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19시대와 구성적 인간론①

팬데믹 상황에서 기존의 근대적 인간론과 사회상은 작동을 멈추고 만다. 기존의 사회 공동체는 더 이상 우리 삶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그저 문을 열고 나가면 존재하던 사회가 어디에도 없다. 생활반경의 축소에 따라 활력이 소진되고 ‘격리된’ 개인들은 이번 기회를 통하여 삶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한다는 것도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사회는 늘 새롭게 구성해야만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자원이 생겨야 활력이 생기던 상황이 아닌, 활력이 있어야 자원이 생기는 전도된 상태가 되었다. 활력. 바로 여기서 모심, 돌봄, 섬김, 보살핌 등이 모든 활동의 원천임을 분명히 하는 정동경제를 만난다.

1. 프롤로그 : 생명위기 시대에 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기

팬데믹 상황이 찾아오자,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지구를 청소하기 위한 파견대로 부르는 사람조차도 간혹 있다. 인간의 오만과 자만이 현재의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는 것은 명확하나,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전환사회를 만들 주체성도 역시 인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근대의 인간론은 완고한 자아(ego)나 원자화된 개인(individual), 선험적인 책임주체(subject)였다. 동시에 이들이 만들어나간 사회는 성장의 단물을 먹고 증식하는 무차별사회, 경관적 사회, 사교적 사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의 인간과 사회의 양상은 팬데믹 상황에서 돌연 기능정지가 되고 만다. 오히려 인간이나 사회를 구성하는 실천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러한 색다른 구성적 인간은 주체성(subjectivity)나 살림꾼, 양육자와 같은 형상으로 다가온다. 또한 사회 역시도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間)공동체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대로 두면 사회와 인간이 몸에 털이 자라듯 저절로 형성되던 시대가 끝났다. 이제는 부추기고 양육하고 도모하고 보살피는 스튜어드십(stewardship)이 필요한 시점이다.

팬데믹의 상황은 전환사회를 도모할 주체성 생산(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 즉 구성적 인간론의 등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서 너일 수도 나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들어나가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다. 근대의 인간론이 갖고 있는 공백을 메우고 문명의 전환을 만든 색다른 주체성을 탐색하는 것이 구성적 인간론이지만, 더 나아가 “인간이 암적인 존재다”, “인간이 지구에 붙은 벼룩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미시파시즘적인 논점에 대한 반박 역시도 구성적 인간론이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구성적 인간론은 인간의 존재론적 지평을 재구성하여 대지의 양육자, 동물의 대리인, 생태계의 특이점, 자연과 생명의 시중꾼, 미생물과의 공생명체라고 규정한다. 구성적 인간론은 팬데믹 상황 이후에 찾아올 뉴노멀 시대를 규명할 인간을 응시하는 하나의 창(window)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적 인간론은 인간이 완결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회를 창안하고 제도를 구성하고 정동(affect)를 발휘할 과정형이자 진행형으로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구성적 인간론의 창안과 도전은 사실상 인간의 삶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2. 코로나19 시대의 라이프스타일

코로나 기간동안, zoom을 통해서 그나마 마스크 없는 얼굴을 보곤 했다. by Wikimedia Commons 출처 : https://images.app.goo.gl/KhehHDQ8xuZDukee9
코로나 기간동안, zoom을 통해서 그나마 마스크 없는 얼굴을 보곤 했다.
사진 출처 : Wikimedia

코로나 상황은 많은 변화를 만들었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 관계망의 약화와 소멸을 가져올 지경이 되었다. 이전까지 사회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으로 소비하고 소모할 수 있는 늘 확산되고 증폭되는 관계망이었다. 다시 말해 헤겔과 맑스가 말했던 인륜적 공동체가 미리 주어지기 때문에 모순과 대립이 있다 하더라도 사회의 성숙으로 갈 것이라는 변증법(dialectic) 사상의 낙관적인 공통감각에 기반한 사회상은 와해되고 해체된 것이다. 사회는 전제조건이 아니며, 늘 구성과 생성과정에 있어야 하는 판과 구도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를 재구축하려는 사회 구성적 실천이 매우 중요해진 상황이 팬데믹이 초래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회는 친밀하고 유대적인 우애와 낯선 익명의 환대 사이에서 거리조절을 하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관계양상이다. 우애의 관계망에서 벗어나면 간섭과 참견이 주를 이루는 토착성으로 빠지고 환대의 관계망에서 벗어나면 타자성의 바깥인 관계없음으로 빠진다. 끊임없는 우애와 환대 사이의 거리조절의 미학이 사회를 구성하고 시민성을 호출한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관계없음에 직면하게 했다.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의 소식과 정보를 접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의 물건을 배송 받으며,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과 벽을 맞대고 살고 있는 도시사회의 삶은 더욱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또한 팬데믹 상황은 자가격리의 일상화를 만들어냈다. 자가 격리는 자가격리자와 같은 소수 한정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가 되었다. 자신의 생활반경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위축과 활력 소멸로 다가오고 있다. 사실상 도시사회를 활보하고 접촉했던 익명의 사람들 틈에서 자유를 누리던 경관적 사회, 무차별 사회가 기능 정지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생활범위의 축소를 느끼게 되었다. 물론 동물들이 영토를 만드는 범위한정기술을 잘 활용한다면, 생활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차별사회가 주는 광대역의 무의식은 자신이 익명의 틈에서 자유롭다는 활기를 주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생활반경 자체의 축소는 급격한 위축과 활력소멸로 다가온다. 물론 아무리 지식과 정보가 많다하더라도 앎의 범위를 축소해야 앎이 성립되는 것처럼 자신의 생활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주는 혜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삶의 내재성에 대한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시작점이 범위한정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생활범위가 줄어들어 버린 사람들이 국지적인 것의 깊이와 잠재성을 재발견하는 발견주의 입장에 서기는 참 힘들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2001, 새물결)에서 노마드(Nomade)가 세계를 횡단하고 여행하는 존재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상 국지적 절대성이라는 가까이에 있는 것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는 촉지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가까이에 한정된 반경 내에서 삶을 재발견하고 재창안하는 것이 팬데믹에 대한 색다른 태도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은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마스크가 사람들의 얼굴을 덮자 이제는 얼굴에 대한 기존 통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스크가 얼굴에 일체화된 사람들의 모습은 이제 여러 가면을 횡단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현현한다. 마스크를 쓴 얼굴은 정체성(Identity)으로 특정될 수 없는 익명성, 가상성, 횡단성의 주체성으로 서로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얼굴성의 변형에 대해서 일단 마스크를 벗고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는 것으로 반응하였다. 원래 마스크는 시위대나 야외활동 노동자, 특수노동자들의 것이라는 선입견의 일상품이었지만, 이제는 일상 자체가 마스크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떤 가면 속에 진실된 내면의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면 자체를 횡단하고 유영하면서 얼굴과 정체성(Identity)을 뒤흔들었던 색다른 경험으로 나아간다. 이제 마스크를 쓴 사람들 사이에서 나 역시도 여러 가면을 횡단하는 특이성(singularity)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강고한 자아(ego)와 주체(subject) 등이 형성되기에 어려운 상황이 마스크를 쓴 일상의 모습이 된다. 그럴수록 팬데믹 이전의 마스크 벗은 얼굴 즉 정체성으로 만났던 관계에 대한 낭만과 향수 역시도 일어난다. 그러나 얼굴을 통한 식별기제들은 완벽히 고장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팬데믹은 사람들은 복면과 가면과도 같은 색다른 특이성이 일상화되는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펜데믹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기돌봄, 자기관리, 자기통치에 익숙해 졌다. 이는 시민성을 통한 적극적인 대응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시민성은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자에 대해서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K-방역을 떠받치는 힘은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감염병 질환에 대한 대응이었다. 여기서 시민성은 자기돌봄 없이는 서로돌봄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으로서 사실상 ‘돌봄의 거리조절’과 ‘돌봄의 사회화’를 이끈 판과 구도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돌봄의 의존관계와 동일시가 시민성과 괴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시민성은 자기돌봄이라는 점에 개인책임을 둠으로써 돌봄에서 사회성을 추출한다. 팬데믹 상황에서는 위생과 섭생, 스케줄 관리, 손 소독 등의 일상적인 자기의 다스림의 행위양식이 펼쳐진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기업가정신으로 표현되었던 자기통치와는 상당히 다른 영역일 수 있다. 모든 것을 개인책임으로 두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양상과는 달리, 자기돌봄의 시민성이 제도와 방역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요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3- 자기 배려』(2003, 나남)에서의 논의에서의 ‘자기에 대한 테크놀로지’는 ‘1인칭 나’와 ‘3인칭 나’ 사이에서의 관계 즉, 자기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로서의 자기관리와 자기규율, 자기통치의 시민의식을 의미한다. 마치 불교의 지관법(止觀法)의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이나 마음챙김(mindfulness)명상처럼 1인칭 나와 3인칭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기통치로 향하는 긴장감이 팽팽한 색다른 미시정치가 팬데믹 상황에서 등장했다.

경제활동은 물론 기본권까지 제한되는 락다운 상황에서 손실보상, 이익공유 등의 아이디어와 함께 기본소득이 현실세계로 들어왔다. by stanjourdan 출처 : www.flickr.com/photos/stanjourdan/18176161124
경제활동은 물론 기본권까지 제한되는 락다운 상황에서 손실보상, 이익공유 등의 아이디어와 함께 기본소득이 현실세계로 들어왔다.
사진 출처 : stanjourdan

팬데믹 상황에서 접촉경계면의 축소는 비대면 소비와 유통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플랫폼노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배달과 택배 등은 전 지구적 물류유통인 로지스틱스(=병참)의 최말단 유통조직이며 펜데믹 상황에서도 강건히 가동되었던 사회적 관계망 중 하나다. 플랫폼노동의 확대는 일회용품의 증가와 플랫폼노동자의 열악한 상황 등의 사회 이슈를 남겼지만, 사실상 펜데믹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펜데믹 상황에서 죽은 사람보다 그 기간 동안 배달노동으로 죽은 사람이 많을 정도였으며, 일회용품 등 포장용기와 탄소배출 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남긴다. 플랫폼노동은 일자리의 시대가 아닌 일거리의 시대를 개방하였으며, 배달노동자의 펜데믹 상황의 위험까지 포함한 위험의 외주화와 실상의 비가시화를 낳았다. 플랫폼자본주의의 양상은 4차 산업혁명, 디지털 뉴딜 등의 지배질서에서의 슬로건의 최종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상 플랫폼에서 정동을 발휘하면서 울고, 웃고, 즐기고, 기뻐하다 보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가는 상황이 그것이다. 유튜브, 넷플릭스, 구글, 페이스북, 줌 등의 플랫폼이 일상에 정착하면서, 플랫폼자본주의는 정동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점에서 정동경제(affective economy)와 정동자본주의(affective capitalism)에 대한 급격한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정동(affect)은 밀도, 온도, 속도, 강도 등으로 나타나는 생명에너지이자 활력이다. 정동은 생명의 활력이지만, 동시에 자본과 권력의 활력으로 탈취되기도 한다. 펜데믹 상황은 정동에 대한 관심사를 증폭시켰는데, 정동 자체가 돌봄, 모심, 살림, 보살핌 등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경제의 기능정지는 살림의 강건한 지속으로 나타나는 상황이 등장했기 때문에 정동 개념은 팬데믹을 설명하는 핵심개념이 되었다. 가정주부 등의 살림꾼들이 경제의 기능정지를 능가하는 살림으로 대응했다는 점은 도처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자원이 생겨야 활력이 생기던 상황이 아닌, 활력이 있어야 자원이 생기는 전도된 상태가 되었다. 살림이 강건히 있어야 경제가 작동하게 되는 상황이며, 재택근무, 재택공부 등의 상황에 직면한 가정주부의 엄청난 활력의 소진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살림의 주도성은 가정생활을 재편하였고, 정동경제, 돌봄경제, 살림 등이 전면에 나서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살림의 전면화는 기존 그림자노동으로 치부 받던 살림, 모심, 돌봄, 섬김, 보살핌 등의 사회적 가치를 부각시켰다.

이렇듯 살림이 모든 활동의 원천이자 토대인 상황이 가속화되고 경제가 작동하지 않자 임금체계로부터 탈각되어 브이자형 경제유형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불평등과 사회정의의 문제는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에 따라 소득보전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재난지원금이 화두가 되어 현실화되었다. 펜데믹 이전까지는 기본소득은 식자층의 이상이자 꿈, 이념이었지만, 이제 현실적인 정책이 되었으며, 현실에서 가동 중인 제도가 되었다. 이제 한 번 경험했던 재난지원금의 경험을 어떻게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마스터 키는 정동에게 있는 정동자본주의 양상에서의 기본소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동의 발휘가 화폐화되는 상황인 것이지, 기존의 복지체계 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임금체계를 넘어선 ‘보편적 기본소득’의 시대로 이행을 앞두고 기존에 전제되었던 모든 공리에 대해서 의문에 부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다음편에 계속…

이 글은 2021년 5월 14일 《제10회 맑스코뮤날레》 〈코로나19 이후 정치경제 및 사회운동의 전망> 섹션의 발표문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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