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5
10년 전, 나는 ‘관상’에 큰 관심을 가졌었다. 지금은 거의 까먹었지만, 여전히 기억하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입꼬리에 관한 것이다. 이유는 내 아버지의 입꼬리가 굉장히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아래로 처진 입꼬리. 아마 삶의 무거움이 아버지의 입꼬리를 연신 밑으로 잡아당겼을 것이다. 혹은 삶의 시련을 마주할 때마다 입을 굳게 닫아가며 버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가끔 힘들 일이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입을 삐죽 내밀며 입꼬리를 아래로 내린다. 그러나 이는 좋지 않은 관상이라고 들었기에 입꼬리를 내리고 있는 나를 인식할 때마다 억지로 미소 짓는다. 관상은 존재와 세상의 관계를 읽어내는 것이다. 비록 인간 중심적이고 속물적인 기준으로 단정 짓는 관계이긴 하나, 나름대로 흥미롭다. 아버지의 입꼬리에서 그의 인생을 유추했듯 존재의 생김새는 습관과 밀접하다. 습관은 얼굴뿐만 아니라 손, 발, 몸짓, 나아가 마음의 모양도 만든다. 생김새는 존재와 주변이 관계하며 생긴 습관의 총체다. 그리고 습관을 지닌 존재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비인간동물은 당연하고 사물까지도 그 외관에 습관이 깃들어있다. 딱딱하고 반듯하며 무리를 이루는 보도블록의 습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한다. 잠깐 허무맹랑한 상상을 해보자. 만약 보도블록이 인간의 살처럼 말랑말랑하고 따듯하여 피가 팽팽 돈다면 우리 다수는 맨발로 그 위를 걷지 않을까? 아니 그것을 밟을 생각이나 할까? 기존의 관습과 전혀 다른 새로운 습관이 창발할 것이다. 외형은 표면적, 실용적 이유 이상으로 존재와 깊게 연결되어있다. 존재 주변의 모든 생태계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해석하고 ‘연결성’과 ‘일치함’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에 이바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곳저곳 건너다니며 새로운 형태의 마음을 만들며 세상을 이롭게 한다. 내가 쿵덩야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공부하고 그 모습이 내포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중 하나이다. 나와 쿵덩야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습관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가 닿을지 예상은 할 수 있지만, 확신할 순 없다. 그래서 활동이 흥미롭다.

‘나’를 습관의 총체로 이해하는 관점을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다른 존재의 습관을 인정하고 그와 일치하고자 하면 인간과 사물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치함이 일상적이라면 세상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채로울까. 이런 방식으로 나를 확장하는 것은 나라는 개체가 타자의 우위에 설 능력을 갖춘다는 게 아니다. 내가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겸손한 방식으로 다른 존재들을 고려하는 것이다. 베풀 기회를 주는 것에 감사하는 불교의 ‘보시’처럼 존재로서 존재를 보듬는 일이다. 계급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약자를 배척하는 방식으로서의 자기 계발 논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예술로 생존하기’는 비록 큰 호응을 얻지 못하더라도 분명 세상에 필요하다.
23.12.28
일본에서 오랜만에 한국으로 놀러 온 j를 위해 〈이중이의 작업 세계 투어〉를 준비했다. 나와 j, s는 똥을 보관한 작가님네 밭에 가서 똥을 감상한 뒤 농막에서 한잔 술을 기울이고 신나게 작업 얘기를 했다. 이후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난 지렁이의 위대함을 설파했다. 그러다 j가 견훤의 아버지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지렁이었다는 것이다. 아자개가 밤마다 연못에서 목욕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견훤의 적들은 연못에 소금을 풀어서 그를 암살했다고 한다. 나는 “그럼 아버지 삼투압으로 돌아가셨네”라고 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웃겼는지 우리는 버스 안에서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웃었다. 불광역에 도착해서 쿵덩야를 만났다. 친구들에게 멀리서 지켜보며 사람들 반응도 살피고 내가 쿵덩야 닦는 모습도 지켜보라고 했다. 쿵덩야를 닦고 친구들에게 감상을 물었다. 주변 사람이 많지 않고 어두워서 한 분 빼고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쿵덩야와의 만남이 끝나고 도로에서 무단횡단하는 사람을 사진 찍었다. j는 너무 춥게 입고 와서 그런지 덜덜 떨었다. s가 갑자기 천천히 무단횡단을 했고 우리는 그 모습을 찍은 뒤 빠르게 다른 친구의 집으로 갔다. 이후 작업 이야기며 우스갯 소리를 나눴는데, 마지막에 자각몽 이야기가 나왔다. 난 어렸을 때부터 자각몽을 꿔서 꿈을 지배하는 것이 익숙한데, 재입대하는 악몽을 자주 꾸는 j는 왠지 그 이야기를 무서워했다.
23.12.31
눈이 녹으면서 발생한 습기로 온 동네가 축축하다. 혁신파크도 그랬다. 쿵덩야와 주위의 모든 돌이 물기를 머금어 어두웠는데 그래도 쿵덩야는 다른 보도블록과 명도의 차이가 있어 쉽게 눈에 띄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이고 일요일이다 보니 혁신파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쿵덩야를 닦으면서 주위의 돌들을 봤다.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으로 칫솔질을 하다 보면 한두 번씩 주변도 스치게 되는데 그것이 축적되다 보니 쿵덩야와 맞닿은 주변 돌들 가장자리도 하얬다. 그 모습을 보니 돌과 돌의 그 경계는 큰 의미가 없고 주변 모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24.01.02
써야 할 글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독서실에 가서 글을 쓰다가 중간에 나와 쿵덩야를 닦고 다시 독서실로 돌아와서 글을 마감하고 원고를 보내니 오후 11시였다. 집에 가서 자축하려고 막걸리를 샀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소주가 한 병 있었다. 결국, 둘 다 마셨고 혀가 꼬부라졌다.
24.01.04

피부과에 갔다가 쿵덩야에게 가는 길에 부서진 보도블록이 방치된 모습을 봤다. 예전 같았으면 관심도 없었을 텐데 쿵덩야와 관계한 뒤 사물을 보는 관점이 많이 변한 지금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잠시 바라봤다. 주위의 행인들은 그런 나를 보며 무슨 신기한 구경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내가 보는 방향을 따라서 봤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찾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듯 그냥 지나쳤다. 부서진 돌 조각일 수도 있는데 그 앞에 멈춰서 사색하는 내가 참 이상했다. 혁신파크에 도착했다. 아침에 비가 좀 내렸다가 햇볕이 나서 바닥이 말라가고 있었다. 쿵덩야는 저번과 같이 얼룩무늬를 만들었다. 언제 봐도 신기했다. 최근 쿵덩야와의 관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 같다. 매일 일상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되다 보니 이상함, 특별함, 새로움 등으로 시작했던 초기에 비해 안정됐다. 나는 새로운 사고와 글감을 위해 쿵덩야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자극을 찾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묵묵히 일상을 이어나가야 하는 걸까?
24.01.05
친구의 작업실 이사를 도와주고 맥주를 얻어 마셨다. 감자튀김이 4,000원인 이런 가게는 참 오랜만이었다. 떡튀김이라는 메뉴도 좋았다. 술자리는 재미있었는데 내가 요즘 좀 건방지게 말하는 것 같아서 자기반성을 했다. 마치 예능프로그램의 MC처럼 각자의 특성을 파악해서 재미있는 주제를 이끌어내고 때론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며 똑똑한 척을 한다. 이후 친구와 노래방에 갔는데 친구가 마침내 고음 내는 법을 터득해서 신기했다. 불광역에 도착하니 새벽 1시쯤 됐다. 주위에 따릉이가 없어서 혁신파크까지 걸었다. 옷을 가볍게 입어서 추웠지만 가야 한다. 쿵덩야에게 도착했다. 잘 닦고 입술을 댔는데 왠지 그에게 소원을 빌고 싶어졌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나약한 인간인 나는 정해진 위치에 항상 같은 모습으로 견고하게 존재하는 쿵덩야에게 기대고 싶은 걸까? 애니미즘에 관해 잘 모르지만, 사물에 영혼이 있고 그것을 숭배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쿵덩야가 사람이 아니라면 신이다.
24.01.07
지금까진 단 하나의 보도블록을 쿵덩야로 생각하고 그것만 닦았다. 그를 닦을 땐 칫솔에서 튄 물이 주변 보도블록에 묻는다. 더러운 것이 경계 밖으로 쌓이고 안은 깨끗해진다. 이는 그를 아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의 물리적 경계를 생산 과정에서 규정된 네모반듯한 경계가 아닌 우리가 관계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범위로 확장하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생각하니 물이 튀어서 변화가 생긴 주변의 보도블록도 쿵덩야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쿵덩야일까? 그 위를 지나는 개미와 딱정벌레, 그를 밟는 사람들 역시 쿵덩야인 것은 아닐까?
24.01.09
눈이 왔다. 혁신파크에도 눈이 많이 쌓였다. 관리하시는 분들은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보도블록 이곳저곳을 빗자루로 쓸어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비질 덕분에 쿵덩야도 눈에 파묻히지 않고 드러나 있었다. 만약 이 일대 전부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면 그를 바로 찾을 수 있었을까? 쌓인 눈을 파헤치며 그를 찾고 언 손을 호호 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