자는 “정동을 미학화하는 살림(oikos)의 해방”(P.190)으로 표현한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상호작용이 점점 기술기업이 짠 플랫폼 위로 옮겨가면서 정동 자체를 이윤을 위한 자원으로 흡수하는 전략에 우리가 빠져든다는 것이다. 플랫폼 자본주의 혹은 정동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 단계에서 기술기업은 커먼즈를 모의(simulation)한다. 즉 “자본은 커먼즈와 유사한 플랫폼의 판을 깔면서 무한한 정동의 흐름과 동조화된 돈과 권력의 흐름을 만들어낸다.”(P.164) 이 말은, 자본은 이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 아니라, “직접적 생산과정 밖에서 생산되는 가치를 생산 및 포획하는 장치들에” 투자한다는 뜻이다.3 자본은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판을 깔고 그 속에서 우리가 마음껏 웃고, 울고, 떠들고, 공유하도록 장려한다. 우리가 그 위에서 열심히 소통할수록 기술기업과 그 주주는 좀 더 부자가 된다. 자본은 우리의 자율적인 정동이 자신에게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판을 짜고 우리를 초대한다. 이 기술기업들에게 정동은 일종의 “천연자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활동의 산물이며 따라서 우리는 비임금 사이버프롤레타리아트로 살아간다. 사이버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에서 만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서로 정동하기보다 “미디어와 스마트폰으로 빠져나가고 탈주선을 탄다.”(P.435) 하지만 그 안에는 정동의 순환이 없다는 점에서 활력 없음만 가속화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제 정동은 기술기업의 판 안에 갇혀버린 것일까? 여기서 정동은 입구와 출구가 인과론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되어 있다는 저자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술기업은 우리의 정동이 이윤 창출을 위한 수로 안에서만 흘러 다니길 원하지만, 분열증식하는 정동은 언제 그 길을 흘러넘칠지 모른다. 저자는 가타리의 특이성 생산의 구도를 따라 “권력과 자본은 정동 생산으로서의 특이성 생산을 완벽히 포획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라 “욕망과 정동의 야성성은 모두 포획될 수는 없으며 … 외부는 생산되고 있다.”(P.311)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동의 야성성을 따라 다른 판을, “외부”를 짤 수 있다. 이는 책의 후반부에서 사회적 경제라는 영역을 사례로 다뤄진다. 저자는 오늘날 이 영역이 “처참하고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의미와 가치’라는 의제를 던지면 사람들이 모이던 시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이제 많은 기업이 탄소중립, ESG, 녹색 브랜드 등 ‘의미와 가치’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 진의를 우리가 아무리 의심하더라도 이제 사회적 경제가 ‘선한’ 가치에 기댈 수 있던 시절은 끝났다. 그에 따라 “사회적 경제가 취해야 할 전략적인 선택지는 “정동해방, 돌봄해방, 욕망해방을 통해서 혁신성을 담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경제는 증여와 호혜로 이루어진 정동, 돌봄, 욕망의 영역을 절대적 탈주선 위에 놓고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P.325)

정동에 초점을 맞춰서 위기 시대에 정동해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저자는 오늘날 “노동의 소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정동의 소외”라고 말한다. “여성, 청년, 소수자들은 정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사회가 권장하는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망에 놓여 있다.”(P.244) 이러한 정동으로부터의 소외는 고독과 무기력, 우울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특히 기후위기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부정적인 기후 소식을 접한다. 우리는 갈수록 우울해진다. 실제로 많은 이들, 특히 젊은 세대와 기후 변화를 최전선에서 겪거나 다루는 주민과 연구자들이 기후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기후변화를 지식과 정보로 받아들인 결과로 이해한다. 그렇게 되면 지혜와 정동의 대처법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정동의 정의를 다시 가져오면 우리는 기후 변화 뉴스를 정보로 받아들일 때 ‘꼼짝 안 할 때’의 상태에 있다. 우리는 ‘움직일 때의 마음’으로 이행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감에 빠지거나 각자도생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 길 역시 우울하긴 마찬가지며, 결국 기존의 질서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위기를 가속하는 길이다. 따라서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려는 마음이 생존주의(=개인주의)의 방향성으로 향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동이 유통되고 순환하는 관계망이 중요하다”(P.429)는 저자의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동의 관계망 속 일부가 될 때 비로소 우울감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함께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정동의 관계망의 판을 다시 짜면서 생명위기 시대에 대응하고 적응하는 새로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관계망이 작동하고 있어야 하고, 그 관계망에 정동이 끊임없이 순환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동의 관계망 자체가 모든 재난과 위기라는 사건의 경우의 수를 예비하는 준비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P.428)

위기 시대에 우리의 할 일은 저자의 말처럼, 정동이 순환할 수 있는 “영원한 친구들과의 배치”를 만드는 것이다. 사진 출처: Vonecia Carswell
위기 시대에 우리의 할 일은 저자의 말처럼, 정동이 순환할 수 있는 “영원한 친구들과의 배치”를 만드는 것이다.
사진 출처: Vonecia Carswell

이 정동의 관계망은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생존 전략이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위기를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집합적 주체의 형성이다. 이렇게 우리는 처음의 문제 제기로 돌아왔다. 오늘날의 각종 위기가 주체성의 위기라면 정동의 관계망은 이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다. 우리가 코로나 국면에서 이미 확인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가장 ‘필수’적인 것은 서로를 돌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립된 현재의 재생산 조건은 돌봄을 지치는 일로 만들었다. 고립된 상태에서 정동은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진된다. 그러니 위기 시대에 우리의 할 일은 저자의 말처럼, 정동이 순환할 수 있는 “영원한 친구들과의 배치”(P.237)를 만드는 것이다.

정동은 근접거리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미래로부터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정동되는 어떤 거대한 관계망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내가 ‘움직일 때의 마음’에 움직였던 것처럼, 많은 사람이 이 책을 통해 함께 움직이길 바란다.


  1. 신승철, 『정동의 재발견: 가타리의 정동이론과 사회적 경제』, 모시는사람들, 2022, 16쪽. 이후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숫자만 표기.

  2.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노인 돌봄이라는 새로운 위기: 여성의 자율성과 돌봄 노동 임금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의 투쟁』, 이영주·김현지 옮김, 갈무리, 2020.

  3. Christian Marazzi, The Violence of Financial Capitalism, trans. Kristina Lebedeva and Jason Francis McGimsey, New York: Semiotext(e), 20ll, p.54(마테오 파스퀴넬리, 「기계적 자본주의와 네트워크 잉여가치: 튜링기계의 정치경제학」,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연구공간L 엮음, 난장, 2012, 182-3쪽에서 재인용).

권범철

도시 연구자라고 쓰곤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사실 주업은 육아고 다른 건 다 부업이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사회 활동과 멀어져 거의 집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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