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㉑ “나 혼자 일어나 볼란다. 나또 바라.”

퇴원을 한 보성댁은 미자의 돌봄을 받으며 지낸다. 보성댁은 빠른 회복을 바라며 스스로 움직여 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보성댁은 주말에 쉬러 가는 미자에게 아들의 밥 걱정을 하다가 자식들을 화나게 만든다. 요양보호등급 심사를 앞두고 자식들은 요양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등급이 나오길 바라고 보성댁은 자신이 그런 것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보성댁이 퇴원하게 되었다. 섬망 증상을 보여 1인실에서 이틀을 지낸 후 증상이 나아져 다인실로 옮겼었다. 몸의 고통을 조금 덜자 보성댁은 병원에 붙들려 있는 딸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얼른 몸이 나아서 딸의 돌봄이 필요없는 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움직이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했다. 섬망이 와 있을 때 몸부림을 치다가 소변줄을 뽑아버려 스스로 걸어서 화장실에 가야했고 나이 들면서 소변이 자주 마려워 온 터였다. 화장실에 가게 되면 딸이 부축해서 일으켜줬지만 어떻게든 혼자 일어날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딸의 부축 없이 일어나려는 노력을 했다.

“아이, 나도바야. 나가 혼자 일어나 볼랑께.”

“엄마, 엄마가 단순히 근육이 문제가 돼가꼬 이러는 거면 나도 엄마 혼자 인나는 연습을 해야흔다고 생각해요. 근디 지금 엄마는 근육이 아니라 뼈가 부서진 거라 뼈가 붙을라믄 힘을 주면 안 돼요. 미안해도 당분간은 이렇게 잡아줘야 한당께요.”

“이 근다냐.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보성댁은 같은 말과 행동을 화장실에 갈 때마다 되풀이했다.

“아이, 나 혼자 일어나 볼란다. 나또 바라.”

“엄마, 몇 번을 말해요. 엄마는 뼈가 붙을 때까지 혼자 인날라고흐믄 안 된당께요.”

“이이, 알았다 알았어.”

미자는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게 하는 엄마에게 짜증이 났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짜증을 내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통증이 조금씩 잦아들고 일주일쯤 지나자 순회진료를 온 담당의가 말했다.

“이제, 내일 퇴원하시게요.”

“이? 나가 아직도 아픈데 퇴원을 흔다요?”

“예, 어르신. 인제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냥 댁에 가셔서 움직이지 말고 쉬심서 차차 나아가야제 병원에서는 인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내일 오전에 퇴원하십시다.”

퇴원한 보성댁은 퇴직한 막내 미자가 돌보게 되었다.
사진 출처 : guvo59

아니, 아직도 이러고 아픈디 퇴원을 하란다고? 보성댁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미자는 제 오빠와 전화를 하고 퇴원 준비를 해서 함께 집으로 왔다. 그렇게 딸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퇴원하기 전에 병원에서 알려준 대로 응식이 의료기 대여점을 찾아 환자용 침대와 보행보조기를 빌렸지만 침대는 퇴원에 맞춰서 도착하지 못했다. 원래 쓰던 침대에 눕는데 진작 프레임을 빼버리고 매트리스만 두고 쓰던 거라 높이가 낮다보니 앉는 것도 눕는 것도 힘들었다. 침대가 오는 데에는 일주일쯤 걸린다고 했다. 퇴원했다는 소식에 큰딸이 사위와 함께 왔다.

“어머니 좀 어쩌시요.”

큰 사위가 물었다.

“아, 아직도 아픈디 병원에서 퇴원하라고 헝께 퇴원했네.”

미자가 옆에서 덧붙였다.

“골다공증 땜에 골절된 거라 인자는 시간이 지나야 뼈가 붙는데요. 병원에서 있어 봐야 약 주는 것밖에 못 해준다고 집에 가서 쉬면서 회복하라대요.”

“아, 어무니. 그러믄 집에 와서 있는 게 맞겄네요.”

“이 그런당가.”

“예, 그래도 처제가 퇴직해가꼬 있응께 엄니 수발도 하고 쓰겄소.”

“이, 그래.”

미자가 정년을 채우지 않고 퇴직을 하겠다고 했을 때 보성댁은 아까운 생각이 앞섰다. 팔 남매 중 여섯째인 미자가 대학에 가겠다고 나섰을 때 어찌 감당하나, 걱정이 앞섰다. 미자가 운이 좋았던 건지 미자의 졸업에 맞추어 순천에 있던 농업전문대학이 4년제 대학으로 변경되면서 사범계열 학과가 생겼다. 그 당시에는 사범대가 다른 과보다 등록금이 저렴했고 집에서 다닐 수 있어 미자는 대학에 가겠다고 졸라댔다. 사범대 졸업만 하면 다 발령내준다니까 졸업만 하면 나가 벌어서 동생들 학비도 대줄 수 있을 거라는 게 미자의 주장이었다.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어찌저찌 입학했고 무사히 마쳐서 3월에 발령을 받아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힘들여 보낸 걸 생각하면 아까워서 “엥간흐믄 끝까지 흐지 그냐” 했지만 미자는 이젠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했고 그런 미자가 섭섭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성댁 자신이 혼자서는 지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보니 딸이 정년까지 가지 않고 퇴직한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미자도 좀 힘들긴 했지만 자신이라도 이렇게 있어 어머니를 돌봐 드릴 수 있게 된 게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없었다면 엄마를 어찌했을까를 생각하면 막막했다. 사위랑 큰딸이 가져온 과일을 깎아줘서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고 미자와 둘이 남았다. 큰딸이 사다 준 반찬거리로 저녁을 준비해 차려서 가져왔다.

“엄마, 저녁 드시게 일어나세요.”

미자가 부축하며 일으키려 하는데 몸이 당겨지니 또 통증이 몰려왔다.

“아, 가만 있어 바라. 나가, 나 몸 좀 잔존조르고, 살살 살살”

미자는 아, 엄마 아프실 건디 나가 정신이 없네,하면서 보성댁이 하자는 대로 천천히 일으켜 의자에 앉게 부축을 해줬다.

“아그매! 아이고 왜 이리 아프다냐. 후후 아이고 죽겄다.”

혈관 스탠스를 할 때에도 이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이번엔 너무 심하게 아프다 싶었다. 앉아 있기만 해도 통증이 몰려 와 밥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아이 고만 묵을란다. 나 허리가 너무나 아파서 안 되겄다.”

“고만 잡술라요? 너무 째끔 잡샀는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자는 자기 밥을 다 먹은 후에는 상을 치우고는 엄마 양치하라고 물이 든 컵과 작은 대야를 갖고 왔다. 보성댁이 이를 닦는 동안 대야를 받치고 있다가 양치를 끝내자 대야와 보성댁의 틀니를 갖고 화장실로 갔다. 보성댁의 양치를 도와주다 보면 대야에 뱉어놓은 것을 볼 때도, 화장실에 가서 틀니를 씻을 때도 미자는 좀 비위가 상했지만, 엄마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없는 상황이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을 먹고 자리에 누운 보성댁은 텔레비전 리모콘을 손에 쥐고 채널을 돌렸다. 병원에 있을 때 트롯 방송을 못 본 게 아쉬웠더랬다. 병원에 놓인 환자용 텔레비전에서는 기본 채널만 나왔고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 채널은 볼 수 없었다. 채널 선택권을 독점할 수 있는 특실에 있을 때에도 트롯 방송을 볼 수 없었다. 집에 오니 그동안 보지 못한 한풀이라도 하는 듯, 보성댁은 《미스터 트롯》, 《미스 트롯》 채널만 틀어 놓고 있었다. 병수발을 하고 있는 미자도, 종종 들르는 응식도 해당 채널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별 말은 없었다. 그렇게 트롯을 보다 잠이 들었다가도 통증 때문에 잠이 깨기도 하고 소변이 마려워서 잠이 깨기도 했다. 화장실에 가려면 혼자 갈 수 없어 딸을 불러야 했다.

“아이 아이, 미자야.”

미자는 잠이 깊이 들지 못 하는지 보성댁의 부름에 답하는 데에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보성댁을 부축하러 왔다. 보행보조기를 침대 옆에 두고 보성댁이 일어서면 바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미자의 부축을 받아 보행보조기를 잡고 서면 문턱이 걸려서 미자가 보조기의 앞쪽을 들어 밖으로 나오게 도와줬다. 변기에 앉을 때에도 허리에 힘이 들어가면 통증이 몰려와 미자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일어설 때에도 미자가 잡아줘야 했다.

퇴원 후 첫 주말이 돌아오자 미자는 집에 갔다 와야겠다고 했다. 응식에게도 이야기를 했는지 토요일 아침을 먹고 나자 응식이 들어왔다.

“아이, 나 왔응께 니 얼릉 챙겨서 가라.”

“어디 간다냐.”

보성댁이 물었다.

“아, 엄마 나가 어저께 이약했잖아요. 나도 집에 좀 갔다 온다고요. 병원에 있느라 우리 집에 열흘이 넘게 못 갔잖아요. 가서 우리 아들 반찬도 좀 해 놓고 집안 꼴이 어쩐가도 좀 봐야할 거 아니요.”

“이이 참, 그랬지. 그래 갔다 와야제.”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문득 보성댁은 걱정이 되었다. 아니 자가 가블믄 즈그 오빠 밥은 누가 준다냐? 이번에 이렇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자식들이 찾아오면 반찬도 해놓고 어떻게 해서든 밥을 챙겨 줬는데 자신이 그럴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보니 자식들 밥은 누가 챙겨주지? 미자가 안 가고 챙겨주믄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중 자기 짐을 챙겨 나가려는 미자를 보니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이, 느그 오빠 점심은 어쩌끄나.”

보성댁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자는 열이 확 올랐다. 보성댁에게 한마디 하려고 돌아보려는데 응식이 먼저 버럭했다.

“아니, 야가 지금 엄마 땜에 멫날 메칠을 애썼는디 나가 밥 못 먹을께비 그런 소리를 한다요? 야도 즈그 집에도 가보고 좀 쉬어야 할꺼 아니요. 엄니는 먼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러신다요?”

“아이, 느그 오빠 점심은 어쩌그나.”
사진출처: yuri9092

열이 확 올라 뭐라고 하려던 미자는 응식이 흥분해서 버럭버럭하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 갔다 올게요 하고 나섰다. 오빠가 흥분하여 소리 지르는 걸 보고 자신은 별말 않고 나왔지만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뒤엉켰다. 그 생각들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해서 견디기가 어려워 신호대기하는 중에 선자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나 오늘은 우리집 가고 있어. 응식이 오빠 와서.”

“이 수고했다. 조심히 갔다 와라.”

“언니 근디 나가 나올라고 흔께 엄마가 나한테 머라 근지 안가? 느그 오빠 점심밥은 어쩌끄나 그러시대.”

“아이고 엄마는 왜 또 그런 소리를 하고 계신다냐.”

“그 소리를 들응께 나가 열이 확 뻗쳐서 뭐라 할라 그랬는디 오빠가 먼저 엄마한테 버럭버럭해서 그냥 난 암말도 안 하고 나와부렀어. 오빠가 그동안 고생했응께 야도 즈그집 갔다오고 쉬기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가 밥을 못 먹을깨지 그런 소리 하냐고 버럭버럭 하길래 난 그냥 암말도 안 했어.”

“긍께 말이다. 니도 그만큼 했으믄 좀 쉬기도 해야지 엄마는 왜 그러신다내, 참”

“그동안 오빠가 엄마한테 성질부리는 걸 보고 오빠는 왜 저렇게 엄마를 야단을 쳐쌀까 생각했는데 나가 엄마랑 오래 있어봉께 오빠가 왜 그러는지를 알겄드라고.”

“금메 말이다.”

“아니, 엄마가 맨날 자식들 밥 챙겨주다가 못 챙겨주게 되니까 맘이 안 좋기는 흐시겄제. 근디 그걸 그 많은 자식들 중에 왜 나한테만 요구하시냐고. 나도 쉬어야 엄마를 길게 돌볼 거 아닌가”

“그렁께, 하 참 엄마가 왜 그러신가 참 이해가 안 된다.”

세 자매 중 둘째 미선은 멀리 있고 자주 보기도 어렵기도 해서, 선자와 미자는 서로 각별했다. 속상하거나 답답한 일 있으면 미자는 언니에게 전화하고 찾아가기도 하며 하소연도 하고 속풀이도 해왔던 터라 이번에도 어머니인 보성댁으로 인해 응어리 맺힌 마음을 언니와의 통화를 통해 달랬다, 아들이 혼자 지내고 있는 집에 가니 청소도 가끔 하고 세탁기도 한 번씩 돌리고 한 모양이지만 먹을 것은 부실해 보였다. 김치를 제외하고는 밑반찬이랄 게 없어 장을 봐서 아들이 좋아할 만한 반찬을 몇 가지 해놓고 자신이 없는 동안 미처 못한 부분들을 정리하고 엄마가 좋아할 만한 반찬거리도 준비해서 일요일 오후에 다시 보성댁에게로 갔다. 그러고 난 후 주말이면 응식뿐 아니라 멀리 사는 자식들이 번갈아 보성댁을 보러 왔어서 미자는 주말마다 자기 집에 다녀오곤 했다.

요양보호등급을 받으려면 심사를 거쳐야 했다. 사진 출처: DCG_MAK

어느 날, 퇴근길에 들른 응식이 요양보호등급 심사를 신청했다고 했다. 퇴원할 때 보성댁이 나이도 있고 힘든 것도 있으니 요양보호등급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요양보호등급에 따라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주고 의료용 침대나 보행보조기 등의 임대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미자가 비록 퇴직을 했으나 몇 달이라면 몰라도 언제까지고 보성댁을 돌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성댁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 후에라도 요양보호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미자는 보성댁을 혼자 두고 외출할 수가 없어 응식이 그런 일들을 알아보고 다니는 중이었다. 요양등급 심사를 받을 예정이라는 말에 다른 자식들도 그런 문제를 좀 알 봤는지, 이 사람 저 사람 미자와 보성댁에게 전화해 요양보호등급을 ‘잘’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한 마디씩 보탰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이야기의 핵심은 최대한 아픈 걸 티내고 가능하면 치매에 걸린 척이라도 해서 요양보호등급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심사흐러 나오믄 엄니 못 인난다고 엄살도 막 피우고, 멀 물어봐도 통 모른다고 그러씨요. 이.”

“엄니, 미자가 언제까지 여그가 있으꺼이요. 긍게 등급 나와야 돼요. 잘 해야쓰요 이.”

“아이, 니가 엄니한테 단단히 말해라. 그 심사흐러 나온 사람들 앞에서 머 아는 체 하지 말고 그냥 다 몰른다고 해라 그래.”

“엄마, 그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 세우지 말라요. 모른 것도 아는 체 헐라고 흐지 말고 그래라 그요.”

그런 말들을 들으며 보성댁은 이 알았다 알았어 하면서도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나가 그러고 못 씨게 됐다고 해야 흐는 것이까? 나가 그래도 팔십여섯살까지 성가대를 흔 사람인디 멍청이 시늉을 해야 하는 것이까? 미자가 언제까지고 자신과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정말 ‘못 쓰게’ 되어 버린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자식들에게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요양등급 심사를 할 사람이 목요일 오후에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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