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학의 시작] ② 우리의 추모(축)제에는 다 맥락이 있다

오는 2024년 6월 29일에 신승철 1주기 추모(축)제 “지금, 여기, 가까이”가 열립니다. 기다리고 모시면서 신 소장님의 말과 글, 이야기를 소개하는 글을 매일 부칩니다.

[신승철학의 시작] 여섯 번째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2024.6.10.

“지금이 아닌 어딘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자우림 6집 〈Ashes To Ashes〉에 실린 곡 ‘샤이닝’을 여는 가사 한 구절을 옮긴다. 우리의 추모축제 ‘지금, 여기, 가까이’를 준비하면서 수심 깊은 고민이 생겼다. 이 자리는 남은 사람들을 위한 자리인가. 돌아간 이를 위한 자리인가, 다른말로 이 자리는 ‘지금, 여기, 가까이’ 있는 이들을 위한 자리인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있는 이들을 위한 자리인가.

생태전환대학 6강 제타안의 뜨개질 교실에서 만든 무언가. 뜯어진 바지를 꿰매는 패치워크를 상상했으나, 또봄이에게 사랑받는 장난감이 만들어졌다. 사진 : 장윤석

답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전자이겠지만, 나는 왜인지 돌아간 이와 더불어 ‘지금, 여기, 가까이’에 있지 않은 언젠가 어딘가 있을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뜻은 마음으로 이어지는가. 제도, 의례, 전수로 이어지는가. 이 대립항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대립이다. 마음 같아서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음만 남은 무형의 것이 형태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여럿 보아왔다. 기억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새기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것을, 고사한 나무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은 잊어야 내일을 살 수 있기에, 우리는 살기 위해 어제를 잊는다. 그것을 애써 확고하고 단단하게 조각하고 새기어 영구 보존하려고 드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위다. 그리고 아마 신승철 선생님이었다면 당신이 위인전에 올라 오래도록 기억되지를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왜 존경해 마지않는 학자가 시간의 흐름에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 이렇게 안타까운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죽은 학자의 일기장을 공개하는 제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말없이 돌아간 이를 대변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저평가를 정정해야하는 게 아닐까, 이 뜻을 이어서 대와 맥이 끊기지 않도록 삼대 째 이어지는 간장독처럼 지키고 살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빛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닦아가면서.

* 신 샘이 꿈에 나와 나를 혼낸 적이 있었다. 일기장 출판하지 말라고 혼낸 거였을까. 스스로의 애도에 무능한 탓에 사회적이자 공적인 애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다.


[신승철학의 시작] 일곱번째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 이런 사람이 다 있네

2024.6.16

문장을 수집하는 걸 좋아한다. 생태적지혜연구소 집들이에서 수집한 문장 몇 가지를 꺼내어 본다. 신승철 선생님을 수식하는 수많은 문장 중에 가장 인상에 남았던 문장을 꺼내본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었어요.“ 제님의 그 문장을 듣던 날, 사람이 살면서 꿈꾸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누군가 나의 부고에 저런 말을 해주기를 바라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나도 그 말에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코 함부로 말하기 쉽지 않은, 제일이라는 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 “이런 사람이 다 있네.” 생태적지혜연구소 집들이에서 만난 말들. 사진 : 장윤석

신 샘의 책을 읽으며 “이런 사람이 다 있네” 싶었다는 민님의 말을 수첩에 적었다. 이 말은 나중에야 ”이런 사람이 있었었네”로 시제가 변화했다고 한다. 신 샘이 평소 자주 인용하던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세계의 소멸과도 같다”는 들뢰즈의 경구가 떠오른다. 그리움이 유독 잦은 근래인데,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한 사람 이상의 어느 한 세계이구나 싶다. 이 믿음에 동참하고 싶어졌다.

다시 돌아와, 돌아간 이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었기에 그와 관계 맺으며 그 조각을 나누어가진 우리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혁명론을 가지고 있다. 집권을 꿈꾸기도, 법에 호소하기도, 정책을 만들기도, 조직을 다지기도 한다. 어느 하나 틀린 방법이 없다. 다만, 이와 같이 혁명을 시도해온 이들은 아마 그 과정에서 만난 공허함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수많은 조직과 전략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가운데, 남는 것은 기억과 사람뿐이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모두의 혁명법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되고 되어주는 게 아닐까.

어느 말과 글과 철학과 이야기보다 그냥 그 사람 하나가 전부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리움을 달래는 길은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길밖엔 없는 것 같다.


[신승철학의 시작] 여덟 번째 사랑은 옳다

2024.6.20

아주 오랜만에 그것도 우연히 다시 마주친 친구는 그간의 여정을 세 문장으로 요약했다. 이분법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반복되는 것 같지만 나아간다. 언제나 사랑은 옳다. 이 아름다운 문장들의 배열에 잠시 넋을 놓았다. 누가 신승철학을 요약하라고 해도 똑같이 말할 수 있겠다.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은 때론 가장 단순한 문장들로 온다. 오늘은 그 미묘하고도 어려운 사랑에 대해 추억에 잠겨보려 한다.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은 때론 가장 단순한 문장들로 온다. 사진 : 장윤석

신 샘은 가끔 분자혁명이니 배치니, 국지적 절대성이니, 온갖 어려운 개념들을 말하다가 결론을 말할 때 사랑의 샛길로 빠지곤 했다. 정신줄 놓고 듣다보면 어느샌가 “그래서 사랑입니다.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집니다.”하고 짐짓 진지한 얼굴로 사랑과 정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럴 때면 솔직히 띠용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면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던 형식과 시스템만 남고 관계와 사랑이 부재하기 일쑤인 듯하다. “타자화의 논리는 사랑에 무능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66p)”는 말도 깊게 남는다.

신 샘의 사랑을 묘한 철학의 주인공들만큼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계속 이곳에 발걸음을 옮기게 할까 물으면, 사랑말고는 답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채감도, 후회도, 존경과 경의도 표면이고, 안에 있는 것은 복잡한 사랑이다. 내가 받았던 사랑과 내가 가졌던 사랑이 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가까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저마다의 다양한 그 사랑의 형태와 모양이 섞이어 우리가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추모축제의 초대장을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는 곳곳에 전하면서 신 샘 생전에 미처 인연을 만들어두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내가 받았던 사랑의 기회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지나고 후회하는 것은 늘 늦기만 하다. 그리고 찾아오는 작은 깨달음은, 신 샘이 돌아간 지금 그 역할을 우리가 나누어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 이럴 때 그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그리워함을 내가, 너가, 우리가 그가 되며 풀어가면 되는 게 아닐까. 스피노자와 가타리를 거쳐 사랑은 변용이고, 그 변용은 우리에게 지혜를 선사한다는 신 샘의 말이 깊게 여겨진다. 사랑은 옳다.


[신승철학의 시작] 아홉 번째 나의 장례식

2024.6.21

사람의 생을 돌아보기에 그의 장례식만 한 곳이 있을까. 한평생 이 사회의 가장 뜨겁고 절실한 곳 옆으로 밥묵차를 끌고 가 밥을 차려왔다는 유희 님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영정 사진에 절을 올리고, 빈소를 지키는 분들께 인사를 드린다. “어떻게 오셨는지…” “아, 언젠가 밥을 한 상 얻어먹은 감사한 기억이 있어서요.” “고맙습니다. 오늘도 드시고 가셔요.” 한 번 주고받은 대화에 실로 많은 것들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많이 슬퍼했고, 많이 웃었다. 돌아가신 분을 모두가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정동을 느꼈던 것 같다.

어떤 죽음은 어떤 삶을 그 전으로 돌아올 수 없게 한다. 사진 : 장윤석

꼭 1년 만이다. 신승철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던 그날, 아마 단톡방에 있던 100여 명의 조합원 모두는 이 비보를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설마요, 정말인가요, 그럴 리가 따위의 말들을 썼다가 지웠다. 늦은 밤에 허둥지둥 옷을 입고 버스를 탔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마주친 이들의 눈동자를 보고나서야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게, 잊히지 않는 눈동자들이 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그 눈동자와의 만남에 내 안의 무언가가 달라짐을 느꼈다. 나중에서야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읽고 공명했다는 말을 들었다. 무언가를 보는 신체 기관으로서의 눈이 보이지 않는 스스로를 보는 방법은 (거울을 포함한) 타인의 눈동자를 통해서 뿐이라는 아이러니가, 묘하다.

어떤 죽음은 어떤 삶을 그 전으로 돌아올 수 없게 한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저 그럴 뿐이다. 그 장례식에 다녀온 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분노와 열정이 사라지고 우수와 멍 때림, 돌아봄이 늘었다. 대운이 바뀌었다. 그뿐이다. 바뀐 데는 바뀔 만한 이유가 다 있을 뿐이다. 곧이어 떠나 걸은 순례길에서 어느 날은 꿈에서 깨어 눈물이 나고, 어느 날은 괜스레 편지를 적어 그 눈동자들에 부쳤다.

처음에는 슬펐는데 나중에는 좀 웃기다. 장례식장에서 가만 보면 눈물바람과 웃음바다가 함께 있다. 생각하니 신 샘의 발인 날 돌아온 문래동에서 참 많이도 울고 웃었다. 그 정동의 조화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게 아닐까. 우리 사회가 삼 년 상이 삼일 상이 되어버리는 가운데 애도의 무능과 상실에 젖어든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더욱 리추얼, 다채로운 장례의 정동과 계보를 잇고 싶다. 신 샘이 언젠가 나의 장례식을 이야기하며 ‘좋아요’ 눌렀다는 글을 함께 옮기며 생각해본다. 나의 장례식은 어떨까. 우리의 추모(축)제에는 다 맥락이 있다.

난 내 장례식이 페스티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해요. 날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내 치부나 내 흑역사 들추면서 나 놀리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다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스럽게 나를 한번 더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그래야 나도 기분 좋게 갈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슬퍼하면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이보람 웹툰 〈어쨌거나 청춘〉 2막 #244 중


[신승철학의 시작] 열 번째 보이지 않는 관계망

2024.6.23

뭣이 중한디 하는 질문이 던져질 때 철학이라고 답할 때가 제일 많지만, 경제학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고, 사회운동과 정치라고 강렬히 느꼈던 때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중한 건 보이지 않는 관계망인 것 같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놓친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보이지 않았던 관계망이 나를 숨쉬게 하는 공기 같은 존재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스치운다. 어떤 온도와 습도, 그리고 풍경은 보이지 않았던 걸 보이게 하는 것 같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과정, 이 보이지 않는 관계의 성좌에서 나타난 배치와 정동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사진 : 장윤석

어제는 육 년째 이어지는 녹색 책모임 GPS가 있었고, 오늘은 오 년 차 이어지는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재판 회고 모임이 있었다. 얼굴들 가운데 둘러싸여 스쳐온 시간 속 보이지 않았던 관계망을 생각했다.

생각하면 내 안에 흐르는 피가 처음부터 녹색이었던 건 아니다. (지금도 빨간 피가 흐르고는 있다.) 어찌 녹색으로 왔나 생각해보면 답은 단순하다. 그저 만나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그리고 또 만나며 이것저것 통하고, 그리고 만나며 추억을 기리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밖에.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과정, 이 보이지 않는 관계의 성좌에서 나타난 배치와 정동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주책이 심한 요즘, 나는 지나간 모든 순간과 지나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따라서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순간을 쉬이 스쳐 보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관계망을 정성을 다해 소중히 여기는 것뿐이다. 숲 속의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하면서.

“가타리의 생태는 자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회, 더 나아가 마음까지 생태의 원리가 적용된다. 따로 떨어진 100그루 나무보다 서로 연결되어 숲 생태계를 구성한 50그루의 나무가 더 외부 조건에 맞설 수 있다. 그리고 이 숲 생태계 속에서 벌레, 동물, 버섯 등의 생명들이 생성되며 창발될 수 있다. 마음도 사회도 자연도 생태를 이룬다는 생각은 어렵게 느껴지는 개념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를 생각해 보면 금방 그림의 구도를 그릴 수 있다. 생태계는 마치 네트워크처럼 직조되고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나 주위에서 끊임없이 특이한 것을 생산하는 창조적인 관계망이다. 나무와 태양, 바람과 물, 나비와 꽃, 동물과 인간과 같이 연결망은 보이지 않는다. 숲에 조용히 누워있으면 미세한 변화마저도 마음을 자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숲은 조용하지만 보이지 않는 강렬한 흐름이 지나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숲은 생명을 창발한다.” – 신승철, “아, 지금이야말로 녹색당이 필요한 때다!”, 프레시안, 2014 중

장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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