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사상가]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자율성과 자기생산 – 마투라나와 바렐라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저작 『앎의 나무』를 통해 생명의 구성주의에 대해 알아본다. 두 인지생물학자는 생명의 자율성과 자기생산을 강조하는 오토포이에시스 개념을 바탕으로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서론 : 마투라나 바렐라, 인지생물학에서의 앎

움베르또 마투라나(Humberto R. Maturana, 1928~ )는 그의 제자 바렐라(Francisco J. Varela, 1946~2001)와 함께 인식활동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그 결과 『앎의 나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을 막 받아 본 사람들은, 인지생물학자의 시선에서 인식이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인식론을 지배하던 표상주의에 반기를 건다. 표상주의는 표상적 시선에 따라 인식이 결정된다고 보았던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유체제였다. 서구의 표상주의는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으로 나타났지만, 본다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계를 그려내는 구도였다. 하지만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러한 표상주의에 반기를 들고, 그동안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표상화되지 못한 세계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늘 마주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도시의 모습이 노숙자나 길냥이, 벌레들의 눈에는 아주 다른 형태일 것이다. 이런 차이는 객관적 표상이 존재한다는 인식론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표상주의가 설명할 수 없었던 비표상적인 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표상주의는 객관적인 표상과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상인 데 비해,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구성주의는 자신이 표상을 구성해냄으로써, ‘자기가 볼 수 있는 것만 만들어 내서 본다’라는 사고이다. 그 결과 인식의 세계는 바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이 산출한 세계라는 급진적 구성주의에 도달한다. 머리말에서 그 두 사람은 “우리는 인식이 저기 바깥에 있는 바로 저 세계의 표상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어느 한 세계를 끊임없이 산출하는 일이라는 관점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p7)라고 서술한다. 예를 들어 바퀴벌레는 세계를 인식할 것이다. 그것은 바퀴벌레의 생명활동의 방식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하나의 개인은 세계를 인식할 것이다. 그것은 개인이 맺는 관계와 배치에 따라 구성될 것이다. 결국 어떤 통일되고 합일되는 세계상이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점을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들뢰즈가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과도 같다”라고 어디에선가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구성주의는 표상주의와 같이 하나로 통합된 표상이미지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반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표상에 대해서 해석을 부여하고 의미를 고정시켜서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한다. 예를 들어 사랑과 욕망은 표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흐름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영역의 문제이다. 비표상성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철학의 쟁점이었다. 보통 의미와 재현, 표상을 말하는 철학이 개방된 것은 플라톤(Plato)의 철학부터였다. 그것은 실재론(realism)의 전통이라고 지칭되는데, 근대에까지 계승되어 분석적 실재론으로 나타났다. 근대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진리가 표상 형태로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재현하거나 해석하기만 하면 그것을 올바른 것의 형태로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 그러나 생명활동, 생명에너지와 활력, 사랑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근대의 철학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내동댕이쳐버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앎에 대해서 당연시하면서도 앎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도외시하는 학문적 전통에 서 있었다. 앎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세계와 나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를 체험하는 것이다”(p30)라는 앎에 대한 앎을 주장한다. 결국 세계는 우리 스스로 직조한 과정, 즉 구성의 과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인식활동이 세계를 산출하는 것”(p34)이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행위가 바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따라서 앎은 세계연관, 생활연관, 의미연관과 떨어져서 얘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함이 곧 앎이며 앎은 곧 함인 것”(p34)이다. 함이 앎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관계를 맺지 않고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보주의적 시각이나 객관적 진리이론은 모두 기각된다. 앎은 관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생태적 지혜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생태적 지혜의 시각은 맑스가 포이어바흐 테제에서 언급했던 ‘감성적 실천’이나 스피노자의 ‘변용’(affection)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는 인지활동을 생명활동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지적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파악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래서 활동가들은 지식인이 외부에서 자신의 활동을 재현하거나 의미화하는 것에 대해서 환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생명활동은 인지활동과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활동 자체가 인지활동을 구성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객관적 시각에서 거리를 두고 해석하고 재현하는 것보다, 그 상황과 현실에 뛰어들어서 실천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생명활동을 통해서 아주 독특한 세계인식에 대한 구축물이 생겨날 것임에는 분명하며, 그를 통해 완전히 다른 의미의 세계의 재창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지생물학적 태도는 생명활동의 급진적인 구성주의라는 할 수 있다.

우리가 구성주의라고 할 때 대부분 인식의 그물망인 범주(Schema)를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고, 그 나머지를 물자체라고 던져두는 칸트의 인식론적 구성주의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구성주의는 생명활동이 바로 인지활동이라는 보다 강력한 실천적인 명제와 생명활동에 대한 긍정을 담은 구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칸트처럼 합리적인 앎, 즉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 알 수 있다.’라는 인식의 한계와 범위를 가지면서 이루어지는 합리주의와는 달리, 우리가 실천하고 행동하면서 생명활동의 과정에서 구성하는 앎이 있다. 그것은 다분히 철학적인 인식론이 아니라, 생명이 연결되면서 스스로 앎을 구축해 내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거시적이고 통합되어 있는 표상이 객관적으로 따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이며, 가장 국지적이고 가까운 것에서의 변화가 신경계의 그물망을 통해 세계를 산출하고 구성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태적 지혜와 같이 연결망적인 앎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유사하게 신경계의 그물망을 통해서 자기직조되는 인지과정을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신경계를 통한 표상과 이미지의 통합된 상이 존재할 것이라는 철학적 담론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가능할까? 설사 통합된 상과 이미지가 있다하더라도 복잡한 그물망의 일부일 뿐 전부를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통합된 상과 이미지를 주장하는 권력담론에 불과하며 다양한 생명들이 제각각 차이나는 인식을 구성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의미화하는 권력이 만들어낸 구조-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지적이고 유한하며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은 곧 앎이다. 그 앎은 생활연관 속에서 각각 다른 세계에 대한 상을 갖고 있고 그것이 연결되어 생태적 지혜를 구성한다 할지라도 공동체가 자기직조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오토포이에시스와 생명의 자율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오토포이에시스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는데, 그것은 자기생산, 자기직조, 자기조직화, 자기생성 등으로 달리 부를 수 있는 개념이다. 오토포이에시스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하루에 먹는 양이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 몸무게와 배설물로만 가지 않고 일부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중세에는 ‘영혼의 무게를 위해서 쓰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들은 우리의 몸을 재생하는 데 거의 다 쓰인다. 예를 들어 간은 한 달, 피부는 2주, 뼈는 두 달 정도가 걸려서 모든 세포를 바꿔낸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드는 일에 대부분의 에너지와 물질, 신진대사를 사용하는 것이다.2

한국의 여성처럼 슈퍼우먼도 없다고들 한다. 밖에서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집에서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사노동이 가족 재생산의 비밀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부불노동으로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노동이지만, 가족의 삶을 다시 만드는데 결정적이다. 여기서 재생산과 자기생산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재생산(reproduction)은 자본주의의 생산자인 노동자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임금을 통해서 소비자로서 기능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생산은 스스로 생산규모를 결정하거나 임금수준을 결정할 수 없는 노동자들에 적합한 타율의 개념이다. 반면 자기생산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재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생산은 타자생산의 개념이라는 점에서 자기생산과 대조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성의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시각에서는 재생산노동이지만, 생명의 시각에서는 자기생산을 위한 노동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자기생산의 의미가 자율에 있음을 적시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율이란 개념을 흔히 쓰는 뜻으로 쓰고 있다. 곧 자기가 따르는 법칙이나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체계는 자율적이다.”(p59) 생명의 자율성은 스스로를 만들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스스로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토포이에시스 개념은 생명의 자율성에 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자기생산조직을 바탕으로 개체적 자율성에 따라 생명현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비스럽고 경외로운 과정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기본속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무엇이 생명이냐는 질문에 대해 ‘자기생산의 능력을 가진 개체’를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문명은 생명의 자율성을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생명을 도구화하거나 생명현상을 기계 부속품처럼 보는 공장식 축산업과 같은 현실이 근대 산업사회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협동조합이나 마을공동체에서 노동과 활동 간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협동조합이나 마을살이가 질 나쁜 녹색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노동의 시각과 반대로 활동으로 바라보면서 시각의 전환을 촉구하는 활동가들 간의 논쟁이 그것이다. 한 쪽에서는 열정노동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다.3 활동의 시선은 열정노동을 고무시켜서 초과착취를 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재생산과 자기생산과의 차이와 유사한 지평에 있다. 협동조합과 마을공동체는 자기생산을 위한 활동에 의해서 신진대사와 뼈, 살과 같은 자신의 몸을 만들어내며, 이는 타자생산으로서의 노동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자기생산을 위한 활동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만약 타자를 외부로부터 개입시키고, 끌어들일 때는 분명히 노동이라는 시각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적인가 타율적인가의 부분은 노동과 활동을 가르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물에게 독특한 점은 조직의 유일한 산물이 자기 자신이라는 점, 곧 생성자와 생성물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자기생성개체의 존재와 행위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기생성조직의 특성이다.”(p60)라고 말하면서 자기생산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을공동체에서 아이디어회의가 있을 때 수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마을공동체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일은 아주 몇 가지 밖에는 안된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고 결과가 나오면 “왜 우리가 아이디어를 쏟아내지? 결과물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마을회의에서 가장 결정적인 결과물은 바로 아이디어를 냈던 바로 자신과 관계망을 자기생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생산의 시각으로 마을공동체 회의를 들여다보면 존재와 행위가 나누어지지 않고 생성자와 생성물이 구분되지 않는 오토포이에시스의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오토포이에시스라는 개념은 니콜라스 루만에 의해서 커뮤니케이션이 자기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구도로 계승된다. 예를 들어 SNS를 통해서 수많은 글을 쏟아내고, 인터넷 게시판에 수많은 글을 쓰는 것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생산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오토포이에시스는 가타리에게 계승되어 ‘기계’ 개념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기계는 반복이며, 낮과 밤이 반복되고, 아침, 점심, 저녁이 반복되고, 사계절이 반복되고,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는 생태계의 현상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이러한 생태계는 기계적 반복현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생산을 위한 작동이라는 점이다. 생태계처럼 차이나는 반복을 보이는 기계론적 기계는 열리고 자기생산하는 데 비해, 동일한 것의 반복이 이루어지는 기계학적 기계는 닫히고 폐쇄되어 있으며, 타자생산을 위한 것이다.4 가타리의 기계는 공동체, 생태계, 네트워크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생명 개체의 작업적 폐쇄성과 자기생산

독립된 개체는 생태계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생명활동은 인지활동을 구성하는 활동으로 생각되며, 실천과 경험이 중요하다. 사진출처 : pickpik
독립된 개체는 생태계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생명활동은 인지활동을 구성하는 활동으로 생각되며, 실천과 경험이 중요하다.
사진출처 : pickpik

그렇다면 생명이 자기생산하기 위해 어떤 전제조건이 따를까? 이것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원시지구의 생명 탄생의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처음에 원시 생명체들이 생성되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외부환경과 구분되는 세포막을 형성해서 내부에서 자기생산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일단 환경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가장 먼저 외부와 구분되는 내부작동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역할을 세포막이 처음으로 했을 것이며, 세포막을 구성하는 지방질이 외부와 구분되는 내부를 만들어서 내부의 단백질의 자기생산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세포막의 폐쇄작용에 대해서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공간적 구조물이 없다면 세포의 물질대사는 마치 분자들의 수프처럼 여기저기 흩어져버려 세포라는 독립된 개체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57p) 이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생명이 생태적 관계망과 달리 개체적 자율성을 갖게 되는 작동원인에 대한 부분이다.

생명은 주변환경과 구분되는 내부작동을 갖고 있고, 그 내부작동은 대부분 자기생산을 위한 것이다. 세포막이 먼저였는가 아니면 내부작동으로서의 역동성 즉 물질대사의 자기생산이 먼저였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성립에 있어서 그 두 가지 작용이 어떤 것이 먼저였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명이 성립되려면 일단의 작업적 폐쇄성이 필요하다는 점은 생태중심주의가 갖고 있는 연결망에 대한 사유방식과 일단의 차이를 갖는 현상이다. 생명이라는 개체의 성립을 위해서는 생태적 연결망의 되먹임(feedback)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태계가 외부환경과 구분되는 내부환경을 조성한다할지라도 그것은 생명의 개체적인 의미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물론 생태계의 연결망에서의 강렬한 흐름과 섭동작용이 생명의 발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개체의 독립성은 자유로운 활동과 표류를 통해서 생태계의 흐름을 강렬한 특이점으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생명은 생태계의 결과물이지만, 생태계가 작동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른 내부작동을 창안하였다.

작업적 폐쇄성이 있어야 생명이 성립된다는 점은 공동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일단 공동체가 성립되려면 최소한의 장소와 관계에서의 구분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가 갖고 있는 폐쇄성이라는 약점에 대해서 떠올릴 필요가 있다. 공동체가 외부에 대해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외부에 대해서 닫히고 폐쇄될 때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율성은 극도로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농촌 공동체에서는 “옆집 숟가락 개수도 안다니까”라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뻔하게 보거나, 공동체 내부의 소수자나 외부의 이방인들을 타자화하는 블랙홀로 빠져들 위험에 처한다. 그래서 농촌 공동체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탈주하여 공동체의 폐쇄성에 대해서 진절머리를 내며 떠나갔다. 그러나 여기서 열린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열린 공동체에서는 외부에 대해서 열린다는 것과 작업적 폐쇄성 사이의 모순이 일어나지만, 집합적 토론을 통해서 공동체의 자기생산에 필요한 요소를 선택하고 결정하여 열림과 닫힘의 수위와 수준을 결정할 수 있다.

생명이 성립되려면 작업적 폐쇄성과 자기생산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점은 결국 외부환경에서 물질과 에너지를 끌어들여 내부작동으로 바꾸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마을공동체에서 대부분의 에너지-자원-부를 외부에서 끌어들이지만, 내부 관계망의 자기생산을 위해서 그것을 순환시키고 재생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단체에서 외부 프로젝트를 공모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관계망과 회의에서 대부분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어렵게 얘기해보자면 자본주의의 의미화질서에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고정할 수 없는 비표상적인 정동, 사랑, 욕망의 흐름이라는 내부작동을 거치기 때문에 에너지-자원-부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 내부에 있는 사랑과 욕망의 흐름이 바로 자기생산을 이루고 외부에 대해서 열릴 수 있는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쟁은 “공동체 내부의 돌봄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먼저 테두리가 있고 나서 역동성이 있고, 또 그 다음에 테두리가 있고 하는 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종류의 현상인데, 왜냐하면 이 경우에 우리가 어떤 것을 배경에서 구분해낼 가능성이 그것을 생성하는 통일적 과정들 자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p57)라고 말한다. 즉, 내부작동의 역동성이 스스로 옷을 여미듯 테두리를 구성하는 오묘한 과정이 바로 생명 개체의 모습이다. 그래서 작업적 폐쇄성이나 자기생산 어떤 것이 먼저인가를 따질 수 없다. 생명은 자신의 유한한 경계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자기생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 기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은 자신을 무한한 것으로 상정하고 성공을 향해서 달려가는 자본주의의 성공주의와 달리, 공동체는 유한하고 가까우며 자기생산을 통해서 재생하고 순환할 수 있는 관계망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공동체는 한정된 사람들과 대화하지만, 늘 뻔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관계를 풍부하게 만들고 재생하는데 온힘을 쏟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공동체적 관계망은 자본주의적인 진보노선과 같은 성장의 노선과는 완전한 차이를 갖는 관계망의 성숙을 통한 발전노성과 유사지반을 갖는다.

열린 공동체인가? 폐쇄된 공동체인가?라는 지점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타자생산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자기생산으로 나아가는가라는 지점에 달려 있다. 공동체가 이방인과 소수자를 타자로 생산해 내고, 자신의 활동을 타자를 위한 희생으로 만들어낼 때 폐쇄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소지가 크다. 반면 열린 공동체는 소수자를 사랑하고 이방인을 환대하면서 자기생산을 풍부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가능하다. 공동체가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서 그러한 재귀적인 운동이 뻔한 것이 아니다. 생명활동의 재귀성(=반복)을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는 똑딱거리듯 움직이는 뻔한 자동기계라고 간주했다면, 그 재구성은 자기생산을 위한 재생과 순환을 위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가 반복을 통해서 자기생산되면서도 사실은 동일성의 반복이라는 비루한 일상이 아니라 늘 새롭게 창조되는 반복, 즉 차이나는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재귀적 내부작동은 늘 색다름을 만드는 자기생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동체와 사회, 기술의 자기생산

어찌보면 공동체를 개체적 자율성을 갖는 하나의 생명보다는 다양한 생명이 어우러진 생태계에 비유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공동체 역시도 자기생산을 위한 내부작동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활동과 매우 유사한 에너지-부-자원의 흐름과 순환을 갖고 있다. 공동체는 내부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것과 같은 호혜적인 작동을 갖고 있다. 그러나 외부와 교섭하고 섭동할 때 공동체는 시장을 만들어내고 외부의 자원과 부를 끌어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간(間)공동체 속에서 사회가 작동하게 되고, 시장과 국가가 형성된다. 공동체는 친밀하고 유대적인 관계망이지만, 사회적 관계망은 낯설고 익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관계망이다. 공동체의 작업적 폐쇄성은 마을의 경계나 구성원들의 거리 등으로 결정되지만, 사회의 작업적 폐쇄성은 주권이 미치는 경계로 결정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주권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외국인이나 이방인도 사회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모호한 측면을 갖고 있다.

공동체가 자기생산을 위한 내부작동을 갖고 있듯이, 사회 역시도 자기생산을 위한 내부작동을 갖고 있다. 사회적 관계망과 배치는 자기생산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일 수는 없다. 사회의 자기생산을 타자생산(=재생산)으로 바꾸어버리는 자본주의는 사회적 관계망이 영원한 것인 양 여기게 만들어버린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식의 불변항의 구조를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망과 배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 반복되는 유한한 것들의 연합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산의 논의를 사회와 공동체로 확장한 사람은 가타리이다. 가타리는 자기생산을 위한 조직을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했다. 이를 통해 기계들의 연합으로서 존재하는 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단상을 그려낸다. 네트워크 사회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기생산하는 조직이며, 기계부품에 기능연관에 따라 어떻게 연결접속되느냐에 따라 속성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작은 기계부품의 변화가 전체 네트워크에 심원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가타리의 분자혁명의 사상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공동체와 사회 내부에서의 실천과 활동들은 거의 모두 그것을 자기생산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기생산의 실천을 타자생산으로 바꾸어버리고, 재귀적인 공동체의 반복을 똑딱거리는 일상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은 비루해지고 타자에 대해서 차별을 갖는 정상적인 시선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빠져든다. 그러나 재생과 순환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창조하는 것은 언제든 가능하다. 지역순환경제의 경우에는 자원-부-에너지의 순환을 국지적이고 지엽적이고 가깝고 유한한 곳에서 이루어내려는 색다른 모듈화의 결과물이다. 여기서 모듈은 프로그램의 최소단위로서 가장 국지적인 로컬 단위를 의미한다. 여러 가지 모듈화에 따라 재귀적인 순환과 재생이 독특하게 이루어질 때 생태위기에 맞설 수 있는 가능성은 증대된다. 이를 테면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와 같이 똑같은 삶의 방식과 문명화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기후단절과 같은 극심한 생태계 위기 속에서 절멸의 상황에 빠져들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5

공동체와 사회가 자기생산의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또 다른 측면으로 기술의 자기생산이 드러난다. 기술도 살아있는 생명처럼 자기생산을 하는데, 이는 기술의 진화와 발전이 마치 생명체의 생과 사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자동차산업이라는 기술은 자동차 자체의 창조적 진화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기생산한다. 예를 들어 친환경자동차와 같은 기술은 자동차 기술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내부에서 기술의 자기생산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많은 기술이 만들어지고 창조되지만 그 자신을 재생하려는 기본적인 속성은 유지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의 자기생산에 대해서도 함께 얘기해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와 생명을 말하는 사람들이 기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재전유와 기술의 자기생산의 시각을 통해서 적정수준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사회, 공동체, 기술의 자기생산을 언급하는 것은 스스로의 몸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통해서 사회와 공동체, 기술을 재창조하자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산의 철학은 사회과학자, 기술자, 생물학자, 철학자들을 고무시켰고, 성장을 위한 개발이 아닌 발전을 통한 자기생산이라는 시각을 확보하게 해주는 효과를 가졌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기생산이 아닌 타자생산을 통해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노동이나 상품교환의 영토를 만드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비자본주의적인 생명이 보여주는 자기생산에 따라 사회와 공동체, 기술을 디자인하는 것은 생명의 숨결을 회복하는 것이자, 살맛나는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고 생명친화적인 기술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비판, 재생산과 자기생산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다윈의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기성 생물학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그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우리는 진화를 계통발생적 선택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구조적 표류로 보았다. 이때 환경 이용을 최적화한다는 뜻에서 진보한 없다. 유기체와 환경의 구조접속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적응과 자기생산의 보존이 있을 뿐이다.”(134p)라고 기술하면서 진화가 아닌 ‘구조적 표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구조적 표류는 우연으로 가득찬 세상을 의미하며, 적응과 자기생산의 두 요소가 내부에서 작동하는 우발적인 환경과의 접속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진화의 필연적인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환경변화가 결정적이었다는 생각은 기각된다. 진화는 오히려 “방황하는 예술가”라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환경의 변화는 상관관계일 뿐 인과관계가 아니며, 더욱이 진화에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지 진화는 유기체와 환경의 양립에 따른 ‘적응’과 자기생산이 보존되는 과정에서 우연의 일치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생명 개체는 표류하며 방황하면서 자신에게 적당한 환경을 찾아다니는 자율적인 존재, 음유시인, 방랑자 등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혁신적인 생각은 진화와 더불어 변이가 늘 최적화라는 진보 개념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또한 생명에게 있어 생식이라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개체의 성립이 먼저 이루어져야 생식이 수반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전통적인 논쟁에 대해서 응답하였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몇 세대에 걸쳐 단백질의 구조가 유지되는 것을 유전자라고 지칭하면서 씨앗처럼 유전자에 미리 정보가 들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흔히들 유전자에 한 생물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정보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근본적으로 틀렸다. 첫째 세포의 특정 구성요소(DNA)를 여러 세대에 걸쳐 꽤 안정되게 복제하는 기제를 유전현상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한 생물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데 필요한 것이 DNA에 들어 있다는 주장은 자기생성그물의 한 구성요소인 DNA를 함께 얽혀 있는 그물의 나머지와 분리했기 때문에 틀렸다.”(p84) 두 사람은 DNA가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변이되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들어 구조적 표류의 일부로 사고한다. 물론 상대적 안정성은 있지만, 그것만을 분리시켜서 실효성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현행의 동물실험은 개체의 특성이 실험실에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분석적 실재론의 컨셉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생태환경과 어우러져 개체가 적응하고 표류하는 과정을 분리시켜 바라보는 것은 DNA 개념과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같은 개체를 되풀이해서 만드는 ‘복제’와 모델화를 통해서 개체를 생산하는 ‘복사’와 달리 세포의 생식은 한 개체가 나뉘어 그것과 같은 부류의 두 개체로 되는 ‘증식’을 따른다고 보았다. 여기서 증식하는 개체와 증식된 개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 안에서 개체의 일부로 증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포의 생식은 고르게 분포되어 있고 불균등하게 구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장 고른 분포 속에서 복제와 복사가 아닌 증식이 일어난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세포의 경우에 분열이 일어나도록 작용하는 것은 바로 세포의 자기생성적 역동성 자체이다.”(p80)라고 언급하면서 분열과 자기생산의 관계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이런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생각은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생성론을 생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분열은 역사적 계열을 갖는데, 분열이 불균등성에서 이루어진다는 속설과는 달리 매우 고른 분포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르게 분포된 구조를 가진 개체만이 나뉘어 증식할 수 있으므로 다음 세대가 갖는 구조적 형태는 앞 세대의 것과 꽤 비슷할 수밖에 없다.”(p82)라는 두 사람의 발언은 불안정성과 불균등성을 분열로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분열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다. 결국 ‘고르게 분포된 구조’를 의미하는 고름(consistence)6의 차원이 분열에 결정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재생산과 같은 타자생산은 내부에 고름을 가질 수 없으며, 단지 복제나 복사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 공동체는 자기생산을 위한 고름을 내부에 가지면서 증식해 나간다. 이에 따라 재생산을 위한 자본주의적인 조직과 자기생산을 위한 공동체는 완전히 다른 전통을 갖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적인 조직은 역사를 갖지 않으며, 분열을 갖지 않고, 동시에 고름이 없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모델을 계속 복사하거나 똑같은 것을 복제할 뿐이다. 자본주의의 재생산이 매우 비루한 일상의 삶의 모델을 복제복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어디를 가나 똑같은 노동, 가족, 미디어가 존재하고, 모텔, 백화점, 마트, 병원 등으로 똑같은 삶의 모델이 주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공동체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며, 증식하여 국지적인 곳에서 개체를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의 자기생산은 고름이 갖고 있는 생명평화와 매우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공동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내부의 평화로운 고름의 판에 의해서이며, 이를 통해서 한 개체가 나뉘어 두 개체가 되는 창조적 분열이 가능하다. 정신분열증이 갖고 있는 불균등성과 불안정성과 달리, 공동체의 창조적 분열은 고른 분포를 내부에 이루었을 경우에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재생산을 위한 경제시스템을 통해 생산과 소비가 순환하는 내부상점 모델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노동자는 노동현장에서 천대받겠지만, 소비자로서는 환대받는다. 내부상점 모델은 단순재생산과 확대재생산이라고 불렸던 자본주의 재생산의 메커니즘과 조응하여 내부순환을 가지면서도 그것은 철저히 타자생산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돌봄노동에 있어서도 타자생산을 위한 감정노동이라는 자본주의적인 노동이 있고, 자기생산을 위한 정동노동이라는 공동체적인 노동이 있다. 공동체는 자기생산을 위한 내부작동이 있으며, 이는 순환과 재생을 위한 활동이 주를 이룬다. 공동체경제는 타자생산의 복제와 복사가 아니라 개체의 증식을 따르기 때문에, 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차이나는 반복을 통해서 자기생산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동체경제의 자기생산은 사회적 협동조합이 수익과 지출의 차이를 제로로 만드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이 이익을 위한 경제가 아닌 사회에 기여하려는 이타적 동기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공동체경제의 자기생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메타세포체와 삶

생명의 미시사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은유하는 삶의 비밀이 살짝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 중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선택한 것이 바로 피사룸(Phyarum)이다. 그 두 사람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단세포동물의 한 종의 점액균(변형균) 중 하나인 피사룸에서는 포자가 자라서 세포가 된다. 이 세포는 주위가 축축하면 개체발생을 통해 편모를 가지고 운동할 수 있는 세포가 된다. 반면에 주위가 말라 있으면 개체발생을 통해 아메바 같은 세포가 된다. 이 두 종류의 세포들이 분열을 반복해 다른 많은 세포들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구조접속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융합하여 변형체가 된다.”(p93)라고 말한다. 피사룸은 생명의 생애주기를 잘 보여주는 동물 중에 하나이다. 아주 작은 세포임에도 불구하고, 환경과의 구조접속을 통해서 물이 있으면 아메바와 같은 거대생명체가 되고 물이 없으면 편모운동을 통해서 물이 있는 곳까지 이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포들이 융합해서 하나의 거대생명체가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의 생애주기와 일치한다.

한 때는 인간도 작은 편모생물이었던 때가 있고, 거대 메타생물체였던 때도 있다. 그러다 메타생물체가 죽음에 이르면 작은 균류로 다시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한 인간의 죽음을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여기서 메타생물체는 2등급 개체이며, 대부분의 생명체를 지칭할 때 대부분 메타생명체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2차 등급의 개체 또는 메타세포적 개체는 복합체로서 자신의 구조에 상응하는 구조접속과 개체발생을 겪게 될 것이다.”(p94) 메타세포체가 된 생명은 통일된 개체의 내부작동에 따르지, 각각의 세포의 상호작용에 따르지 않는다. 사실 생명은 단세포동물을 생식단계에서 보이면서 피사룸과 크게 다르지 않는 생애주기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삶이라고 말하는 메타생명체의 단계는 수많은 단세포동물과 통일체를 이룬 개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메타생명체가 되면 단세포동물의 속성을 사라지고, 환경과 맺는 구조접속과 자기생산을 특징으로 하여 그것의 내부작동에 의해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신비감을 갖고 바라보는 두뇌의 뉴런작용 역시도 단세포동물의 뉴런작용을 기본적으로 하여 그것이 다발이 되고 복잡화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등생물이 갖고 있는 두뇌작용에 대한 신비감을 갖고 단세포동물과 분리하려는 것은 무망한 것이다. 사실 인간 역시도 두뇌에 수많은 미생물의 작동을 갖고 있는 셈이며, 이런 점에서 메타세포체의 생애가 생명의 역사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생태계가 창안해낸 생명들은 가장 원시적인 작동을 모태로 해서 메타세포체로 복잡화하여 개체의 자율성에 따라 환경에 맞서거나 섭동작용을 하도록 자신의 몸을 만들어 왔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원생동물이 감각부위와 운동부위가 같으며 감각기관을 움직이며 헤엄치는 것을 그려낸다. 그런 다음 다세포동물 중 히드라를 사례로 들면서 단세포동물을 자신의 내부의 감각뉴런으로 갖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 지적한다. “이 세포들에게 특별한 점이란 그것들이 연장부위를 가지고 히드라 안에서 해부학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세포요소들을 서로 이어준다는 데 있다. 이 세포들이 바로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형태의 신경세포 또는 뉴런이다.”(p173~174) 즉, 인간의 신경계를 이루는 수상돌기와 축삭돌기, 신경뉴런은 단세포동물의 신경부위를 합체하여 이를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즉 뇌과학의 비밀은 단세포동물의 뉴런 작동에 기초해 있다. “뉴런의 체계는 이처럼 갖가지 세포들과 다양하게 연결된 채 유기체 안에 묻혀 있다. 감각부위와 운동부위가 매우 정밀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그 사이를 이어주는 뉴런들이 그물처럼 얽힌 것을 가리켜 신경계라고 부른다.”(p179)

그러나 메타생명체는 단세포처럼 운동부위가 감각부위와 같은 형태의 뉴런작용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그 내부에 색다른 신경계의 작용을 갖게 된다. 마치 그물망처럼 얽혀서 신경계의 작용을 하는 신경계는 ‘작업적 폐쇄성’(p186)를 갖는다. 이러한 신경계는 입력과 출력의 기계가 아닌 상호작용의 기계라고 지칭될 수도 있다. 메타생명체의 신경계는 그물망과 같은 신경계의 내부작동에 의해서 우연적인 구조적 표류를 하면서도 상호작용을 결정하는 내부작동에 의해서 움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타생명체는 단세포동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환경과의 섭동작용과 자율적인 결정이 가능하다. 여기서 키워드는 ‘구조적 표류’라는 우발성과 ‘작업적 폐쇄성’이라는 내부작동, 그리고 ‘환경과의 섭동작용’인 상호작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나 생명에 있어서 환경을 반영해서 신경이나 마음 작용이 일어난다는 표상주의는 기각되며, 그렇다고 유아론적인 지평에 서서 환경을 배제한 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기존의 표상주의는 환경을 반영할 뿐인 인간의 마음의 작용을 주장하면서, 사실상 자기생산을 위한 내부작동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무시하였다. 그리고 생명의 자율성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결정론이나 환경결정론의 시각을 정당화하였던 것이 표상주의철학과 반영론이었다.

생명의 자기생산과 섭동작용 : 환경결정론 비판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산에 대한 사상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사진출처 : wikimedia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산에 대한 사상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사진출처 : wikimedia

환경관리주의의 시각은 인간이 환경을 정량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반면 환경관리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환경결정론은 환경의 영향이 인간 활동에 결정적이라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환경결정론의 시각은 역사가 매우 깊으며, 사실상 다윈의 진화론도 환경에 의한 선택이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환경결정론은 구조주의적 사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구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생명은 환경을 반영하기만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그래서 생명현상이 환경결정론에 의해서 나타나는 로봇이나 자동기계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과 환경의 큰 차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물은 어느 특정 장소에서 태어난다. 그 환경 안에서 생물은 자기를 실현하고 상호작용을 주고받는다. 생물을 둘러싼 환경도 생물의 구조적 역동성과 작업적으로 상이한 구조적 역동성을 지닌다.”(p112~113)

생명은 자기생산과 환경과의 섭동작용을 통해서 개체적 자율성을 갖는다. 즉, 생명에게 있어 환경은 섭동작용의 하나의 원천이지, 명령의 원천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에 따라 명령되고 결정된다는 생각은 기각된다. 생명활동은 자율성과 구조적 표류라는 우발성을 통해서 움직이며, 환경 역시도 이러한 요인 중 하나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생명은 환경의 산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되며 그 내부작동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환경에 맞설 수 있는 색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환경에 대해서 생태와 생명의 논의는 각각 완전히 다른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환경주의가 무정형의 사물에 대한 정량적 관리와 같은 극단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반면, 생태주의는 살아있는 연결망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생태계의 피드백에 대해서 주목한다. 여기에 덧붙여 생명에 대한 논의는 개체적 자율성에 대해서 주목하면서, 생태주의와 또 다른 맥락에서 환경주의와 구분된다.

생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결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환경과의 섭동작용 속에서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생물의 내부 구조이다.(p113 참고) 물론 환경이 영향을 주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과 구분되는 작업적 폐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포를 예로 들지만, 세포막을 통해서 외부환경과 구분되는 내부환경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생명은 환경과 구분되는 부드러운 가현실(假現實)로서의 내부환경을 조성한다. 예를 들어 동물집단의 경우에 영토를 설정하고 무리를 짓고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보다 약자인 개체에 대해서 보호할 수 있는 내부환경을 구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장 열악하고 힘든 상황에 있을 것 같은 생명들조차도 자신이 영토에서는 부드럽고 완화된 현실을 조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생명이 갖고 있는 가상성(virtuality)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상성은 환상이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이 혹독한 외부환경에 맞서 자신의 부드러운 내부환경을 조성할 때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7

그런 점에서 생명들의 작업적 폐쇄성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꿈과 같은 현실을 조성하며, 그것을 지칭하려면 아마도 칸트의 합리적인 구성주의가 아닌 망상적 도식작용을 통한 생명의 구성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의 거대한 꿈은 생명이었다. 생태계에서는 따로 떨어진 나무 100그루보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50그루 나무가 외부환경에 맞설 수 있고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내부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강하다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생명은 그 내부환경이 자기생산하는 내부작동으로 또 한 번 조성되기 때문에 생태계의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의 자율적 행동에서 또 다른 내부환경을 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결정론의 시각에서 단순화해서 생명을 파악하는 것은 생명의 자율성에 대해서 낮게 평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열악해도 생명은 완전히 다른 내부환경으로서의 영토를 구축하고 외부환경에 맞설 수 있는 자율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마치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가장 결정적인 것처럼 판단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의 측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생명현상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합리주의는 환경결정론에 따라 도식화하고 평면화시켜서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결정론의 반대편에는 생명권과 생명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은 환경과 섭동작용을 하면서도 자기생산의 내부작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율적인 행위양식을 수치화하거나 계량화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관리주의는 생명의 자율성에 대해서 상당히 취약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환경결정론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것과 다른 시각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생명의 구성주의가 그 답을 찾는 힌트와 영감을 줄 것이다. 생명의 자기생산, 구조적 표류, 작업적 폐쇄성 등의 활동들은 매우 수선스러운 생명들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특히 동물들의 경우에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환경에 맞선 활동들을 수행한다. 이러한 생명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 개체적 자율성을 무시할 수 없으며, 이런 시각에서 현실은 스스로가 만든 색다른 현실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의 구성주의는 단지 ‘인식론적인 구성주의’가 아니라, ‘구성적 실천’을 통한 현실의 변형과 변이의 의미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 생명의 자율과 자기생산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라는 개념은 생명이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과정으로서의 생명활동의 의미를 다시 사고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생산을 위한 생명활동이 갖고 있는 자율성을 응시할 수 있게 한다. 생태중심주의가 주장하는 “연결망이 우선이다”라는 식의 주장과 달리,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개제중심주의의 “개체적 자율성이 우선이다”라는 사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생명의 자율성에 대한 시각은 크게 생기론과 기계학으로 구분되어 왔다. 생기론은 외부로부터의 생명력이나 생기, 영혼이 불어넣어져서 생명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사상이다. 이는 종교적인 의미와 영성적인 의미도 함께 갖고 있었으며, 대표적인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아 사상이 있다. 반면 기계학은 생명활동이 기계작동과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으며, 대표적인 사상으로 데카르트의 자동기계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산에 대한 사상은 생기론과 기계학 모두를 기각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을 계승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으로 응답했다.8

생명활동은 대부분 자율적인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데카르트는 신체와 동물을 경멸하면서 어떤 틀만 주면 자동적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율주의와 자동주의(구조주의)는 철학에서 가장 대비되는 사상이다. 자율주의 사상은 이탈리아의 노동자 자율주의(Autonomia)로 출발했지만, 사실은 생명의 자율주의가 우선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의 개체적인 자율성에 대해서 탐색하면서 사실상 생명활동이 기계적이거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생산을 위한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혔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자동기계와 같이 다루어지고 도구화되는 것의 이면에는 생명의 도구화와 자동기계로의 간주하는 것이 숨어 있다. 그렇게 때문에 생명의 개체적인 자율성을 승인하는 것은 곧 인간 개체의 자율성에 대해서 인정하기 위한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체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는 생태운동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다. 그것은 공동체운동에서도 반복되는데, 예를 들어 공동체 안에서 특이성이 생산되어 변화를 만드는 것은 관계망의 창발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연결망이 먼저인가 아니면 개체적 자율성이 먼저인가는 논쟁의 소지가 있다. 예를 들어 공동체적 관계망으로부터 배제된 개인의 특이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적 관계망이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일 경우에만 특이성 생산도 변화의 초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체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는 대립각을 세울 부분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입장에서 사고될 필요가 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의 개체적인 자율성에 대한 기초적인 사유의 경로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서 생명의 개체가 온건히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활동과 신진대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여준다.

마투라나와 바렐라와 같이 생명의 자율성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색다른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재생과 순환의 공동체적 내부작동은 자기생산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이라기보다는 활동으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물론 화폐가 오고갈 수는 있지만 그것이 호혜적인 것인지 아니면 노동의 대가인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자기생산인지 타자생산인지에 대한 구분과 판단이 요구되며 동시에 선택하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또한 생명의 개체적 자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폐쇄되고 닫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이 생산되어 다양해지는 공동체를 조성할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연결망과 개체적 자율성은 상보적이며, 이를 잘 공생시켰을 때 공동체가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생산이라는 자율성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는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생명사상의 핵심이며, 이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다분히 소박하지만 핵심에 가까워진 느낌을 주는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도서

  • 마투라나/바렐라, 『앎의 나무』, 최호영 역, (2007, 갈무리)
  • 저자 지크프리트 J.슈미트. 『구성주의』, 박여성 역 (1995, 까치)
  • 프리초프 카프라, 『생명의 그물』, 김용정, 김동광 역 (1998, ㈜범양사)
  • 펠릭스 가타리, 『카오스모제』, 윤수종 역 (2003, 동문선)
  • 이득재, 이규환, 『오토포이에시스와 통섭』, (2010, 써네스트)
  • 신승철, 『사랑과 욕망의 영토』, (2011, 중원문화)
  • _,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2013, 알렙)
  • 박종무, 『모든 생명은 돕는다』, (2014, 도서출판리수)

  1. 이에 대한 연구는 신승철,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2014, 서해문집) 중에서 「플라톤과 동물실험실」에서 다루고 있다.

  2. 프리초프 카프라, 『생명의 그물』(범양사, 1998)중에서 「자기제작」파트를 참고해보면 유기체에서 가이아이론까지 풍부한 예증을 얻을 수 있다.

  3. 한윤형 외,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웅진하우스) 참고

  4. 펠릭스 가타리, 『카오스모제』(2003, 동문선) 중에서 「2. 기계적 이질발생」참고

  5. 다이앤 듀마노스키, 『긴 여름의 끝』(2011, 아카이브) p20에서 작은 모듈단위의 공동체의 조직화가 기후단절과 같은 급격한 위기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6. 생명과 생태가 만든 부드러운 내부환경에 대한 논의는 신승철, 『식탁 위의 철학』(2012, 동녘)에서 「빵과 가상성」에 대한 논의에서 개략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환상과 망상의 도식화작용에 대한 논의로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에 대한 논의와 칸트의 선험적 가상 논의를 참고해 보면 좋겠다.

  7. 들뢰즈와 가타리, 『앙띠 외디푸스』(1998, 민음사) p420에서 기계학과 생기론의 비교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욕망하는 기계 즉 자기생산하는 기계론적인 기계에 대한 단상이 나온다.

이 글은 단행본 『철학, 생태에 눈뜨다』(신승철 저, 새문사, 2016)에 게재된 바 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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