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⑤ 사랑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그림

낯선 사건과 이질적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우발성을 기쁨으로 만들려면 우리에겐 사랑과 변용이라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타자가 내 안에 들어와 춤추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작은 여백들이 삶의 내재성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또 하나의 나’들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순간을 선물할 것입니다.

관계로부터 시작하는 판짜기

얼마 전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연구실이 철공소 골목에 위치해 있어 구석구석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데다, 하필이면 4층이라서 고양이가 길을 찾아 돌아올 가능성도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각자 흩어져서 고양이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골목에서 망연자실 헤매다니던 아내와 마주칠 때는 눈물이 핑 돌아서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다가 다시 각자 맡은 구역으로 향하곤 했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철공소 사장님들과 마을의 예술가들이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함께 골목을 돌며 찾아다니기도 하면서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평소 연구실에 콕 박혀 책을 쓰고 공부만 하다가 이따금 마주치는 이웃과 인사만 했을 뿐인데 이웃들은 자기 일이라도 된 것처럼 나서주었고, 마침내 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양이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은 엄청났습니다. 저는 외롭거나 고독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애인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과 일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자체는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하고 신비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친밀하고 유대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눈앞의 이익이나 이해관계가 바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해와 이익의 관계에 지쳐 있는 우리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여지를 주니까요.

스피노자가 신적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인 변용(affection)은, 관계가 이루어내는 보이지 않는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외부와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신체는 부드럽게도 딱딱하게도 빠르게도 느리게도 변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수자를 대할 때 부드러운 사랑의 양태를 보이거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신경이 곤두서서 딱딱한 양태를 보이거나, 회사나 학교에서 신속하게 움직이다가, 집에서 여유가 생기면 느리게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보이지 않는 변화의 모습들입니다.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면 들일수록 저는 풍부하고 다양한 ‘또 하나의 나’에 대해 눈뜨게 되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 jonas vincent

그런데 신체변용이라는 보이지 않는 변화를 유발하는 외부의 사물, 인물, 동물, 상황, 사건 등이 우리와 어떠한 공통분모도 갖지 못하고 낯설게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저 역시도 연구실 건물 앞에서 노숙인을 마주쳤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일지 난감해서 그를 한참 동안 지켜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듣고 그제야 그에게 살짝 마음을 열 수 있었지요. 이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마주칠 때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약간의 단서와 영감을 주는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외부에서 촉발된 사건을 신체변용이라는 능동적인 힘에 의해 기쁨으로 만들 능력이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낯선 현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귀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노숙인 상담소의 경우, 노숙인이 말하는 바와 살아가는 바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노숙인들에게 힘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사실은 ‘배제와 분리’ 같은 다소 편리한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 노숙인이 있다면?

좁은 골목길에서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택시와 살짝 부딪힌 적이 있었습니다. 사고를 일으킨 택시 기사는 흥분하며 화를 냈고, 저와 저의 아내 역시 화가 나서 팽팽하게 맞선 채 옥신각신하고 있었지요. 앞뒤로 차들은 경적을 울려댔고, 우리와 택시 기사는 우발적이고 낯선 이 사건에 대해 서로 언성을 높이며 분노로 대할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차를 비켜 세우고 살펴보니 그다지 큰 사고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차에 살짝 흔적이 남긴 했지만, 워낙 오래된 차라 큰 무리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택시에는 아예 긁힌 흔적도 없었고요. 오히려 결정적인 문제는 그 우발적인 사건을 감싸 안고 보듬을 수 있는 신체변용, 다시 말해 사랑의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택시 기사에게 “흠집이 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니 돌아가셔도 좋다”라고 하면서 악수 한번으로 끝내자고 말했습니다. 택시 기사는 어린애처럼 좋아하더니 쏜살같이 사라지더군요. 저는 집에 와서 우발적인 것을 어떻게 기쁨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곰곰이 고민했습니다. 그런 능력은 사랑과 변용이라는 우리 안의 능력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더군요.

사실 운전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타자화하게 됩니다. 자동차끼리는 접촉사고의 위험 때문에 진정한 만남이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움직여야 합니다. “자동차가 거리를 단축시킨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었다”라는 이반 일리치의 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타자화하지 않는 것, 내 삶으로 타자를 끌어들여 내재성의 일부로 만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즉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면 들일수록 저는 풍부하고 다양한 ‘또 하나의 나’에 대해 눈뜨게 되는 셈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신체변용입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를 내 삶의 내부로 가져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낯선 이방인, 이주민, 노숙인 등이 서성이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최근 유럽이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난민이라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정치적 분열로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난민들에게 생존과 생활의 권리를 주려고 하는 한 축과, 난민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려는 다른 한 축이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해법은 이들처럼 낯선 존재를 타자로 분리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욕망의 힘으로 품고 감싸고 보듬는 것입니다. 타자화의 논리는 사랑에 무능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실 스피노자의 내재성처럼 어려운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내재성은 타자화된 외부가 자신의 내부적인 삶과 마음, 생활에 자기원인으로 들어와 있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내 안에 동물도 있고, 내 안에 식물도 있고, 내 안에 노숙인도 있고, 내 안에 장애인도 있고, 내 안에 난민도 있고, 내 안에 아이도 있을까요? 물론 타자를 무작정 삶의 내재성의 일부로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타자를 접촉하고, 변용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삶의 내재성에 잠재되어 있던 공통성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고무하여 타자를 끌어안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철학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동일시’와는 다릅니다. 동일시는 타자와 자신이 같다는 인식입니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 감각, 감정을 나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 동일시입니다. 프로이트는 상담자에 대한 내담자의 동일시를 전이(transference)라고 말하면서 각별히 중요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신경증 자체가 ‘나쁜 아버지’에 대한 협착(狹窄)이라면, 정신분석가를 ‘착한 아버지’로 동일시하는 것은 치료동맹을 구성할 수 있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내재성은 타자와의 동일시가 아니라, 타자가 갖고 있는 생명과 활력으로서의 특이성을 자신의 내재성으로 이해하면서 공통성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입니다. 즉 신체와 공동체가 특이한 존재를 사랑하도록 최대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내재성이 담고 있는 내용인 셈이지요. 그런 점에서 내재성은 타자가 나와 같다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서로 간의 차이를 전제하면서도 서로 연대하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타자를 식별하거나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공동체를 차이와 다양성의 구성요소로 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연대란 나와 다른 생각을 환대하는 것

펠릭스 가타리는 21세기 스피노자주의자로 불립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이 스피노자 철학의 해설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타리가 “연대할수록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아포리즘이나 선문답처럼 느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흔히 공통점이 있는 사람끼리 연대하거나, 적어도 연대한 후에는 의견을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연대하고 변용하고 사랑하는 과정은 똑같아지거나 비슷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민주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연대한다는 것은 다른 삶, 다른 생각, 다른 관계가 생산되고 환대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는 차이와 다양성이 더 많이 발생할수록 풍부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전체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은 단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원하기 때문에 의견 차이를 억압하고 짓누릅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적 연대는 차이가 더 많이 생기는 연대인 셈입니다.

더 나아가 관계의 묘미는 바로 차이 생산, 다양성 생산, 특이성 생산에 있습니다. 마치 가재의 지절이 펼쳐지듯이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분화하지 못한 미세한 차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근대까지는 차이와 다양성이 본래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통합하고 동일화하면 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차이와 다양성을 통합할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찾기 위한 지적 작업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문명이 차이와 다양성을 통합할수록 통속적이고 동질적인 문명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한 삶의 유형과 소비생활, 문화생활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차이와 다양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되었지요. 스피노자의 내재성이라는 개념 속에는 외부에서의 마주침이 삶의 내재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소재였습니다. 그러나 외부가 사라지고, 차이와 다양성이 더이상 전제되지 않는 현 시점은 새로운 국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명은 외부를 소멸시키고, 더 나아가 삶의 내재성이 갖고 있는 여백과 우발성, 차이와 다양성을 납작하고 편편하고 단조롭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명 속에서 대처법을 찾기 위한 힌트와 아이디어, 영감을 던져주니까요.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을 떠올릴 때, 외부의 타자를 내부에 품고 있고 그것이 차이와 다양성을 만개시킬 잠재성으로 숨어 있는 그런 방식의 지도를 그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라야 우리의 잠재성에 숨어 있는 외부 즉, 우리 안의 특이성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연대할수록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일상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우주를 보다

스피노자는 제한된 지역에서 아주 작은 일상의 세계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검소, 순수, 겸양,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불필요한 집기나 가구 등을 사지 않고, 하숙집에서 살았습니다. 어찌 보면 답답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했을 것 같은 그가 풍부한 삶의 내재성을 얘기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당대에 범신론자로 탄압받고 억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긍정, 순수하고 소박한 일상에 대한 찬란한 긍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규칙적이고 국지적이었지만 단조롭고 동일한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즉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소중하게 여겼고, 작은 일상의 재미와 스토리, 사건에도 쉽게 감동하는 사람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가 정동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정서생활, 내면생활, 감정생활에 불과했던 정동이, 그에게는 세계를 재창조해낼 개념이 됩니다. 즉 그에게 정동은 우리 안의 자연과 생명의 능력이 표현하고 있는 핵심 개념입니다. 정동의 능력은 작은 일상 속 사건들과의 마주침을 삶이 갖고 있는 자기원인, 혹은 정동의 기하학에 따라 기쁨, 슬픔, 욕망으로 표현하는 능력입니다. 그의 국지적이고 작은 일상은 생명과 자연의 우발성이 생성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이 사형수로 수감되었던 시절 감옥에서 마주쳤던 한 송이 민들레와 같은 것입니다. 민들레라는 작은 생명은 사소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외부를 개방하고 아주 다른 삶을 개방하는 특이점이 됩니다. 민들레가 생명과 우주,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특이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삶의 내재성 개념은 유한한 삶에 대한 응시입니다. 그 유한함을 응시했을 때라야 비로소 작은 여백과 외부와 우발성이 열립니다. 그리고 타자가 내 안으로 들어와 춤추고 말하는 것에 감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사랑과 정동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사랑과 정동, 욕망을 무한성, 영원성의 영역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 정동, 욕망은 우리 안의 자연과 생명이기에, 영원하고 무한한 ‘신 즉 자연’의 표현 중 하나니까요.

삶의 내재성 개념은 유한한 삶에 대한 응시입니다.
사진출처 : sasint
 

제 연구실은 저만의 작은 연구공간이며, 범위한정 기술과도 같이 앎의 범위를 좁혀놓은 공간이지만, 그곳을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그 안에는 고양이 네 마리가 살고 있고, 그들과 함께 정동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저녁때 집으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 때 고양이들이 생각나고, 옆에 누운 아내가 더 그리워지고, 내일이 기다려집니다. 이러한 행복한 삶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먹먹하고 발걸음도 멈춰 서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이즈의 무의식이 생각 속에 들어와 파열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 다음 스피노자가 응시했던 사랑이라는 자기원인 이외에는 삶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이라는 자기원인은 삶의 변화를 만드는 원천이며 놀라운 사건의 순간이라는 점은 변함없는 진실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힐 수 없고, 물체화할 수도 없고, 뭐라 정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삶의 유한한 지평, 즉 내재성은 사랑을 통해 다양해지기도 하고, 사랑을 통해 여백과 여유, 여가가 생기기도 하고, 사랑을 통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로도 만들어줍니다. 더불어 삶의 내재성의 구도 위에 타자라고 간주되던 ‘또 하나의 나’들을 기입하는 것도 사랑이 만들어내는 그림입니다. 삶의 자기원인, 살아가는 이유, 삶을 긍정하는 이유, 그 인과론의 본질은 바로 사랑과 변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 한 송이에서 사랑의 자기원인을 깨닫습니다.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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