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이 채소 – 『세계 끝의 버섯』을 읽고

못난이 채소는 단순히 못생겼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음식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책 『세계 끝의 버섯』에서 버섯의 여정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자본주의의 문제점,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적 관점을 탐구하면서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다른 세계를 희망하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생존이란 무엇인가? 미국에서 유행하는 판타지를 살펴보면, 생존이란 항상 다른 존재와 싸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외계 행성 이야기에 등장하는 ‘생존’은 정복과 팽창의 동의어이다. 나는 생존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겠다.” (64)

전 세계 음식물 소비량의 3분의 1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이 폐기된다. 썩거나,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못났기 때문에. 사진출처 : Surya Prakash

돈암동에 사는 친구는 몇 달 전부터 못난이 채소가 한가득 담긴 박스를 정기 구독한다. 친구가 구독하는 채소 박스 안에는 약간 썩었거나 못생겨서 마트에서 팔지 못하는 채소들을 한데 들어있는데, 다양한 크기와 (못난) 모양을 가진 채소의 면면이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다. 장 볼 때마다 두르려 보고, 만져보면서 ‘때깔 고운’ 채소를 집어 들기 위해 여러 궁리를 했던지라 약간의 거리낌도 있었다. 그래서 맛은 있냐고?

상품성이 떨어지거나, 완전히 상품의 가치를 잃은 농산물 앞에 ‘못난이’라는 말을 붙인다. ‘못난이 사과’, ‘못난이 당근’ … 팔리지 않으면 못났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상품성이 떨어져 폐기되는 ‘못난이 농산물’은 매년 13억 톤에 달한다. 전 세계 음식물 소비량의 3분의 1 수준이라니 어마어마한 양이 폐기된다. 썩거나,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못났기 때문에. 흔히 아는 형태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기면 가차 없이 폐기 되어, 사료나 퇴비로 썩을 뿐이다. 구매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재배 과정부터 애를 쓰지만, 도소매 업자에서 최종 소비자까지 도달할 때까지 그 형태와 맛을 유지한 ‘상품’만이 그동안 식탁에 오를 특권을 누렸다. 가격을 정할 권리가 대부분 농부가 아닌 판매 라인에 있다 보니, 그들의 머릿속에선 애초에 배제된 ‘못난이’들의 운명은 늘 정해져 있다.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인간만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착각에서부터 ‘인간’들을 구출하기 위해 ‘버섯’을 따라다닌 연구자이다. 칭은 모든 유기체 – 흙, 공기, 물 등 – 가 서로를 도우며, (인간이 아닌) 하나 이상의 생물종과의 배치, 다종의 세계 형성에 대해서도 ‘버섯’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의 지독한 ‘버섯’ 추적. 이것을 역사적으로 인간 못지않게 변화하는 ‘비인간의 존재 방식'(57)에 대한 포착이고, 존재 방식이 “마주침에서 창발하는 결과”(57)라고 할 때, 인간들이 번번이 포착하지 못했던 배치에 대한 새로운 서사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그는 왜 ‘버섯’에 집착하는 걸까. 신자유주의, 특히 자본주의가 임계점을 넘어서 ‘폐허 상태’로 치닫고 있다는 경각심 속에 그의 조각보가 더 촘촘해진다.

“어떤 개념을 살아 숨 쉬게 하려면 구체적인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버섯 채집이야말로 진보 이후에 탐색해 볼 만한 장소이지 않은가? 송이버섯이 거쳐 가는 오리건주에서 일본까지의 상품사슬에 존재하는 균열과 가교를 살펴보면 경제적 다양성을 통해 성취된 자본주의가 드러난다. 주변자본주의적 행위를 통해 채집되고 팔리는 송이버섯은 채집된 다음 날 일본으로 보내지면서 자본주의의 재고품이 된다. 이러한 번역은 많은 글로벌 공급사슬의 중심이 되는 문제다.”(128)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칭은 공급사슬(혹은 상품사슬)을 통해 번역되는 “비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자본주의 가치 사이”(121)의 모순과 배신감, 문명과 진보 사이에 은폐되어 있던, 단단한 사슬을 포착하고, 생경한 ‘차이’의 재배치를 통해 우리가 반응하는 안정감과 불안, 불만족의 기원을 밝힌다. 그 탐구에서 얻어낸 다양한 번역행위(칭은 이때 ‘번역’의 정의를 브루노 라투르의 ANT에서 차용한다, 책의 383쪽의 각주 참고)를 통해 칭은 우리가 버섯을 식탁으로 올리기까지 너무 단순하게 여겼던 사슬망을 끊어낸다.

복잡하고, 모호하지만 다양하고 풍부한 새로운 ‘얽힘’의 가능성을 창발하는 흐름의 포착이 흥미로운 점은 그 주체에 인간만 들어있지 않다는 것인데, ‘파는 생산물’이기 전에 유기적 생명으로 버섯의 성장을 바라보며 발견한 연결고리는 우리가 먹고사는 일 자체의 성찰로 이어진다.

“농부들, 토지를 소유하지 않는 이주민들, 작은 마을의 사장들, 화려한 회사들 모두 ‘다 팔아야 합니다’ 세일에 참여한다. 이러한 사회 풍토에서는 보전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알기 힘들다.”(485)

칭이 버섯을 따라 포착한 것은 ‘인간-비인간’의 구분을 넘어선 다종의 울림이다.

“록, 팝 또는 고전음악의 통일된 화음 및 리듬과는 반대로, 다운율을 이해하려면 각각의 선율을 따로 듣고 그 선율들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화음이나 불협화음으로 합쳐지는 것 또한 모두 들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처럼, 우리는 배치를 이해하기 위해 배치가 존재하는 개별 방식을 주시함과 동시에 산발적이지만 그 결과로 발생하는 조율을 통해 그 선율들이 어떻게 합쳐지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더 나아가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어 예상 가능한 악보로 적힌 음악과 달리, 다운율의 배치는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바뀐다. 이제 이러한 방식으로 듣는 법을 연습하고자 한다.”(280)

이 책에서 말하는 다종의 울림에 다가가려면 포스트휴머니즘을 알 필요가 있다. 포스트휴머니즘, 인간과 비인간이 존재 가치와 세계 형성에 동반자라는 인식을 가진 용어다. 칭의 책은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으로 쓰인 민족지인데, 이때 민족에는 당연히 비인간 존재가 포함된다. 인간 너머(more than human, 509)의 존재와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일은 안 그래도 복잡하게 얽힌 인간 차원의 불평등, 차별, 혐오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질문인 동시에,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얽혀 있었지만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던 행위자(agency)에 대한 태도의 문제를 성찰하는 반성적 작업일 수 있다.

나아가 자본주의에 포섭된 인간들에게 다양한 행위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칭의 노력은 일상생활에서 체감하지 못하던 감각과의 신선한 마주침, 알아차림을 허락한다. 쉽게 말해 이종 간의 모임과 특이성과 연결에 대한 경제적이지 않은 관점은 못생긴 채소가 맛이 없을 것이라는, 상품 가치가 떨어졌다고 못 먹을 채소가 아니라는 새로운 감각에 토대가 된다.

(다시 못난이로 돌아와서) 냉장고에 있는 못난이 하나를 집어 든다. 사실 이 친구의 맛은 그 생김새에 달리지 않았다. 소금, 물, 후추, 약간의 기름, 다양한 장류 … 여러 패치가 연결되면서 맛이 나는 것이다. 오늘도 맛있는 한 끼 만들어 봐야지.

김준영

세상에 여러 얽힘, 연결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계기독교와 상호문화를 공부하고 있고,달리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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