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탈성장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근대사회에서 교육은 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와 같은 교육의 방향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공교육은 성장주의의 토대로 학교는 경쟁의 장으로 기능해왔다. 근대교육은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교육은 기존 질서의 적응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문명으로의 가능성이 교육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성장주의의 토대로 공()이 사라진 학교

교육과정 총론에서는 교육의 목적을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하게 함”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목적에 대해서 누구나 공감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교육을 하는(또는 받는) 실질적인 이유는 사회적 지위 획득과 관련이 있다. 결과적으로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가보다 점수화된 교육의 결과가 중요해졌다. 이것은 교육이 교육 그 자체로의 목적 대신 도구적으로 기능해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좋은 삶인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지 오래다.

교육의 혁신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자원으로서 인재상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그 시대의 유능한 혹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를 교육의 변화에 핵심에 두었다. 예컨대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화두를 던졌을 때 교육계는 너도나도 미래교육과 인공지능 등을 연결하여 교육의 변화를 촉구했으며, 코로나19로 기후위기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지금도 교육의 논리는 미래사회의 적응을 중심으로, 생태 환경 교육의 강화를 이야기한다.

교육은 개인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학교는 경쟁의 장으로 기능해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성공이란 결국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며, 교육은 그것을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점점 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은 사라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교육과정 총론의 첫머리에 제시된 교육의 목적은 사문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의 장에서 중요한 것은 공정한 규칙이다. 가치와 지향이라는 공교육의 방향을 상실한 학교가 교육 경쟁의 공정성에 천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평등이나 정의를 말하는 진보교육 진영에서도 학교교육이 추구해야할 혹은 학교교육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 보다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제도로서 학교교육이 기능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더 관심을 가져왔다. 그것이 교육의 정의이자 평등으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사회의 급격한 경제성장과도 관련이 깊다.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노력을 통해 계층 이동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자연스럽게 한국사회의 근대화 시기인 6-70년대에는 경제성장이 곧 선이자 개인의 행복이라고 여겨졌다. 학교라는 공적 제도는 성장이데올로기를 떠받드는 핵심기제로 작동했다. 한없이 성장할 것 같았던 경제는 성장세를 주춤하다 못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노오오오오오력의 배신이라는 말이 말해주듯이, 교육은 자본획득의 도구 기능마저 상실했다.

교육의 원리이자 방향으로서 탈성장

근대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는 자연과 노동의 착취를 토대로 경제성장을 이뤄왔으며, 그것이 곧 좋은 삶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모두의 좋은 삶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빈부격차는 심화되었고 지구의 자원은 고갈되고 있으며 기후위기를 비롯한 지구생태계는 재난의 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들이 삶에 위협을 받고 있는 전 지구적 위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존재들이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이 때문에 제이슨 무어는 자본주의를 “생명의 그물망 내에서 이루어지는 권력, 수익, (재)생산 시스템”으로 재규정하면서 지구전체의 생태계를 지배하는 메타시스템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만들어 모두를 “가난한 중독자”로 만든다(라트슈, 2015:121). 경쟁적이고 탐욕적인 사회는 절대적 패자와 상대적 패자가 양산할 뿐 아니라 다른 존재의 고통을 회피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근대적 질서의 틀 바깥으로 밀려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다. 그리고 모두는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는 안간힘 속에서 벼랑 끝에 내몰려있으면서도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교육은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는 노오오오오력을 하기를 강요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누구도 쓰레기가 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할 수도 있다.

모두의 좋은 삶은, 다른 말로 지구 생태계의 정의와 평화이다. by Nataliya Vaitkevich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7235805/
모두의 좋은 삶은, 다른 말로 지구 생태계의 정의와 평화이다.
사진 출처 : Nataliya Vaitkevich

교육은 모두의 좋은 삶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실현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현재의 사회구조에 대해 질문하고 대안을 상상하며 그것을 학교라는 공적 공간에서 실험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에 탈성장이 있다. 탈성장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로서 파괴와 단절, 소외 등의 문제가 성장이라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전제하고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현재 삶의 문제에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공교육이 담당해야할 몫이며, 그런 점에서 탈성장은 교육의 원리이자 방향이다.

모든 인간 존재는 지구라는 토대 위에서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고 있다. 따라서 공교육이 말하는 욕망의 재배치의 방향은 모두의 좋은 삶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도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으며, 개별 존재의 고유성을 다른 존재와의 조화로운 공존 속에서 발현하는 것이 모두의 좋은 삶일 것이다. 즉 모두의 좋은 삶은 다른 말로 지구 생태계의 정의와 평화이다.

지금 지구 전체의 삶이 모두의 좋은 삶과 거리가 멀다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념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교육의 몫이기도 하다. 라트슈1는 학교가 경제성장과 경쟁을 중심 가치로 하는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문명화된 노예(158)”를 기르는 일을 멈추고 상념의 탈식민지화를 시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교육의 기능을 기존의 사회질서에 적응하도록 하는데 머물 것이 아니라 보다 지배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읽고 대안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한다. 그럴 때에만 교육은 희망이 될 수 있다.

스피박은 교육을 욕망의 비강제적 재배치라고 했다.2 그것은 삶의 구체적 장소로서 학교라는 공간에서 모두의 좋은 삶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자율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탈성장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학교라는 공간이 모두의 좋은 삶을 위해서 자기제한을 경험하고 실천하는 장소로서 의미화되는 것을 말한다.

교육이 탈성장사회로 가는 길목이 되려면

교육의 궁극적인 지향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고병헌(2020)은 존재가 존재에 이르는 길을 교육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자기 결정권, 즉 자유로 연결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제약이 없는 무제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영복 선생님의 말처럼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가지고 살아가는3”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고유성을 지닌 존재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존재가 각자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발현하며 살아가는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 다른 존재의 자유에 대한 관심과 책임, 즉 성숙한 방식으로 나의 자유(혹은 욕망)을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4 이는 내가 살고 있는 토대로서 사회와 지구환경에 대한 책임 개념을 포함한다.

교육은 아렌트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신참자(newcomer)의 새로움이 세계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으면서 그들의 새로움이 발현되도록 함으로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교육이 가진 희망이다. 즉 교육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적응하도록 하는 동시에, 현재의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잠재성의 발현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순적 속성을 가진다.

또한 교육은 어떤 가치와 철학에 토대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올바름이라는 교육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에서 정치적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교육의 제도 내에 담긴 주류이데올로기를 숨김으로써 오히려 주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란 교육에서 정치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에 대한 종속적 측면과 해방을 촉구하는 대안과 잠재적 측면 모두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육은 기존의 사회 질서 속에서 그것을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해왔다.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무비판적이고 수용적인, 그리고 기술과 자본에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교육이 기존의 사회질서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도록 하는 측면만 강조되어 왔다면, 이제는 신참자들의 새로움, 즉 기존의 사회질서와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측면, 곧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보다 적극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이 도구화된 교육이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1. Latousche, S.(2010/2014:158-162). 양상모(역). 탈성장사회, 소비사회로부터 탈출. 오래된 생각

  2. Spivak(1993/2006). 태혜숙(역).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 초국가적 문화연구와 탈식민 교육, 갈무리

  3. 고병헌(2020:124). 존재가 존재에 이르는 길: 교육. 이다.

  4. 남미자 외(2020:63). 미래교육의 거대한 착각: 교사없는 학습은 가능한가. 학이시습

남미자

보잘 것 없는 삶이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시의 시간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한 편 혹은 여러 편의 시로 살아가는 모든 빛나는 존재들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연구자로 살고 싶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