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의 다른 회로 만들기에 대해

숨겨져 있고 맹아로만 존재하던 잠재성은 정동의 촉발을 통해 주변의 항들과 접속하면서 다른 벡터를 갖는다. 신자유주의의 통치 권력의 전략과 결부된 정동은 혐오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혁명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즉, 정동은 그 주위의 배치에 따라 다르게 활성화된다.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어떤 배치냐에 따라 A가 될 수도, B가 될 수도 있고, C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정동은 존재의 기본 조건이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일상의 말, 수행성

“교육품질 향상을 위해 우리 학교는 강의평가를 2회 실시하게 됩니다. 중간평가는 수강중 강의 교육품질 개선을 위해 활용될 예정입니다. 학생 여러분께서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강의평가 조사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진행을 위해 참여 학생들의 비밀은 철저히 보장됩니다.”

수강신청 기간 전에, 수강하고 싶은 과목들을 예비로 담아두는 곳을 ‘장바구니(혹은 그 이모티콘)’라고 한다. by Bruno Kelzer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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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신청 기간 전에, 수강하고 싶은 과목들을 예비로 담아두는 곳을 ‘장바구니(혹은 그 이모티콘)’라고 한다.
사진 출처 : Bruno Kelzer

한창 강의평가 시즌이던 10월 중순 접속했던 한 대학의 홈페이지 팝업창 구절이다. 학습자뿐 아니라 교수자도 평가받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학습자와 교육자가 아닌,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의 평가처럼 전달하는 천연덕스러운 문구는 당혹스럽다. “교육품질 향상” “교육품질 개선” 같은 말이 환기시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수강하고 싶은 과목을 예비로 담아두는 곳이 ‘장바구니’(혹은 그 이모티콘)인 것도 낯선 일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오늘날 대학과 거기에 공모된 구성원의 문제는,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이런 디테일에서 시작한다.

실제로 대학 장터에서 과목들과 리포트와 시험문제 등이 돈으로 거래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수업 현장뿐 아니라, 문화예술 현장에서의 수용자와 창작자 스스로가 상품을 구매, 판매하는 소비자와 판매자로 정체화하는 경우도 자연스럽다. 지금 이 세계가 왜 이렇게 되었나 식의 통탄을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소위 바깥이 없다는 비관을 반복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관련하여 잠시 짚어두자면 말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물론 말은 표현과 소통의 일차적 수단이지만, 그런 동시에 늘 수행적 힘을 지니고 있다. 발화되고 소통되는 과정에서 그 말의 함의는 참여자들을 부지불식중 공모시킨다. 말이 함의하는 것들은 그 장의 참여자들을 구속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내면화=주체화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subject의 두 상반된 의미라는 것은 더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강희망과목이 담길 ‘장바구니’, 강의의 ‘품질’을 높이는 강의평가. 이런 디테일은 그것에 관여하는 이들의 사고와 신체를 은연중에 디자인한다. 강의실에서 오가는 지적, 정동적 교류는 간명한 상품으로 인지되고, 점수라는 단일한 척도로 환원된다. 물론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이야 말할 것도 없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본격화한 상대평가의 기계적 줄세우기는 그것의 더 오래된 버전이다. 대학과 자본주의의 공모가 어떻게 ‘자연화’하는지 사례는 매우 많다.

오늘날의 통치하는 권력은 왜 정동을 탐하게 되었나

사소한 단어 하나가 바뀔 때 달라지는 것은 뉘앙스나 의미만이 아니다. 말은 세계를 디자인하는 기초에 놓여 있다. 일상의 말들은, 인간의 의식에만 작동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물론 신체에 직접 작동한다. 말은 어떤 정동을 촉발하고 활성화시키는 버튼(트리거)이기도 하다. 혁명의 광장에서 오가는 말들도, 인터넷 댓글의 말들도 그 내용과 방향은 다르지만 그것에 접속하는 이들의 정신과 신체 모두에 가닿는다. 그리고 그때까지 표면으로 아직 현행화되지 못하고 들끓고 있던 정동이 단번에 수면으로 이끌어지고 하나의 사건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정동이 촉발될 때, 그때까지의 일상적 리듬이나 지각에는 균열이 생긴다. 일상세계의 암묵적 질서가 깨진다. 그리고 그 질서의 배후에 숨겨진 차원이 단번에 드러나고 다른 지각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열린다. 잠깐 실현된 현실태 너머에서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던 무언가들(잠재성)이 활성화하고, 그것은 특이한 시공간을 열어젖힌다.

그렇기에 정동은 선도 악도 아니고 결정되어 있지 않다.(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은 기존 세계의 복잡한 지형을 늘 부지불식중 매개한다. 강의평가 안내 문구에 무심코 놓인 품질(=강의상품)이라는 말은, 대학은 곧 기업이고 나는 곧 소비자 혹은 판매자라는 인식을 자연화한다. 나의 뇌는 일사불란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신체는 종종 나의 의지(뇌)와 별개로 자극을 수용한다. 무섭기에 떨리기도 하지만, 떨리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강의실은 지식이 거래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도, 내 몸에 무심코 부착되는 말의 기억은 자연스레 잠재성의 영역을 구성한다.

정동은 늘 개체를 가로지르는 어떤 배치로부터 발생한다. 이제는 많이 알려졌지만 그것은 특정 정서(emotion)로 포착(표상)되기 이전의 힘이다. 내가 ‘자각’하는 어떤 정서란, 부지불식중 늘 이루어지고 있는 무언가와의 마주침(정동)의 흔적이다. 정동은 재현되고 개념화되기 이전에 신체 수준에서 작동하는 강렬도이고, 나아가 신체의 일정한 상태와 사유의 일정한 양태를 함께 표현한다. 정동은 객관적 실재인 무언가를 재현하는 관념(idea)과 달리, 재현될 수 없는 사유양식이며, 일종의 내적에너지가 연속적으로 변이함으로써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정동은 생물, 미생물, 무생물, 무기체, 유기체 모든 만물이 이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루되어 존재하는지 환기시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by J Esteban Berrio 출처: https://stock.adobe.com/kr
정동은 생물, 미생물, 무생물, 무기체, 유기체 모든 만물이 이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루되어 존재하는지 환기시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J Esteban Berrio

그러므로 정동은 생물, 미생물, 무생물, 무기체, 유기체 모든 만물이 이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루되어 존재하는지 환기시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정동은 개인이 소유했다고 간주되는 정서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어떤 상태가 이행하고 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힘의 증감으로서의 행위능력을 의미하고, 그렇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을 잠재성에 친연성을 띤다. 말하자면 정동은 개체(individual)를 기본 단위로 하는 근대의 존재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정동은 이 세계의 모두가 관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정동은 근대적 개인에 작동하여 그것을 인구로 셈하고 관리하는 근대의 통치술이 새롭게 겨냥하기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가령 브라이언 마수미가 2001년 9·11 이후 세계의 달라진 통치술을 집요하게 주제화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통치하는 권력은 궁극적으로 집단을 관리하고 구상하는 쪽에 관심이 있다. 더구나 오늘날 기술미디어가 간주하는 존재의 단위는 개체가 아닌 분할체(dividual)에 가깝다. 더구나 앞서 말했듯, 본래 이 세계는 쉽게 상상해왔듯 개체가 아니라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존재한다. 이러한 서로 연결되고 연루되어 있는 존재의 조건을 발 빠르게 선취한 것이 오늘날 통치술인 셈이다.

촉발시키는 말, 활성화하는 정동

브라이언 마수미는 오늘날 통치 권력의 전략은 개인의 신체와 정동을 직접 겨냥하여 거기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1 2001년 9·11 이후의 특징이라고 분석하는 마수미의 이야기를 잠시 떠올려본다. 2005년 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했다. 소위 자연의 급습은 인간에게 경외심과 더불어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조지 W. 부시는 이것을 자연재해나 국가적 비상사태 같은 말로 표현하지 않고 “국가 사업의 비상사태(national enterprise emergency)”라고 칭했다고 한다. 재해나 재난은 국가 안보에서 더 나아가 “경제적 가치 창출”을 일으키는 국가 사업으로 지칭되었다. 이 교묘한 말바꿈에는 부시 정권의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전략이 감추어져 있었다. 사업으로 명명하는 순간 정부의 지원은 “민간 부문에 대한 아웃소싱으로 대체”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업 투자의 돌풍을 허용한 전략”이며 실은 “생산성 부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 마수미의 분석이다.

브라이언 마수미, 『존재권력』 (갈무리, 2021)
브라이언 마수미, 『존재권력』 (갈무리, 2021)

즉, 카트리나에 대한 부시의 선언은 소위 자연 재해나 재난이 촉발시키는 공포의 정동을 활성화하면서, 거기에 자연스레 시장과 안보의 언어를 꼴라보한 것이다. 국가 안보의 민간 위탁이 자연화하는 정동적 회로가 생기는 것이다. 늘 무엇인가에 위협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촉발, 활성화하고 다시 그것에 의해 지지받으며, 바로 거기에서 작동하는 것이 9·11 이후 통치술의 방식이었다는 말이다. 당시 미국에 도입된 테러경보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그것이 신체에 직접 작동하며 공포의 정동을 활성화한 사례는 좀 더 직접적이다.

한국에서 2010년대 내내 문제적으로 이야기되던 혐오 정동도 이러한 메커니즘을 제외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2 가령, 1980년 5월 광주나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한 역사부정의 움직임이 대중의 정동 차원으로까지 본격 확산된 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듯 2010년대의 일이다. 2012년 겨울, 5·18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되었다는 주장을 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한 극우이데올로그는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어 이 판결에 탄력 받은 몇몇 커뮤니티 기반 네티즌들이 광주 폄하, 조롱 여론을 이어가면서 강력한 반동의 세력을 과시한다. 공론장에서의 판결은 일종의 시그널이 되어 반(半)공론장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왜곡과 조롱의 정동을 활성화했다.

대중 차원으로 역사부정의 정동이 확산되는 것은 시대의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커뮤니티 내 유머의 수준에서 유통되었다. 하지만 그 커뮤니티의 배후에는 특정 대기업, 언론이 있다. 이미 보도된 이 커넥션은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도 않는다. 한편 19대 대선을 앞둔 2017년 4월 초에는 다른 방식의 부정 전략이 등장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전국 대학가와 공무원 학원가에 ‘5·18 금수저’ 유인물이 돌고 있는 일이 화제가 되었고, 언론에서도 이를 조명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북한군 개입설’ ‘무장시민 폭동설’, 나아가 모독과 유머를 교란시키는 전략이 시효를 다해가자 이제는 ‘경제, 일자리 문제’가 혐오와 부정을 부추기는 전략의 배경이 된 것이다. 한편, 일상의 내밀한 영역까지 잠식해온 방법(특히 미디어 매개의 종편의 말, 어조, 강렬한 색채의 스튜디어 등등의 요소)도 실제 일상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통치권력의 정동 활용술이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정서나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동에 꽤 관심을 지녀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연구의 이론이나 방법론으로부터 구출해서, 삶과 세계에 어떻게 접속시켜 실천의 문제로 사유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신체적 차원에서의 잠재성·역능이 그 미결정성(잠재성)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해방의 역능으로 발현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되는 바가 많았다. 이미 국가-자본-미디어 등에 의해 조직화, 영토화된 평면에서 이탈하는 ‘존재론’을 과거 근대의 목적서사가 아닌 방식으로 고민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통치 권력에 의해 활성화되고 동원되고 활용되는 사례를 생각할 때 약간의 무력감 혹은 심적 저항감이 들기도 한다. 실제 오늘날 학술비평장에서 정동이 통치 권력 분석 혹은 백래쉬 분석 과정에서 사용되어온 측면 때문에 이런 느낌도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동의 또 다른 벡터

하지만 정동은 ‘정서변환양식’(신승철)이고, 잠재성의 발현 조건이라는 점을 다시 환기해둔다. 숨겨져 있고 맹아로만 존재하던 잠재성은 주변의 항들과 접속하면서 다른 벡터를 갖는다. 혐오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항쟁과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즉, 정동은 그 주위의 배치에 따라 다르게 활성화된다.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어떤 배치냐에 따라 A가 될 수도, B가 될 수도 있고, C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정동은 존재의 기본 조건이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배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앞서 통치술의 사례와 다른 벡터의 이야기이지만, 개인적으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증언, 구술 기록에 골몰한 일이 있다.3 증언, 구술이 나온 시기도 그 맥락도 다르지만, 실제 시민군에 가담했던 일반인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인 것이 발견되어 흥미로웠다. 증언자들(특히 시민군 참여자들)의 참여 과정은 명백히 ‘두려움→분노’(실제 증언자들은 이 단어들을 자주 구사한다) 쪽의이행을 보이고 있었다. 증언자들 대부분은 처음에는 이 폭력과 항쟁의 이유를 알 수 없어 그저 수동적으로 시위에 휩쓸렸고 두려워했다는 진술을 한다. 그리고 점차 상황 파악을 하게 되면서 그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어갔다고 한다. 폭력을 향해 각성된 ‘분노’는 시민군 참여의 직접적 계기였지만, 물론 여기에 놓인 각자의 정황들과 각자의 삶과 맥락 등의 배치는 더 살펴야할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컨대 그들은 처음부터 시민군에 가담하려 했다거나 어떤 윤리나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들의 증언 끄트머리에는 ‘정의, 조국, 시민의 힘, 도덕, 참된 인간, 역사의식, 민주화, 인간의 길’ 같은 말들도 거의 예외 없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고 시점에서의 사후적 의미부여였을 뿐, 실제로 그들은 방치된 시신을 우연히 목격하거나, 눈앞에서 시민들이 폭력에 쓰러져 죽어가는 장면을 직접 마주치면서 ‘공포’ ‘분노’를 느꼈고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무엇인가 해야겠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공포’ ‘분노’는 어떤 표상 앞에서의 돌발적 생각으로서의 감정(emotion)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이 진술한 감정은 생명에 대한 탄식으로 이어지게 하고, 나아가 무언가 하게끔 만든 순간의 일련의 과정은 분명 그 이음새로서의 정동이었다. 구체적 상황은 모두 제각각일지라도 분노, 죄책감, 비참이라고 간주된 첫 지각은 단지 즉자적 반응이 아니라 이행하는 정동의 한 계기였고, 실제 존엄을 위한 투쟁으로 전환한다. 어떤 감정이 역치를 넘어서는 순간들로 인해 그들은 행동했다. 이 규정하거나 포착할 수 없는 순간들의 다른 이름이 곧 정동이다. 5월 광주는 국가(민주주의)의 언어로 간명하게 역사화되어 왔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담론구성물에 미처 도달하지 못한 잉여로서의 정동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80년 5월 당시 11세였던 한 소녀는, 평소 돈과 관련해 “천하에 몹쓸 인간”, “인간말종”이라고 생각하며 창피해했던 할머니가 어느 날 계엄군에 쫓기는 대학생을 하룻밤 숨겨주고 나갈 때 돈을 쥐여 보내던 장면을 길게 회상한다. 말하자면 돈에 관한 한 일관되게 탐욕스러웠던 한 사람이, 계엄군에 쫓기는 대학생에게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돈과 호의를 베푼다. 타인에게 일관되게 고정된 정체성으로 비추어지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어떤 순간에는 그러한 정체성을 끊어내고 다른 존재, 다른 사건과 마주치면서 전혀 다른 삶의 인격이 된다. 잠시잠깐의 변화의 양태라 하더라도 어쩌면 정동의 힘에 거는 기대는 여기에 있다. 즉, 압도적으로 보이는 세계, 혹은 일상에 스민 통치술의 포섭을 이탈하는 방법은 (우선은 원리적이지만) 정동=잠재성의 회로를 다르게 만들기이다. 궁극적으로 다른 배치의 문제로 사유하는 것이다.

공통장으로서의 정동=잠재성 재전유하기, 혹은 다른 회로 만들기

앞서 대학의 강의평가 시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강의실이 소비자와 판매자가 만나는 곳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려 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수업의 연장선상에서 지적·정동적 만남과 대화의 기회를 만들고 우리가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서로 인지하게끔 노력한다. 선생-학생의 위계가 아니라 함께 수업을 만드는 동료로서 포지셔닝하자고 한다. 물론 이것이 능사일 리 없고, 문제를 개인화해서도 안 된다. 궁극적으로 학교를 향해, 그리고 그러한 기업모방을 강박시키는 교육부의 기조와 매년 실시되는 대학평가와 순위발표 및 그것을 전세계적으로 공모시킨 측을 향해서 목소리를 내고 압박해야 한다. 아직은 개인 수준에서의 일 정도에서 저항하는 셈이지만 최근 대학 내 연구자들의 오픈액세스 운동, 기존 플랫폼으로부터 자립하여 지식공유 플랫폼을 구축하려는 움직임, 또한 여러 대학 내 구성원들이 대학 공공성 확대를 위해 행하는 다양한 활동 등을 접하면서 연결되어야 하고 곧 연결될 수 있으리라는 고무감도 크다.

모든 존재는 고유의 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이 세상 모든 사물에 내재하고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가능성의 평면이다. 이를 브라이언 마수미는 존재권력(ontopower)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지금 시대의 통치술이 발 빠르게 전유하고 전략으로 삼은 장소가 바로 이 존재권력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존재에 내재된 힘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전유하느냐에 따라 다른 회로를 갖고 다른 창발성을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의 압도적인 조건처럼 보이는 것(가령 마수미라면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라고 했을 것이다) 안에서 내파하자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무언가가 절대적이고 압도적이라고 보이는 것은 단언컨대 우리의 착시다.

지금의 시스템과 통치술은 단지 공통장(commons)으로 주어져있는 같은 공간, 같은 내재성의 평면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빼앗고 있던 중일뿐이다. 소위 ‘바깥이 없’다는 과거의 패배와 자조의 말은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내파보다도 재전유의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수미는 “존재하는 유일한 지평인 생성(becoming) 위에서 계속하여 교전을 벌일 필요”(372쪽)가 있다는 말로 용기를 준다. 강조건대 이것은, 압도적인 시스템에 대한 내파가 아니라, 빼앗긴 공통장에 대한 재탈환의 메시지에 가깝다.

어쩌면 지금 현행화된 세계 너머를 보려는 의향을 갖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압도적이고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체감이나 경험을 특권화하지 않고 유보시킬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라고 하는 속삭임들이 지배적이지만, 너머의 것(잠재성, 정동)을 사유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속삭임은 실정화하고 자연화할 뿐이다. 통치권력은 그 너머의 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이미 알고 움직여왔다 해도, 그것은 같은 지평 위에서의 일이다. 잠재성은 설득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 자체의 조건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관점을 달리할 결단으로부터 다양한 카운터의 힘들이 발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1. 이 글에서 인용되는 브라이언 마수미의 말은 『존재권력』(갈무리, 2021)의 것들이다. 지면관계상 페이지는 생략하고 따옴표로 표기했다.

  2. 이 부분은 졸고 「소년은 왜 ‘꽃핀 쪽’으로 가라고 말하는가 : ‘기억-정동’ 전쟁의 시대, 『소년이 온다』(2014)가 놓인 자리」(『움직이는 별자리들』, 갈무리, 2019) / 「미끄러지고 연결되는 것들」(『무한텍스트로서의 5·18』, 문학과지성사, 2021)에서 상세히 논한 것에서 잠시 갈무리해왔다.

  3. 이 글에서 언급하는 증언 기록은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참고했다. 문선희 찍고 엮음,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 담벼락에 묻힌 5월 광주』, 난다, 2016. /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1990,

김미정

문학을 경유해서 글을 쓸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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