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컴퍼니] ⑳ 옆으로 뻗어나가며

나는 고향이 없다. 아니 고향을 설명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아래로 뿌리내리지 못했던 것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계속 움직이며 살아가는 동안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감각을 오히려 편견 없이 배우기도 했다. 뿌리는 어떻게 뻗어갈까. 새로운 연결망의 감각은 변방과 경계의 두려움을 다독이는 동시에 그 연결마디를 재배치한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서로에게 잇대어가는 삶, 그렇게 옆으로 뻗어나가는 동안 중심과 변방은 뚜렷한 구분 없이 희미하게 얽힐 뿐이다.

고향 없는 삶

얼마 전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목적으로 부산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나는 부산 서면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지역 코드는 부산이 아닌 강원도를 가리킨다.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집은 강원도 양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구에는 아이를 낳을 만한 병원이 없었고, 엄마는 고향인 부산에서 나를 낳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부모의 고향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도 명절이면 당연하게 부산에 내려갔다. 조부모님과 친척들이 사는 곳이었기에 부산은 늘 익숙한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여행자로 찾아간 부산은 꽤 낯설고 새로웠다. 유명 관광지의 지명보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낯익은 동네와 아파트 단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도 부산은 내게 고향이 아니다. 태어났을 뿐 자라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양구를 고향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양구, 횡성, 원주, 성남, 대전 … 전곡, 파주, 동두천 그리고 서울.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던 유년 시절에는 부산을, 혹은 양구를 내 고향으로 삼아보려 애쓰기도 했다. 전학 간 학교에서 들었던 “어디에서 왔어?”라는 질문은 꼭 “네 고향은 어디야?”라는 물음처럼 다가왔다. 직전에 살던 지역을 설명해야 했고, 그러다 보면 내가 태어난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명확한 고향이 필요했다. 내가 태어난 병원이 있는 부산 서면이 고향일까? 아니면 아빠가 내 출생신고를 양구가 내 고향일까? 이처럼 내게 고향은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그때마다 부여되는 의미에 따라 재구성되는 곳이었다. 성인이 되고 보니 직면한 ‘그렇게 설명해야 하는 곳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현실은 나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리좀적 사유, 그리고 경계 위의 존재들

리좀(rhizome, 뿌리줄기)은 옆으로 자라며 마디마다 새로운 순을 틔우는 식물의 형태를 말한다. 리좀적 사유는 나무적 사유와 달리 중심, 위계질서, 시작, 끝을 상정하지 않고 항상 새롭게 변화하는 방식을 지향한다. 사진 출처: John Anil

불완전한 뿌리는 내가 어느 땅에서 왔는지, 어느 동네 사람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늘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늘 어색했기에, 정을 붙이려 노력하다가도 결국은 떠나야 할 곳임을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 도래하곤 했다. 어디론가 이사를 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하는 동안 먼 이국 땅에서 체감하는 타향살이 못지않게 아슬아슬한 삶이 이어졌고, 그 결핍을 견뎌내기 위한 새로운 생존 방식을 요구했다.

아마도 배치, 소수자 되기, 정동(Affect)과 같은 신쌤의 이야기가 딱딱한 철학 개념이 아니라 이해하기 쉬운 삶의 지혜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이러한 나의 배경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깊은 뿌리를 갖지 못했다고 움츠리던 때에 신쌤의 이야기는 이질적인 땅에 내리고 거두기를 반복하는 동안 뿌리가 반드시 땅 아래로만 깊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다는 ‘리좀적 사유’는, 땅의 중심이 여러 군데에 분산되어 있던 나에게 너무나도 친근하고 해방감을 주는 상상력이었다.

실뿌리들의 긍정

얼마 전, 재일 코리안(자이니치) 3세로 한국에 살고 있는 김이향 씨가 쓴 『다음 리카에게』가 출판되었다. 저자는 일본에서 자라 대학까지 마쳤지만 국적은 한국이다. ‘김’이라는 한국 성을 쓰고 있지만 일본어가 유창하고 한국어는 서투르다. 익숙함과 낯섦, 유창함과 서투름의 경계에서 그녀는 자신의 언어와 출신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해명해야 한다.

경계에 놓인 삶은 이처럼 설명과 해명의 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다. 하지만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 즉 약한 뿌리를 가졌다는 것에는 뜻밖의 미덕도 존재한다. 하나의 중심이 너무나도 강력하여 그 정체성이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중심의 공고한 익숙함 속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할 새로운 다양성과 마주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결국 뿌리를 아래로 깊게 내리지 못하는 만큼, 옆으로 넓게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셈이다.

이번 부산 여행은 나에게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내 안의 수많은 중심들을 다시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이제 나는 고향이 없다는 사실에 더 이상 서글퍼하거나 방황하지 않는다. 단단하게 고정된 하나의 고향은 없을지라도, 내가 머물고 거쳐 간 모든 공간에 나의 실뿌리들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이 없다는 것은 어디로든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계 위에서 서성이는 삶은 늘 해명과 탐색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매 순간 새로운 삶의 배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연함을 선물한다. 든든하게 아래로 뿌리 박히지는 못했지만, 이제 그걸 약점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언제든지, 경계를 넘어 부지런히 옆으로 뻗어 나가며, 내가 마주할 새로운 땅과 사람들을 향해 삶을 넓혀갈 기회가 될 수 있겠다.

김준영

세상에 여러 얽힘, 연결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세계기독교와 상호문화를 공부하고 있고,달리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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