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들의 탈성장 외침, 우리의 ‘안녕’과 관계의 풍요를 위하여

얽혀있는 관계망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현재의 내가 어떤 관계들에 의해 실존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이다. 근대 인간이 배제하고 소외시킨 존재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한 자기제작의 과정은 자연과 노동의 착취를 토대로 가능했던 성장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 곧 탈성장을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2022년 3월 25일 청소년기후행동이 광화문 시민 열린마당에서 진행한 기후파업 현장. 사진 출처: 청소년기후행동 누리집 https://youth4climateaction.org/88
Copyright ⓒ 2022 청소년기후행동 All rights reserved.
2022년 3월 25일 청소년기후행동이 광화문 시민 열린마당에서 진행한 기후파업 현장.
사진 출처: 청소년기후행동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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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5일 기후위기 대응을 국정과제 1순위로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이들이 있다. ‘청소년기후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2019년 세계 청소년들의 기후 운동 연대인 ‘미래를 위한 금요일’의 한국 지부로, 전 세계의 청소년들과 연대하며 기후위기 문제를 자기 삶의 문제로 다루면서 직접적인 행동에 나선 이들이다. 모든 존재의 존엄한 삶이 가능하도록 실질적인 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막을 수 있는 정책 결정과 실행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당사자인 청소년, 청년, 노동자를 주체로 인정하고 정책 의사결정의 참여 보장을 요구한다. 이들은 ‘생태감수성이 풍부해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거리로 나서 결석(파업)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피해와 책임을 견디며 살아가야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기후위기로 무너진(혹은 무너질) 어떤 것이 자신의 존재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이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청소년기후행동이 명시적으로 탈성장을 주장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은 탈성장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기후위기 대응과정과 경제사회구조의 전환 과정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 이면에는, 다른 존재의 안전과 안녕이 위협받게 될 때 그것이 나의 안전과 안녕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탈성장이 단순히 경제성장으로부터의 탈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성장을 중심으로 나머지를 대상화 혹은 도구화해 온 삶의 양식 전반을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노동의 착취를 일삼아왔다. 세계의 경제는 자연과 노동의 착취를 딛고 성장해왔다. 자연의 착취에 더해 제3세계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 정신과 몸, 주체와 대상, 이성과 감정 등의 이분법적 접근에서부터 노동과 자연의 착취가 이루어졌다. 탈성장으로의 전환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인간(Man) 이성을 바탕으로 무한한 발전과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연의 착취가 이뤄졌다. 사진 출처: Matt Palmer, 
https://unsplash.com/photos/K5KmnZHv1Pg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연의 착취가 이뤄졌다. 사진 출처: Matt Palmer

인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지구의 천연자원은 고갈되고 있으며, 지구 곳곳이 사막화되고 있다. 또한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하며, 지구의 온도는 점점 상승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백신 개발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감염병의 확산을 막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지배와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비인간 존재들이 우리의 현재적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성장주의적 자본주의가 독립된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대상화해왔다면, 탈성장은 단절된 관계들을 복원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개인들이 서로 연결된 존재로 스스로를 새롭게 정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탈성장은 과정적이고 실천적이다.

‘자립은 연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처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 선생님은 생태문명의 원리로 ‘공희’를 제시했다. 생존을 위해 매일 먹는 음식도 식물과 동물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 바깥의 무엇과 연결되는 과정인 것이며, 나라는 주체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담론, 제도, 환경 등과의 유기적 관계망 속에서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되기의 과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와 타자, 물질, 세계가 얽혀있는 상태로 이미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라면, 나라는 실존은 관계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도 물질적이며 창발적인 세계의 구성요소의 하나1”이며, 존재의 핵심은 관계성에 있다. 예컨대 탄소와 다이아몬드는 둘 다 탄소로 구성되어있지만, 그것이 생성되는 온도, 압력에 따라 탄소 혹은 다이아몬드로 구분된다. 다시 말해서 무엇과 어떻게 관계 맺느냐가 탄소냐 다이아몬드냐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무엇과 어떻게 관계 맺느냐가 중요하다.

카렌 바라드는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2와 상보성의 원리3를 토대로 인식과 존재의 분리불가능성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전자(electron)가 입자성 혹은 파동성을 드러내는 것이 관찰과 행위의 분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 측정도구, 측정대상, 측정행위 사이의 얽힘의 결과이며, 이는 무엇과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따라 실재(reality)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바라드는 이것을 상호작용과는 구별되는 내부-작용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미 분리되어있는 존재들의 관계로서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게 되는 현상 그 자체가 이미 얽혀있는 내부-작용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인식과 존재 역시 분리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은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나라는 존재가 어떤 상호 얽힘의 결과인가?’로 바꾸어낸다. 얽혀있는 관계망 속에서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현재의 내가 어떤 관계들에 의해 실존하고 있는가는 곧 윤리이다. 즉 다른 존재에 응답하는 능력(responsibility)으로서 윤리란, 인간이라는 우월적 지위에서 나오는 책임이 아니라 관계적 존재로서 서로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지속적인 자기 제작과정이 된다.

그러므로 수많은 관계들로 얽힌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존재의 삶이 위협받고 있는지 살피고 그러한 문제에 응답하는 과정이 곧 탈성장의 과정이며, 수많은 너(you)들의 안녕이 나의 안녕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수많은 너들의 안녕을 위한 연대의 삶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함께-되기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1. Alaimo, S. (2018:63).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 김종갑 역. 그린비

  2. 불확정성의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는 빛이나 전자와 같은 물질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정확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원리이다

  3. 상보성의 원리(principle of complementarity)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철학적 개념으로, 입자와 파동은 어느 한 쪽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입자이면서 파동일 수 없다는 원리이다.

남미자

보잘 것 없는 삶이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시의 시간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한 편 혹은 여러 편의 시로 살아가는 모든 빛나는 존재들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연구자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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