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의 정치학] ➁ 포퓰리즘이라는 관점

회색지대의 정치학은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에 의해 제기되어 온 두 가지 헤게모니 프로젝트(hegemony project)가 시민사회의 다양한 민주적 요구를 대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두 프로젝트에 의해 가려진 회색지대의 영역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 정치 담론에서 포퓰리즘(populism)은 주로 경멸적인 용어로 쓰인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대중영합주의(popularism)로 여겨지며 정치권에서는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한 수사로 활용된다.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모두가 입을 모아 포퓰리즘만은 안된다고 말한다. 포퓰리즘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비난을 받는 것일까.

선거는 실로 진정한 포퓰리스트를 가리는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Element5 Digital

포퓰리즘은 학술 영역에서도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난해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많은 학자들은 포퓰리즘이 소수의 기득권 세력인 ‘그들’에 맞서서 민주주의의 주체인 ‘우리’를 대표하고자 하는 운동 또는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서양 정치철학에서 민주주의의 주체는 주로 ‘people’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며, 한국에서는 국민, 민중, 인민 등으로 불린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을 비난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사실 포퓰리스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 민심, 민생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자신들이 규정하는 기득권과 싸우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입을 모아 포퓰리즘을 비난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포퓰리즘적인 현상이다.

포퓰리즘에 대한 비난은 종종 진정한 정치라는 관념과 연결된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자신만이 국민을 진정으로 대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국민을 대변하고자 하는 상대방의 주장은 허구라고 말한다. 선거는 실로 진정한 포퓰리스트를 가리는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정치라는 관념은 제도정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운동의 역사는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정치권이 호명하는 국민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나아가 제도정치 자체가 허구적이며,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포퓰리즘 정치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좌파적이며, 민중적인 정치라는 또 하나의 진정한 정치에 대한 관념과 연결되곤 한다.1

포퓰리즘을 운동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정치 현상으로 보게 되면, 포퓰리즘과 다른 진정한 정치를 옹호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 글은 포퓰리즘을 정치 현상이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 정치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되는 좌파 포퓰리즘 전략에 대한 논의와도 다르다. 한국적 맥락에서 아무런 역사성도 서사도 없는 서유럽의 좌파 포퓰리즘 전략을 섣불리 수용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포퓰리즘이라는 관점이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퓰리즘 관점은 제도정치와 사회운동,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가려진 회색지대의 영역을 드러내고 근대 민주주의 정치에 내재한 환원 불가능한 긴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민주주의의 두 전통 사이의 긴장

포퓰리즘 관점은 근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두 전통 사이의 접합(articulation)으로 이해한다. 한편으로는 법의 지배, 인권의 보장과 개인적 자유에 대한 존중 등의 가치로 구성되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평등과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동일시, 그리고 인민주권의 사상으로 구성되는 포퓰리즘적 전통이 있다. 현재 민주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자유민주주의 제도는 민주주의의 두 전통이 우연적이고 역사적으로 접합된 결과이다.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양자의 상이한 논리는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제도적 형태는 변화해 왔다. 무페는 두 전통 사이의 긴장을 근대 민주주의의 역설이라고 불렀다.2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전통으로 환원되지 않는 포퓰리즘적 전통에 주목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 제도적으로 확립된 ‘정치’의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는 근본적인 적대와 부정성의 영역인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영역에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으로 불리는 영역은 바로 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해당한다. 포퓰리즘 관점은 정치란 여의도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정치를 정치 엘리트 집단에게 맡겨놓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 관점이 단호히 반대하는 관점이다.

포퓰리즘 관점은 연대의 수평적 차원만큼이나 수직적 차원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진: Mathew Schwartz

일부 자유주의적 논자들의 포퓰리즘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이는 결코 민주주의의 제도적 질서를 무시하고 제도정치 바깥의 정치를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다. 포퓰리즘 관점은 정치적 대표(representation)의 문제를 여전히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적인 차원으로 이해한다. 2000년대 이후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나 ‘아랍의 봄’, 한국의 ‘촛불집회’ 등 새로운 사회운동의 양상은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연대에 입각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도래를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이는 다소 낙관적인 기대였으며, 2010년대에 우리가 목격한 것은 광장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파 포퓰리즘의 부상이었다. 포퓰리즘 관점은 연대의 수평적 차원만큼이나 수직적 차원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는 권위주의로의 퇴행이 아니라 대표, 리더십, 대의정치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급진화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자유주의와 포퓰리즘,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의 영속적 긴장을 특징으로 한다. 두 차원의 우연적이고 역사적인 접합의 결과인 자유민주주의 제도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정상적’ 상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제도적 배열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고 제도정치가 대변하지 못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의 요구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보다 민주적인 제도의 구성을 위해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정치와 운동정치는 단기적으로는 대립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둘 사이의 긴장은 어느 한쪽을 특권화하는 방식으로는 해소될 수 없다. 제도를 비난하는 운동, 운동을 비난하는 제도가 아닌 ‘사회운동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이다.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의 회색지대

포퓰리즘 관점은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한국 사회운동 역사에서는 민중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의 회색지대를 밝혀준다. 그동안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포퓰리즘은 규범적 기준이 부재한 모호한 관점으로 여겨졌다. 포퓰리즘 전략이 ‘좌파’적이라는 보장이 없으며 ‘우파’들에 의해 언제든지 전유될 수 있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나아가 포퓰리즘 관점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멀어지고 자유주의로 경도된 탈(脫)마르크스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 포퓰리즘 관점은 규범적 지향이 지나치게 뚜렷한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포퓰리즘이 반(反)자유주의적이며 제도정치 바깥의 정치를 특권화한다는 자유민주주의적 입장의 비판이 이에 해당한다. 이 비판은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정상적’ 형태이며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하고 불온한 운동 또는 이데올로기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포퓰리즘 관점은 한편으로는 과도하게 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하게 반(反)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아 왔다. 포퓰리즘 전략에 대한 평가 역시 좌파 정치에 미달하는 모호한 전략이라는 평가와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전략이라는 평가가 공존해 왔다.

이 역설적인 현상은 포퓰리즘 관점이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두 관점에서는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 그리고 두 관점 사이에 모호하게 존재하는 회색지대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존 정치 담론에서 이 모호함은 주로 한계로 지적됐다. 그러나 포퓰리즘 관점은 이 모호함이야말로 정치에 대한 본질주의적 상상을 넘어설 수 있는 입지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현행 민주주의 제도를 자연화하고, 제도정치 바깥의 정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비판할 수 있는 정치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와 민중민주주의를 한국 사회운동 역사의 한 축으로 이해하면서도, 반(反)자본주의 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억압에 저항하는 다양한 투쟁과 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 필요하다.

이는 섣부른 좌파 포퓰리즘 전략의 구상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당장 전략을 구상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증으로부터 벗어나서 포퓰리즘 관점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포퓰리즘에 대한 맹목적 비난을 멈추고, 그 비난이 진정한 정치에 대한 환상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보자. 우파 포퓰리즘의 시대, 여전히 포퓰리즘이 경멸적인 용어로 쓰이는 시대라고 해도 말이다.


  1. 샹탈 무페(Chantal Mouffe)가 제시한 좌파 포퓰리즘 전략이 좌파 정치에 미달한다는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의 평가는 이러한 환상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라클라우 사상의 수용과정과 쟁점: 국내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연구에서 ‘라클라우의 이름’의 의미」(현우식, 2023)에 실린 좌파 포퓰리즘의 한국적 수용에 관한 논의를 참고하라.

  2. 샹탈 무페. 2006. 『민주주의의 역설』. 이행 옮김. 인간사랑.

웹진 《생태적 지혜》는 혐오와 배제를 제외한 보다 다양한 관점을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본지에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 정책의 내용을 언급하는 글이 실린다면, 그것은 본지가 제시하고자 하는 다양성의 일부일 뿐이며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전체 조합원들의 합의에 의한 단일한 정치적 노선은 있을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현우식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사상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에서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 재생산되는 관행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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