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발명] ㉓ 지역과 돌봄

셀프케어 시장의 성장과 함께 돌봄은 마치 아기돌봄, 노인돌봄, 건강돌봄 등 취약계층이나 건강상 독립이 어려운 자들을 대상으로 그 범위가 좁혀지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 키우던 반려동물을 잠시 맡기거나 아이의 점심을 부탁하는 등의 일상적 돌봄이 모두에게 필요하다. 지역은 ‘관계돌봄’의 장이 되어야 하며 공동의 자원과 시간을 지역 안에서 나누며 마음을 만들고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 돌봄의 실천이 그물망 공동체로 재구성되면 얼마나 좋을까?

돌봄 없이 살 수 있을까? 돌봄 없이 사회가 지속될 수 있을까? 무늬뿐인 돌봄(Care Washing)의 최소한의 복지 정책과 시장에서 최대이윤을 위해 판매되는 셀프케어(Self Care)상품을 내려놓고 잠시만 생각해보자. 그러면 누구도 서로 돌봄 없이는 식의주(食衣住)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활동을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또 공기, 물, 나무 등의 자연과의 서로 돌봄 없이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인간을 포함해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적으로 엮여있고 협동적으로 생존하는 중이다. 돌봄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서로 보살피는 활동이다.

하지만 시장영역으로 왜곡되고 사회적으로 한계 지어진 지금의 돌봄은 중앙 집중적인 관리와 효율, 상품시장 확대를 위한 분리와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산업화과정과 신자유시장을 배경으로 활동한다.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국가와 기업은 시민들에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혼자 살아가기를 강요하고 있다. 도움받기를 청하는 의존적인 태도는 수치스러운 일이 되었고 돌봄은 능력 없는 나약한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시혜적인 복지활동으로 대상과 범위가 축소되었다. 한편으로 아기돌봄, 노인돌봄, 건강돌봄 등 개인에게 필요한 많은 돌봄이 값비싸게 구매해야할 셀프케어(Self Care) 상품이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 시켜나간다.

승자독식의 신자유시장의 확장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정도로 구조화되는 불평등을 가져오고 있다. 그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국가적 위기의 해결책으로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 보고서에 사회보장제도인 복지가 등장한 것처럼 21세기 사회적인 위기상황에서 돌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타성적으로 제공되는 정책과 시장에서 교환되는 상품으로 불평등의 해소도 지속가능성을 약속할 수 있는 돌봄의 회복도 기대할 수는 없다. 상호의존해서 살아가는 지속가능한 사회문화(시스템)로 돌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성과 교환의 돌봄과 자발적이고 호혜적인 돌봄을 구분 짓고 돌봄에 잘못 씌워진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는 동시에 회복의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돌봄을 약한 사람을 위한 상품으로 인식

돌봄은 ‘신체’ 보조에 국한된 헬스케어 상품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돌봄은 신체와 마음 모두의 순환에 기초하고 있다.  사진출처 : truthseeker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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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신체’ 보조에 국한된 헬스케어 상품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돌봄은 신체와 마음 모두의 순환에 기초하고 있다.
사진출처 : truthseeker08

돌봄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돌봄이 여성적인 일과 나약한 사람들에게 제공된다는 관습적인 인식과 태도이다. 오래된 가부장제 관습에서 돌봄은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는 등의 집안일이 되어 여성의 성역할로 강요되었다. 여성의 역할이 된 돌봄은 사회활동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일이면서 공동체도 정부도 관여하지 말아야 할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한 지금까지도 아이를 키우고 식사를 준비하는 생명활동의 가치는 가치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여성들은 중요한 살림을 외면할 수도 혼자서 감당할 수도 없는 이중적으로 구속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여성의 일과 사적인 활동으로 오해된 돌봄을 이제는 성역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돌봄의 사회적인 가치를 회복하고 성 평등한 상호역할로 작동되는 돌봄의 시작일 수 있다.

두 번째 오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갈라치는 정상과 비정상, 우성과 열성으로 분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낳은 능력 있고 건강한 인간은 돌봄이 필요 없고 돌봄은 취약계층이나 건강상으로 도움이 필요한 독립 능력이 없는 나약한 인간들의 요구라는 관습이다. 돌봄을 받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무능력함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일이고 사회적으로도 곱지 않은 시선과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 된다. 이렇게 돌봄은 외면당한다. 이 생각이 아직 까지는 돌봄을 세대와 계층으로 분리하고 반목시켜 선별적 복지의 이유가 되고 역으로 보편적 복지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돌봄을 나약하게 보고 독립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전체화, 획일화, 개체화된 사고에 묶여 상호취약성과 상호연결성으로 살아가는 생명활동의 순환성, 다양성, 관계성, 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서로가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은 독립은 허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전국적 확산과 경제력에 의한 국가 간의 백신 불평등이 새로운 변종을 탄생시키는 것만 보더라도 모두가 모두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호연결성의 불가분에 관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 오해는 생활 전체적으로 연결되고 순환되는 돌봄이 파편화되어 신체적으로 직접 누군가를 돌보는 활동에만 제한된다는 관습이다. 신체와 마음이 함께 있는 것처럼 돌봄을 신체 돌봄으로 한정할 수 없다. 상호의존적이고 협동적인 생활의 범위는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식물을 이웃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하거나 친구에게 책을 빌리거나 농촌에서 수확한 작물을 도시민이 이용하듯이 생명활동 하나하나가 큰 하나로 연결되어 작동된다. 파편화된 돌봄은 시장에서 쇼핑하듯이 살 수 있는 기업들이 만든 돌봄 상품일 뿐이다. 돌봄은 생활 전체를 포괄한다.

돌봄을 둘러싼 세 가지 오해를 넘어

이제부터라도 돌봄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돌봄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지 않는다면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와 불평등, 고령화, 1인 가구의 증가, 일자리 부족, 지역소멸 등의 사회문제를 정부와 시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순환성, 중복성, 양면성, 탄력성, 증여성을 특징으로 하는 돌봄 없이는 신자유시장이 가져온 복합적인 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

(1)순환성 :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활동이 결국 인간에게 돌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노인을 돌보는 것은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돌봄을 받는 것과 같다.

(2)중복성 : 돌봄은 파편적이지 않다. 아이를 돌보는 일부터 일자리까지 다양하게 중층적으로 중복되어있다.

(3)양면성 : 누구도 돌봄을 받을 수만 없고 돌볼 수만도 없다. 자연의 도움으로 또는 농기계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는 것은 동시에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4)탄력성 : 가까운 가족을 넘어 또 눈에 보이는 돌봄을 넘어 돌봄은 사건처럼 횡단한다. 재난지역을 돌보는 일은 계획에 없던 돌봄이다.

(5)증여성 : 교환이 아니라 호혜적으로 선물 되는 돌봄으로 누구도 돌봄에서 소외당하지 않을 수 있다.

돌봄의 다섯 가지 특징을 가로질러 돌봄이 작동되도록 하는 힘은 (호혜적)관계다. 정부와 시장의 무늬만 돌봄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돌봐주는 돌봄은 관계로 구분할 수 있다. 관계는 공감과 공명과 같은 정서적인 친밀감이 형성될 때 증폭되기 때문에 공감과 공명의 장(場)이 되는 지역은 돌봄의 중요한 인프라가 된다. 아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 친구를 돌봐주듯이 관계에서 돌봄이 만들어지고 역으로 돌봄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는 DNA구조와 같은 상호과정이 지역에서 일어난다. 돌봄 연구자와 활동가가 지향하는 보편적 돌봄은 지역 안에서의 돌봄을 중심으로 정부의 복지와 시장의 셀프케어(Self Care) 상품으로 구성될 수 있다.

돌봄의 실천이 공명을 통해 공동체 구성으로

넒은 돌봄의 실천이 순환하면서 삶의 질이 향상된 그물망의 공동체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사진출처 : piqs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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넒은 돌봄의 실천이 순환하면서 삶의 질이 향상된 그물망의 공동체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사진출처 : piqsels

지역에서 관계돌봄(무늬뿐인 돌봄과 구분할 수 있는)의 장(場)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공감과 공명을 높여 밀도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인류문화학에서는 공동의 장소감(Sense of Place)과 장소애(Topophilia)를 배경으로 서로 연대하고 공경하는 생활범위를 50가구 정도로 보고, 지역학자 샤프트 Shaftoe. H는 휴먼스케일의 크기를 인구 5,000명 이하 직경 1㎞ 이하의 크기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정도라고 했다. 그렇다고 제한된 지역으로 돌봄이 한정되지는 않는다. 나무뿌리의 프랙탈(Fractal) 구조처럼 돌봄은 지구적으로 확장되고 하나의 전체로 수렴된다. 지역에서 생성된 돌봄이 더 큰 지구까지로 반복적으로 확장되고 수렴되는 창조적 반복이다.

공동의 자원과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지역 안에서 관계돌봄의 마음이 생기고 행위의 네트워크가 생성된다. 지역의 자원으로 내발적 발전을 실천하는 협동조합은 주민들을 채용하면서 주민들을 돌보고 주민들은 협동조합 조합원으로 협동조합을 돌보는 행위를 한다. 중고 플리마켓은 구매 없이도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활을 돌본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아이는 멀리 있는 친척보다 이웃들이 돌봐줄 수 있다. 지역단위의 타임뱅크는 각자가 가진 재능과 여분의 시간을 나누며 서로를 돌볼 수 있다. 이렇게 지역 안에서 여러 가지의 돌보는 활동들이 각자의 이름과 필요를 가지고 활동 중이다.

더 늦지 않게 지역에서 관계돌봄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더 많은 더 넒은 돌봄의 실천이 순환하면서 삶의 질이 향상된 그물망의 공동체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덧붙이는 글

사랑과 살림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찾는 돌봄을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열림’과 ‘나눔’, ‘낮춤’ 등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열림’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또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가 어떠한 행동과 말, 요구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눔’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방과 공유하는 일입니다. 아니 상대방이 내 모든 것을 가져간다고 해도 전의 개의치 않고 오히려 고마워하는 일입니다.

‘낮춤’은 상대방의 감정, 생각, 이익 등보다 자신의 감정, 생각, 이익 등을 앞세우지 않는 일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그것을 이루도록 애쓰는 일입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일.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완전하다고 인식하는 일.

‘사랑’은 함이 없이 다독거리는 일.

‘사랑’은 상대방의 빈 곳을 채워주는 일.

‘살림’은 상대가 성찰하도록 도와주는 일.

‘살림’은 성찰을 재촉하지 않는 일.

이무열

지역브랜딩 디자이너. (사)밝은마을_전환스튜디오 와월당·臥月堂 대표로 달에 누워 구름을 보는 삶을 꿈꾼다. 『지역의 발명』, 『예술로 지역활력』 책을 내고는 근대산업문명이 일으킨 기후변화와 불평등시대에 ‘지역이 답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역발명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하며 곧 지역브랜딩학교 ‘윤슬’을 시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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