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② 작은 사랑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킨다

보편적인 사랑과 한 사람에게 행하는 특별한 사랑 중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인류애와 같은 보편적인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작고 국지적인 사랑이 우리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출발점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국지적 절대성’은 익숙한 일상과 사람들을 뻔하게 보지 않고 깊이와 잠재성을 들여다보는 개념입니다.

나를 변화시킨 길고양이 한 마리

어느 도서관에서 스피노자에 관한 강연을 할 때였습니다. 한 수강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아주 특별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합니까?” 그 순간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야말로 정말 숭고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그것만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또한 사랑의 출발점은 국지적일 수 있으나, 사랑의 결과물은 보편적 사랑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도 생각해보면 친구들의 죽음과 억압당한 주변 사람들의 무참한 상황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습니다. “이한열을 살려내라!”, “박종철을 살려내라!”라는 구호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친구와 동료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보편적 사랑과 국지적인 사랑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보편적인 것을 먼저 말하다 보면, 뻔한 대답, 즉 “응당 그래야 한다”라는 당위나 “나는 그렇게 믿는다”라는 믿음의 차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이나 종교에 계몽주의적인 논리가 등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편적인 것은 삶이 던지는 질문을 단조롭게 만들고 의무, 당위, 책임, 필연과 같은 개념에 의존하게 만들곤 합니다.

한 마리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우리 사회를 바꿀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 habunman

그래서 저는 보다 가깝고 국지적인 영역에서, 사랑이 빚어내는 부드러운 흐름과 이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합니다. 사실 제 일상은 연구실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단조로운 생활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일상에 몇 년 전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연구실 주변을 서성이며 울고 있는 길냥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길냥이는 연구실 앞마당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제 발밑에서 ‘발라당’을 하며, 머리를 비비기도 하고 놀았지요. 그런데 이런 작은 변화가 저의 마음에 심원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길냥이 밥을 주는 작은 일이 점차 동물보호운동과 이 땅의 뭇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동물단체 잡지를 만드는 일을 했고, 동물권과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총선 때 녹색당에서 생명권 정책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길냥이 한 마리에 대한 국지적인 영역의 사랑에서 파급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냥이는 연구실 안으로 들어와 지금 제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주 작은 일상의 변화는 삶의 배치를 바꾸어 한 개인의 생각도 바꾸고 어찌 보면 한국 사회를 바꾸는 초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낙관적인가요?

익숙한 일상과 사람들을 깊이 있게 만나기

아내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뒤죽박죽 섞인 일들을 어떤 순서로 해결해야 할지 단번에 정리해냅니다. 시장에서 사온 식재료를 어떻게 보관해야 오래 싱싱하게 먹을 수 있는지 알고, 네 마리 고양이들이 아픈 데는 없는지, 집 앞 구멍가게 할머니가 오늘 왜 화가 나 있는지도 금세 알아차립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데도 늘 지적을 받곤 합니다. 설거지할 때 물 아끼는 법이나 청소할 때 물자국을 안 남기는 법, 빨래를 널면서 주름 펴는 법 등등 아내가 알고 있는 지혜를 아무리 전수해도 저는 다음번에 또 까먹고 맙니다. 요즘 들어 밥 먹을 때 자꾸 밥풀을 흘리는 것이나 외출복을 입을 때 아내가 꼭 옷맵시를 만져줘야 하는 걸 보면 내 한 몸 건사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인가 싶어 가끔 슬플 때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올여름에 태어난 아기고양이도 저 혼자 먹고 싸고 그루밍도 알아서 잘 하는데 말이지요. 우리 집에서 지혜로운 순서대로 줄을 세운다면, 아내가 맨 앞이고, 네 마리 고양이들이 나이순으로 줄줄이 선 다음 맨 꼴찌에 제 자리가 있을 겁니다.

이런 저의 눈에는 아내의 지혜가 경이롭게만 보입니다. 이치에 맞게 뚝딱뚝딱 일처리를 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노하우를 습득하고, 마치 마술을 부린 것 같은 결과물들을 내 눈앞에 떡하니 펼쳐놓으니, 가끔은 아내가 마녀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 종자, 발효, 요리, 식생 등에 관한 지혜를 갖고 있던 산파, 할머니, 과부 등이 마녀라는 누명을 쓴 적이 있었지요. 당시 여성들이 가진 최소한의 영토였던 숲, 하천, 늪지대, 갯벌 등의 공유지를 약탈하기 위해 남성들이 벌인 마녀사냥의 역사가 『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라는 책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여성성의 지혜는 연결망의 지혜, 정동 속에서 싹튼 지혜라는 점에서 이른바 생태적 지혜, 살림의 지혜, 정동의 지혜라고도 불립니다. 반면 남성성의 지식은 분리하고 쪼개고 격리시켜 이상화한 진리이지요. 여기서 플라톤의 이데아, 아카데메이아, 철인정치 등은 남성적 진리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지혜롭지만 약탈당하는 자연을 여성성으로 보고,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을 남성성으로 본 에코페미니즘의 구도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여성성이 갖고 있는 생태적 지혜와 살림과 돌봄, 정동에 귀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되기(becoming)’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남성 되기’는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여성 되기와 남성의 여성 되기가 만나야 한다고 말하지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내면에 제 몫의 여성성을 잠재성으로 가지고 있으며, 여성 되기는 이미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남성이나 여성이나 살림의 지혜, 생태적 지혜를 공유해야 비로소 상호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남성, 여성 구분 없이 같이 살림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이야깃거리도 많아지고, 스토리도 생기고,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폭도 커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물학적 성(sex)이나 사회적 성(gender)으로서의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이 아니라, 저마다의 강도와 밀도에 따라 여성성과 남성성을 가늠하는 섹슈얼리티(sexuality)로 사유할 필요성이 느껴집니다. 꽃들은 한 뿌리에서 나와도 남성성이 강하면 수술을, 여성성이 강하면 암술을 만든다지요. 삶의 미세한 영역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여성성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저는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여성성의 영역을 더 넓혀나가려 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연구실 주변의 이웃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웃들과의 교류는 애정을 갖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하는 과정입니다. 그 첫 시도가 바로 인근 생활협동조합에서 조합원들과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대부분 주부라 관심사가 비슷하고,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와 생태적 지혜를 풀어내는 데만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중에 갓난아기를 업고 와서 공부를 하던 분이 있었는데 그 아기가 지금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으니, 벌써 만 6년 넘게 공부 모임을 이어온 셈입니다.

제가 생활협동조합과 접속한 것도 아주 작은 계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생활협동조합에서 주최하는 밥상모임이 있다기에 친구와 구경삼아 놀러 갔던 거죠. 그 후 저는 조합원이 되었고, 마을과 협동운동, 공동체경제에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더불어 지인들과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는 작은 삶의 변화, 특히 작은 사랑이 만들어낼 변화에 대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국지적인 사랑은 무엇일까요? 왜 변화를 만들어낼까요? 사실 사소한 일로 칠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아마도 그것은 비루하게 반복되고 고정된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여기-가까이 여러분 곁에 누가 있느냐고 말이지요.

지금 당신 곁에는 누가 있습니까? 사진출처 : fbhk

동물은 범위한정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들판이나 야산을 정처 없이 헤매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영토를 만들어 그 범위 내에서 먹이사냥을 하고 놀이와 구애를 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가까이에 있어 익숙한 사람들의 삶을 아주 깊숙이까지 시추해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국지적인 영역에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무리 먼 곳에 간들 이 세계의 깊이와 잠재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친구들은 제가 매일 연구실에 콕 박혀 있다며 걱정합니다. ‘여행 좀 가서 놀다 와라’라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아내와 고양이들과 이웃들에게서 색다른 면을 발견하는 것이 일상의 효모이자 촉매제가 되면서, 그들을 사랑함으로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느끼는 것이 저에게는 삶의 큰 의미를 줍니다. 겉으로는 작은 변화일지 모르지만 내면에서는 삶의 이유까지도 바꿔놓을 엄청난 혁명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국지적인 영역에서 아주 조용하게 진행되지만 우리 신체의 표면에 흐르고 있는 잠재성을 촉발하고 변용시켜 삶의 자기원인을 구성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은둔자에게는 모든 삶의 과정이 사건이라고 했던가요? 사소한 것에서도 심원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를테면 아내가 “고양이들에게 물 줬어?”라고 물을 때면, 의무, 당위, 책임이 아니라 “지금 고양이들에게 집중하고 사랑하는 거야?”라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이지만, 일상을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하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지금 막 발견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알아채지 못할 비밀이 평범한 일상의 주름들 속에 숨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사랑할수록 차이가 풍부해진다고 말했던가요? 사랑이 깊어질수록 세밀한 차이는 더 많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고양이들 화장실을 치우는 것이 예전에는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변비는 없는지 혹시 소변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해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생활협동조합에서 6년째 인문학 세미나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일상에 대한 농담을 하고, 집안 대소사에 대한 조언을 나누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삶의 촉매제이자 활력소가 됩니다. 그들은 옆 사람의 아주 미세한 차이에도 어찌나 눈이 밝은지 ‘다른 그림 찾기’의 명수들이 분명합니다. 점점 사랑이 깊어가는 모양입니다.

삶의 긍정은 욕망의 긍정

스피노자는 헤이그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몇 명의 친구들과 교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쓴 『에티카』의 출발점은 매우 작은 삶의 영역, 국지적인 영역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스피노자는 보편적이고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 즉 보편어법을 통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물론 『에티카』는 정리, 공리, 증명 등을 통해 ‘~은 ~이다’라고 단정하는 듯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국지적이고 작은 영역에서의 정동, 변용, 욕망, 사랑, 무의식과 같은 이야기들, 즉 삶의 이야기,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사랑과 욕망이라는 국지적이고 작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미 독자께서는 눈치챘겠지만, 이 책에는 ‘욕망’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등장합니다. 여기서의 욕망은 갈애나 탐욕이란 의미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로서의 욕망, 더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코나투스(conatus), 즉 자기보존 욕구라고 불렀습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삶 또한 ‘자기보존 욕구’, 즉 욕망이라는 동기에 따라 설명합니다. 삶을 긍정하기 때문에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욕망이 바로 삶의 자기원인, 즉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공화파 드 비트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스피노자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젊고 유능한 재상이었던 요한 드 비트에 의해 공화정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맙니다. 이에 성난 군중이 군주제로의 회귀를 외치며 요한과 그의 형제 코르넬리스를 죽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피노자는 ‘극악무도한 야만’이라고 외치며 칼을 뽑아들고 살육의 현장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드 비트 형제는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러나 당시의 헤이그 시내는 흥분한 학살자들로 가득했습니다. 그곳으로 갔다가 죽을 게 뻔한데 친구들이 스피노자를 가만 놔두었을까요? 친구들은 말고삐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는 결국 주위의 간곡한 만류에 울분을 참아야만 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그들은 삶을 긍정하고 구성하는 자기원인 중 하나였던 셈입니다. 스피노자를 부질없는 죽음이 아닌 삶의 긍정으로 향하게 했던 친구들은 그의 삶의 여백이며, 쉼표이며, 삶을 살게 했던 내재적인 동기였던 것이지요.

스피노자에 관한 또 다른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 중반은 근대가 태동하던 시기였지만 아직 중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였지요. 스피노자는 범신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스물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유대교회로부터 파문당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그는 밤낮으로 저주받을 것이며, 잠잘 때도 일어날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말이나 글로써 그와 교분을 나눠서는 안 되며,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서도 안 되고, 그와 한 지붕 아래 머물러서도 안 되며,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며, 그가 저술한 책을 읽어서도 안 된다”라는 판결문을 통해서, 지독한 저주와 사회적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 정도 조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한 광신도가 스피노자를 너무나 증오하고 혐오한 나머지 그를 살해하려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마침 추운 겨울이라 입었던 두터운 외투 덕에 스피노자는 다행히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지요. 대신 외투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지만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겪고 아마 다른 사람들 같으면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 돌발적이고 우발적인 상황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과 자기보존 욕구, 다시 말해 삶의 자기원인에 따라 상황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야만의 시대이지만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칼자국 난 외투를 거실에 걸어두고 신중과 조심을 신조로 삼으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라면 그런 우발적인 사건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더러는 혼돈과 무질서, 해체로 향하겠지요. 그러나 스피노자는 ‘광신도의 테러’라는 외부로부터의 우발적 사건을 ‘조심과 신중의 신조’로 만들어 자기보존의 욕구를 지켜냅니다. 이처럼 우발적인 사건에 마주쳤을 때 육체와 정신의 능력을 상승시킨다면 기쁨이 되고, 육체와 정신의 능력이 감소하면 슬픔이 될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삶의 내재적인 원인, 즉 살아가려는 의지와 노력, 삶에 대한 긍정과 삶의 욕망, 자기보존 욕구가 외부 요인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코나투스, 즉 삶의 욕망은 내 안에 있는 생명과 자연의 본성에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의지, 자기 보존의 욕구는 외부요인보다 중요하다. 사진출처 : TambiraPhotography

어느 날 여러분에게 몇 년간 해외 근무를 하라는 제안이 우발적으로 들어왔다고 가정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이국적인 장소와 색다른 삶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제안은 내 안에 있는 삶의 욕망, 자기보존 욕구를 증대시키므로 기쁨으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여러분이 가족과 함께하는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삶의 욕망이 좌절되어 슬픔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물론 내재적인 원인이 더 강하게 작용해서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슬픔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이처럼 외부에서 우발적으로 사건이 다가오더라도 내 안에 어떤 삶의 욕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삶의 내재적인 원인이야말로 그 어떤 외부적 요인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지요.

결국 스피노자가 코나투스, 다시 말해 자기보존 욕구라고 했던 욕망의 자기원인은 자신 안의 생명을 살리고 북돋고 촉발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 안의 생명과 자연의 능력인 욕망은 일관되게 삶을 풍부하게 활성화하는 기쁨의 방향성으로 향합니다.

소소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연쇄효과

스피노자는 사랑, 그것도 국지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사랑에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숨 쉬고 느끼고 지각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랑과 욕망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이유이며, 삶의 자기원인이 됩니다. 간혹 부모가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내가 너 때문에 산다”라고 말할 때처럼 말입니다. 굳이 특정한 대상이 없더라도 나 자신의 성취감 때문에, 혹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이 행복해서,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등으로, “내가 이 맛에 살지” 하는 그 모든 종류의 사랑이 바로 그 사람이 살아갈 이유가 되는 것이지요. 나아가 삶의 이유는 내 안의 자연과 생명의 능력, 즉 활력과 생명 에너지에 대한 긍정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꽃 피우고 열매 맺고 낙엽을 만들듯이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 변화가 바로 ‘변용’이며 ‘되기’라고 앞서 얘기한 바 있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 장애인-되기, 나비-되기, 꽃-되기 등등 작은 사랑은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아주 국지적인 영역, 접촉과 접속, 연결의 영역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을 초래하는 사랑의 특이점(singularity)이 발생합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흐르고 응축되면 변화가 발생한다.
사진출처 : NamasteNomad

특이점이란 원래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에너지가 고도로 응축되다가 어느 순간에 물질로 바뀌는 지점을 일컫는 말입니다. 흔히 빅뱅의 순간에 있었다는 ‘아주 작은 한 점’으로만 알고 있는데, 빅뱅뿐 아니라 일상 어디에나 특이점은 존재합니다. 변화가 발생하는 곳 어디나 말이지요. 그리고 변화는 그냥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흐름과 응축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그 에너지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한 작은 사랑의 특이점은 그냥 스쳐지나가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과 곁,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영향을 받은 모두가 눈에 띄게 변화하는 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태도를 결정할 것을 요구받지요.

그렇게 작고 미세한 변화는 연쇄반응의 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 가족, 마을, 공동체, 지역사회에서의 변화를 촉매하겠지요. 물론 출발점은 국지적인 영역에서의 작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시장을 보거나, 산책을 나가거나, 이웃과 대화하거나, 출근하는 등 삶의 사소한 과정에서 비롯됩니다. 이를테면 생활협동조합에서 주부들의 고민이 자기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에서 나아가 지구의 미래, 지구환경의 보존, 소수자와 생명에 대한 사랑 등으로 확대되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이런 예는 리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011년 서울 노원구 월계동 주택가 도로의 방사능 오염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직접 현장 사를 하고, 충격적인 사실을 세상에 알린 주인공은 평범한 부모들이었지요. 처음에는 ‘방사능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차일드세이브’라는 온라인 모임을 만들었고, 알음알음으로 방사능 관련 정보를 공유하면서 공부하는 한편 직접 방사능측정기를 들고 다니며 방사능 위험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산 농수산물 수입 반대운동과 GMO 반대, 화학첨가물과 미세먼지 문제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차츰 환경운동단체의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다고 하지요. 그 시작점은 ‘내 아이’였겠지만, 지금은 ‘지구의 미래’를 고민하는 시민운동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사랑은 연쇄효과를 일으켜 생태계, 공동체, 네트워크 등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스피노자는 세상 도처에 있습니다. 지금 작은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나선 가족, 친구, 이웃이 있다면 그들 안에 내재된 스피노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들에게서 세상을 향해 ‘사랑은 곧 혁명이다’라고 일갈하는 스피노자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글을 기하학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에티카』에도 정리, 공리, 증명, 각주 등 보기에도 어려운 수학 식 같은 글이 느닷없이 등장합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기하학적 방법론이었지요. 스피노자 역시도 유행을 좋아했나 봅니다. 본래 기하학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했습니다. 나일강 주변의 땅을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후 다시 구획을 짓기 위해 측량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바로 기하학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경계가 사라져버린 토지 면적을 다시 측량해서 분배해야만 분쟁이 생기지 않고 사회가 안정될 수 있었겠지요. 측량법으로부터 출발한 기하학은 이후 공간의 성질, 모양과 크기, 도형의 개념, 물체의 상대적 위치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교화되었고, 나아가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현상이나 생산기술, 경영, 법률, 인문학 등에도 논리적인 기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기하학적 사고방식, 즉 논리적인 사고를 모든 학문의 기본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아카데메이아의 정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마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수포자의 길을 걸어온 제 마음이 살짝 위축되는군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 구현한 방식도 기하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려낸 세상은 합리적인 추론이나 인과관계에 대한 것도 아닐뿐더러 수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랑과 욕망, 정동이 생성되고 변화하고 전염되는 과정을 지도처럼 그려나가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그것은 계속 변화하는과정에 있기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것이라는 경계선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계속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화해갈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그 궤적을 지도로 그려낼 뿐이지요. 그리고 그 지도의 출발점에는, 작고 국지적인 사랑이 만들어낼 놀라운 변화의 순간이 특이점으로 찍혀 있습니다. 어느 비 오는 골목길에서 아픈 길냥이의 처연한 눈동자와 마주쳤던 그날, 혹은 어쩌다 우연히 잡아보게 된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의 따뜻한 손, 누군가에게서 받은 꼬깃꼬깃한 편지, 상자텃밭에서 처음 수확한 토마토를 입 안에 넣었던 그 감각 등으로 말이지요.

한 번이라도 시도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닙니다. 그 복잡한 개념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과 욕망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의 길은 철학자들만이 지나가는 오솔길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서로 교직하고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와 공동체, 생태계가 지나가는 무한한 행로, 사랑과 정동의 지도를 그리는 무의식의 행렬, 해방과 자유를 향한 사랑의 일관된 흐름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일상의 곳곳에서 수많은 스피노자주의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작고 국지적인 사랑과 욕망의 약속과 지도 제작에 감응합니다. 사랑과 욕망의 자기원인에 따르는 한 삶은 영원할 것이라는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마치 스피노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 글은 단행본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사우, 2019)의 일부이며, 출판사와 협의 후 웹진 《생태적지혜》에 [스피노자의 사랑] 시리즈로 나누어 연재한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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