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출간] 생태적 지혜란 무엇인가

신간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 출간을 기념하며,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이사장 이승준과 출판위원장 홍승하가 작성한 [프롤로그]를 소개합니다. 이 글에는 책 전반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생태적 지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공동 저술 작업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커먼즈적 실천의 의의와 ‘왜 지금 우리에게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철학(philosophy)은 어원상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지혜(그리고 지혜로운 자들)에 대한 존중과 관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철학은 지혜로운 자들인 소피스트들이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혜를 가졌다’고 자부하고 있다는 식의 문제인식과 함께 출현했다. 델포이 신전 입구에 새겨진 문구 ‘너 자신을 알라’를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신적 권위를 빌려 ‘무지(無知)의 지(知)’를 이해하지 못한 소피스트들에게 가한 비판이자 그들에게 너 자신이 가진 앎의 본질을 알기 전에는 앎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금지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철학이 가진 이러한 문제의식은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비극을 낳았다.

〈소크라테스의 초상〉, 리시포스 (제작 추정), 약 1세기 경, 대리석,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첫째, 철학은 지혜를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어떤 앎, 오로지 감각적 경험과 거리를 두고 그것을 넘어설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앎의 수준으로 위치시켰다. 철학이 출발한 이래로 앎은 이제 소수에게 집중되고 독점되는 무엇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철학은 학문을 출발시키기에 앞서 누구도 앎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침묵의 세계를, 정확한 앎을 알지 못한 자는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식의 일반적 무지를 만들어내야 했다. 둘째, 철학은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몸에서 분리시켜 그것을 결핍과 결여의 언어와 결합하게 만들었다. 철학은 아직 가지지 않은 것이나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러한 사랑을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몸의 행위가 아니라 물질에서 초월한 어떤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즉 철학은 욕망이 생산되는 바로 그 현장인 몸(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을 떠나 욕망 없는 행위로서 사랑을 그려냈던 것이다. 왜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것일까?

‘철학자’의 전형적 이미지를 만들어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철학’을 퀴디타스(Quidditas), 즉 ‘X란 무엇인가?’의 형식 아래 변하지 않고 늘 동일하며 시공간을 초월한 인식, 추상적이면서 보편적인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러한 참된 인식의 도달이 아카데미와 학문의 기원이 된다(실제로 ‘이데아’ 개념을 정초한 플라톤이 제자들을 양성하려고 만든 학교의 이름은 아카데메이아였다). 이렇게 철학은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 일컫던 소피스트들과 대결하면서 동일성, 초월성, 보편성, 규범성 등을 담지한 ‘지식’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생태적 지혜(ecosophy)는 이와 정확히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생태적 지혜를 다양성, 생성, 내재성, 특이성으로 구성되는 ‘삶-앎’으로 이해한다. 철학이 만들어내는 초월적인 앎이 살아 있는 자들의 감정과 경험을 배제한 로고스(이성)와 두뇌의 산물이라면, 생태적 지혜가 만들어내는 삶-앎은 몸의 에토스(습관), 타인과의 정동적 관계, 세계와의 깊은 유대감 등에 바탕을 둔다.

철학적 지식이 대상을 명확히 규정하는 본질에 대한 물음의 형식 아래 의미화와 기표화의 양상으로 드러난다면, 생태적 지혜의 삶-앎은 의미를 규정하고 확정 짓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앎을 구성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는 모호함과 애매함에 휩싸인 흐릿한 영역에 머무르면서 늘 어떤 질문을 던지는 행위로 이어진다. 뚜렷한 구별 짓기와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를 유보하면서 앎의 차원을 미래를 향해 열어 놓은 일은 생태적 지혜가 지닌 윤리적 태도가 조심스러움과 기다림, 양보와 침착에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철학적 사유나 아카데미적 지식이 규정적 판단, 진리 인식, 표준적인 범주로 기능하는 것과 달리, 생태적 지혜는 과정과 되기,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앎, 다양하고 특이한 사례 제시로 그 형태를 드러낸다. 또한 철학과 아카데미의 지식이 추상적인 개념에 의미를 부과하고 그것의 닫힌 진릿값을 좋은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생태적 지혜의 삶-앎은 잠정적인 합의, 여러 개념의 횡단, 개방적이고 변형적인 의미망에 두루 걸치기를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생태적 지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미리 상정되어 있는 어떤 본질에 대해 묻는 물음으로 한정될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생태적 지혜란 무엇을 하는가?’, ‘생태적 지혜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물음으로 다뤄지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그 의미를 배반한 것과 달리, 우리는 생태적 지혜를 통해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길을 걷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철학이 이해한 ‘사랑’을 결여와 결핍의 의미에서 해방시켜, 충만한 자들의 관계 맺기,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만들어내는 활동, 계속해서 욕망을 생산하는 활동 등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철학이 사랑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채우기 위해 타자를 향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과 달리, 생태적 지혜는 사랑을 존재의 기쁨으로 충만한 자들이 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타자를 향하는 행위로 이해한다. 그러한 사랑의 행위는 사랑하면 할수록 삶과 앎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태적 지혜를 설명할 최고의 원리로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라는 테제를 내세우고자 했다.

덧붙여 생태적 지혜가 열린 앎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생태적 지혜라는 말 자체야말로 열린 토론의 장에 맡겨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서 우리는 생태적 지혜가 철학과 대립한다는 생각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또한 우리 중에는 철학에는 다른 전통, 생명 친화적이면서 낯섦을 수용하는 전통도 있기에 생태적 지혜가 반드시 철학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이도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똑같은 단어인 ‘에코 소피(ecosophy)’를 생태적 지혜가 아니라 생태에 대한 철학 즉 ‘생태 철학’으로 옮기고, 그것을 철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다른 철학적 흐름과 연결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글도 실었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옮기면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것이 생태적 지혜가 가진 문제 제기적 사유, 고정되지 않고 변형 가능한 앎의 차원을 드러내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무비피 물무비사 자피즉불견 자시즉견지(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見之)’, 즉 ‘사물은 저것이기도 하고 이것이기도 하다. 저것에서 못 본 것을 이것에서 보기도 한다’는 장자의 말을 빌리자면, 에코소피는 생태적 지혜이기도 하고 생태 철학이기도 하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부족한 면을 도와서 그 이해를 넓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태적 지혜와 커먼즈

근대 초기인 17세기, 아카데미는 국가(영국)에 의해 공인된 ‘왕립 학회’의 설립과 함께 더욱 강력한 지식 독점 기관이 되었다.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아카데미와 국가 공인 지식 기관으로서의 왕립 학회는 앎에 등급을 매기고 전문가를 양성함으로써 소수자적인 앎을 배격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결합하는 계기로도 작동했다. 아카데미의 지식 생산이 공유지에서 싹튼 생태적 지혜의 다채로운 사유 경로를 봉쇄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을 뒷받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영국에서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에게 숲을 공유지로 개방하게 되자─우리는 이것을 「마그나카르타 선언」의 자매 문서인 「숲의 헌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부(喪夫)한 여성은 공유지에서 합당한 양의 에스토버스를 취한다.”1─그녀들에게서 약초, 발효, 벌레 퇴치, 종자, 식생 등 다양한 생태적 지혜가 싹텄다. 그러나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제의 신봉자들은 이렇게 형성된 여성들의 생태적 지혜를 ‘마녀사냥’의 이름으로 처단했던 바 있다.

상부한 여성들의 생태적 지혜가 커먼즈를 터전 삼아 발생한다는 점은 당시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와 두 가지 측면에서 충돌한다. 우선 커먼즈와 사적 소유제의 대결이 있다. 사적 소유제는 인클로저에 의해서만, 즉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타인의 출입이나 이용을 불허함으로써만 강화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클로저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박탈하고, 그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이동해 무산자로서 대량의 산업예비군을 형성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었다. 이 대량의 무산자들이 생존을 위해 자기 신체를 자본가에게 판매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들이다. 이처럼 커먼즈를 해체하고 그것을 사유 재산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자본주의가 고도의 축적 체제로 나아가는 결정적 조건인 노동자의 대량 생산이 있으며, 이를 위해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제는 커먼즈 해체에 사활을 건다. 따라서 커먼즈를 방어하려는 이들이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제의 거대한 장애물이 된다는 점에서 커먼즈를 터전 삼는 이들은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의 생태적 지혜는 자연과 커먼즈를 ‘살아 있는 유기체’이자 ‘어머니 대지’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사진 출처: Kristaps Ungurs

둘째, 상부한 여성들의 생태적 지혜는 사적 소유제를 강화 하려는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뿐만 아니라 남성 전문 지식인들로 구성된 왕립 학회의 이해관계와도 충돌한다. 여성들의 생태적 지혜가 자연과 커먼즈를 ‘살아 있는 유기체’이자 ‘어머니 대지’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달리, 왕립 학회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자연을 생명 없는 대상,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연을 인간 이성이 관찰하고 파악할 객관적 대상으로 만들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 왕립 학회는 여성들의 전통적인 치유 기술, 산파술, 생식에 대한 지식, 종자 보존의 지혜를 ‘미신’으로 몰아세우고 폐기함으로써 자연과 여성의 몸에 대한 앎을 통제 및 독점하고자 했다. 나아가 생식 능력을 가진 여성의 몸은 자본의 입장에 서는 생산에 투여할 임금 노동자 공급처이기도 했기에 생식과 여성 신체에 대한 앎이 통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숲과 식물, 몸에 대한 지혜들이 자본가 및 전문적인 지식인들(의사, 물리학자, 생물학자 등)의 수중으로 집중되었고 이후에는 아카데미에서만 배타적으로 다뤄지는 지식의 형태로 변모되었다.

그렇기에 마녀사냥은 여성들에 대한 공격 그 이상으로 생태적 지혜와 그 지혜를 형성하게 했던 커먼즈에 대한 잔혹한 공세였다고 말할 수 있다. 커먼즈와 여성에게 살인적인 폭력을 가하는 마녀사냥의 결과, 아카데미는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핵심 장소로 등록되었고, 세상에 대한 모든 지식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아카데미와 그것의 진리 인식은 생태적 지혜 및 커먼즈를 억누르고 그와 대립하는 위치에서 앎을 독점한다. 아카데미는 전문가들의 의미화, 모델화, 표상화를 통해 여러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음에도 하나의 동일한 대답을 규정하고자 애쓴다. 그와 달리 생태적 지혜는 대답보다는 문제 제기를 더 중시하면서도,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할 수 있으며, 그러한 답변조차 다양한 이해와 복수적인 관계에 따라 넓은 범위로 제시될 수 있다. 그렇기에 생태적 지혜는 하나의 문제 제기에 대해 여러 개의 답변이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며 그러한 대답을 지도화, 횡단화, 놀이화하는 방식으로 작동시킨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생태적 지혜를 커먼즈와 소수자들의 사상이자, 생명·생태적 연결망의 앎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생태적 지혜와 기후위기

기후위기와 생물 멸종은 우리의 일상을 재편하고, 삶의 양식 자체의 심원한 변화를 촉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는 기후위기와 생물 멸종을 세련된 최신의 과학적 정보와 통계적 지식으로 인식하고 수용하려고 할 뿐, 그것을 극복하려는 지혜와 정동(affect)의 관점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근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지적 분위기에서 과학과 기술을 통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으로만 문제를 이해할 뿐, 자연과 세계를 구성하는 내부 존재로서 무수한 인간 및 비인간 존재들과 협력해 세계를 어떻게 함께 생산할지를 고민하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후위기와 생물 멸종에 대한 확실하고 명확한 하나의 정답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 상황과 대면하면서 여러 다양한 형태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몸으로 구현하는 생태적 지혜, 즉 삶-앎의 실천 행위가 필요하다. 기후위기와 생물 멸종은 단순히 어떤 하나의 원인이나 특정한 몇몇 집단이나 지역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 피해도 국지적 영역이나 일부 집단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의 위기는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 및 비인간 존재자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함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오늘날의 위기를 앞에 두고 생태적 지혜를 발휘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공동-생산의 관점, 공생의 관점, 내부-작용의 관점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인간이기 이전에 지구에 거주하는 저 무수한 존재가 매 순간 만들어내는 생산물이자 그들과 연결되어 거대한 마음의 세계를 구성하는 합생체이자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연결망을 만들어내는 세계의 리좀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인류에게 돌려져야 할 기후위기와 생물 멸종에 대한 책임을 생태계 전반, 지구 거주자 일반에게 전가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현재의 위기를 인류라고 불리는 단일한 주어가 지구를 망쳤다는 서사보다는 근대적 인간 삶을 추동해 왔던 질서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도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현재의 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제안에도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인류세, 자본세, 행성 세, 쑬루세 등의 용어들이 현재의 생태 위기를 표현하고 그 해법을 찾아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어떤 하나의 용어를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용어로 확정 짓기보다 여러 가지 차원에서 현재의 위기에 접근하는 다양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때로는 인류세를, 때로는 쑬루세를 사용하고, 또 그 해법으로서 생명 대전환, 기후 정의, 탈성장 등의 관점을 맥락에 따라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우리가 위기의 원인을 모호하게 이해하고 있거나 그 해법을 두고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문제를 이해하는 다른 접근법, 원인을 포착하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다. 가령 우리는 생태 위기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고 그래서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질문하기보다 현재처럼 불안하고 트러블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지, 우리에게는 어떤 능력이 필요하고 어떤 관계 맺기를 시도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멸종되고 있는 존재들에게 응답할 것인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책임(responsibility)을 ‘누군가가 맡아 해야 할 임무나 의무’로 이해하기보다, 그것의 어원 그대로 ‘응답 능력(response- ability)’으로 이해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거나 제거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기보다 문제와 함께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응답의 실을 계속 엮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 덧붙여 다종적 얽힘의 세계 안에서 함께 잘 살고 함께 잘 죽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다종적 얽힘의 구성원에는 동물, 식물, 인간만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인간이 만들어 냈지만 인간의 손을 떠나 생태계 전체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비인간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핵발전소, 자동차, 비행기, 에어컨, 플라스틱, 석유, 화학적 합성물 등등은 비록 그것이 인간의 생산 활동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더라도, 생산된 이후에는 인간의 손을 떠나 그 자체 거대한 독자적 작용을 일으키는 행위자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후위기와 멸종에 대처할 대안은 이러한 존재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활동, 그리 고 다양한 생물종들과의 연대와 연합을 통해서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생태적 지혜’가 우리 시대에 발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생태적 지혜는 커먼즈에서 발아했던 약초, 벌레 퇴치, 식생, 발효, 요리, 저장 등의 지혜에서 시작한 연결망의 지혜이자, 정동과 살림, 돌봄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개막은 절기살이나 식생 등 생태계 전반의 순환 과정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앎으로서의 지식이나 과거 경험의 단순한 축적만으로는 부족하고 미래를 향해 열리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 미래적 지혜는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아니라, 적정 기술, 녹색 기술, 친환경 기술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사물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 인류 자신의 삶의 태도의 변화, 새로운 앎을 만들어 내는 도전과 모험을 펼치는 일이어야 한다.

생태적 지혜와 개념어 사전

생태적지혜연구소 기획,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알렙, 2026)

통상 사전은 ‘~은 ~이다’라고 개념을 규정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 지식을 보편화해 사회에 두루 통하는 지배적 규범으로 자리 잡게 하는 아카데미적 작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다. 계몽주 의자들과 백과전서파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전을 통한 개념의 고정은 몸, 타자, 욕망에 대한 인간 이성 및 의지의 우위를 확인하고 자연과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근대인의 강한 열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생태적 지혜의 관점 그리고 그와 연동 되는 구성주의적·관계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개념은 흐름과 과정의 세계 안에서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다’는 경 계 횡단적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사전에서는 책상이 ‘글을 읽거나 쓸 때 이용하기 위한 상’으로 정의되지만 실제로 책상은 누구와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따라 요리대가 될 수 있고 사다리가 될 수도 있다. 고양이에게 책상은 낮잠을 자기 위한 침대이고, 파리에게 책상은 날기 직전의 도약대일 것이다. 이처럼 개념의 의미란 배치와 관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계속되는 생성에서 우리 자신과 삶의 활동과 함께 구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개념어들을 고정하고 확정 짓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 그 개념이 흐르고 변화하는 과정을 잠정적으로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책은 비록 사전이라는 형식 아래 개념을 일정한 형태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 작업을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개념이든 사회적 변화나 특정한 실천에 따라 계속 변동하고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모든 개념은 미래를 바라보며 열려 있다. 우리는 이 용어들을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실천하는 개념이라 여기며, 이 책을 접하는 수많은 독자에게 그 차원을 함께 펼쳐 보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물질과 개념의 한가운데(통상 사람들은 이것을 ‘본질’이라고 부르곤 한다)에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서 그 바깥을 바라보며 사고하고자 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가장자리야말로 낯선 이들과 만나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접속하며, 그러한 접속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발아하는 장소라고 이해한다. 가장자리는 존재가 확장되는 경계면이자 개념이 변경되는 사건의 지대다. 우리는 그렇게 개념들의 가장 자리에 서서 읽는 이와 대면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의 개념어들이 읽는 이 안에 내재한 생태적 삶과 앎을 자극하고, 그것이 애초 출발했던 그 개념들을 다시금 진화시키기를 기대한다. 개념어들은 매번 갱신되면서 풍부한 의미(그리고 비의미)로 넘쳐 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같은 역동적 관계가 결국 지구 내 모든 생명이 살아가고 진화하는 방식이라고 믿으며, 그러한 변화에서 각 존재가 자기 삶의 길을, 각자가 번영하는 길을 열어 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이 생태적 지혜가 지향하는 ‘삶-앎’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앎과 개념을 독점하고 그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우기에 급급한 지식인들의 아집에 맞서면서 현실 의 삶에서 작지만 치열하게 혁명하고 있는 활동가로서 이 책을 발간하고자 했다. 지구에 거주하는 어떤 존재와도 편견 없이 마주하고, 함께 세계 짓기를 이루어 내는 공동-존재로 바라보려는 공생자로서 다가가고자 한다. 그래서 소수자-되기, 숲-되기, 바람-되기, 분자-되기에 힘쓰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또한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변신체로서 독자와 만나고 싶다. 우리는 카멜레온의 능력을 빌려와 글을 썼다. 우리는 풀잎처럼 산들바람에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방식으로 사고하고자 했다. 우리는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 단단한 기반을 무너뜨리면서 새 땅을 일구고자 했다. 우리는 난초와 사랑을 나누는 말벌처럼 경계를 넘어서는 어떤 영역을 생각하려 했다. 우리가 이 책에 담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소박한 어떤 것이었다.

인류세와 대멸종의 시대, 그리고 빼앗긴 미래

『생태적 지혜 개념어 사전』은 오늘날의 위기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기후위기와 체제 붕괴를 극복할 대안적 사유들을 묶어 낸 소중한 사유의 지도다. ‘인류세와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지금 우리 모두가 겪는 다중 위기가 일시적인 경제 불황이나 정치적 파동이 아닌, 문명 전체의 전환기에서 발생하는 지질학적·행성적 위기임을 선언한다. 2000년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제안한 인류세라는 개념은 인간의 도구적 활동이 지구 시스템의 경계를 무너뜨려 홀로세의 안정적인 기후를 종식시켰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미래 세대를 포함한 인류 전체에게 그리고 미개발 지역으로 통칭되는 이른바 제3세계에 고스란히 ‘빼앗긴 미래’의 형태로 전가되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은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거대한 물질적 풍요에서 살아가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빈곤하고 위태로운 환경을 걱정하면서 다가오는 파국적 미래를 예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생태학에서는 ‘기준선 이동 증후군(Shifting Baseline Syndrome)’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환경 파괴가 서서히 일어날 때 세대마다 ‘정상적인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점이 점차 낮아져 결국 훼손된 현재 상태를 정상으로 착각하게 되는 현상을 지시한다. 이것은 현재 우리 자신이 겪고 있으며 또 미래 세대가 겪어야만 할 비극적 상황의 단면일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 ‘침묵의 봄’(레이철 카슨)이 현실화되고, 야생 동물의 개체수가 격감하는 대멸종의 한 가운데서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적 고통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혼돈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파국을 직감하는 ‘기후 불안(climate anxiety)’이자, 소중한 지구에서의 거주 가능성이 상실되는 과정을 목격하며 느끼는 ‘생태 슬픔(ecological grief)’인 것이다.

또한 지역은 도시의 문명을 떠받치는 에너지와 자원의 공급처이자 쓰레기장으로 조성되고 있다. 거대 도시들에서 공해 없는 전기차를 굴리기 위해 지역의 숱한 생명의 터전을 파괴하며 발전소가 들어서고 전국을 가로지르며 송전탑이 박힌다. 서울의 깨끗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전국 곳곳으로 쓰레기가 대량으로 옮겨지고 쓰레기산이 솟아난다. 이렇듯 거대 도시의 삶은 지역의 미래를 빼앗으며 구축된다. 또한 이는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한데, 제3세계는 제1세계의 쓰레기를 떠안고, 바다에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의 거대한 섬이 떠다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평등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역민들, 제3세계인들, 미래 세대에게 ‘지구의 한계를 인정하고 유한한 삶을 받아들이자’는 선언은 얼핏 성장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잔인한 요구처럼 보일 수 있다. 기성세대와 제1세계, ‘발전된’ 도시들은 마음껏 채취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며 자산을 축적해 왔으면서, ‘왜 모든 문명적 파국의 청구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 발송되는가’에 대한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다. 그러나 우리의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사유의 반전을 제안한다. 빈곤층과 지역을 옥죄는 진짜 원인은 생태적 한계 그 자체가 아니라, 한계를 망각한 채 무한 성장을 강제하며 우리 모두를 끝없는 경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전 세계의 ‘성장주의’ 체제 자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탈성장과 생태적 사유는 제3세계나 미래 세대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씌워 놓은 허구적 경쟁의 굴레에서 이들의 삶을 해방시키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사유의 시작: 나와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출구 없는 방에 갇힌 듯한 이 불안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이 책은 그 불안의 출구를 먼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스스로를 타인과 분리하고 대립하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사유하도록 훈련받았다.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는 승자독식의 경쟁 문법,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혐오와 분리의 정치는 우리를 더욱 고립시키고 우리 주변에 미시적인 파시즘의 징후들을 만들어 낸 다. 그러나 생태적 지혜는 인간이 결코 독립된 주체가 아니며, 무수한 (비)인간 객체와 얽혀 있는 ‘관계의 장’ 속 한 마디임을 깨닫게 한다.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가 제시한 세 가지 생태학(마음 생태, 사회 생태, 자연 생태)의 삼원 도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강물이 오염되고 기후가 파국으로 치닫는 ‘자연 생태’의 위기는, 인간 사이의 연대가 파괴되고 플랫폼 노동처럼 서로를 착취하는 ‘사회 생태’의 붕괴와 직결되어 있으며, 이는 최종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불안과 우울로 잠식하는 ‘마음 생태’의 위기로 귀결된다. 따라서 우리의 불안을 치유하고 출구를 찾는 여정은 단순히 환경 보호의 차원을 넘어선다. 내 마음속에 도사린 무한 성장의 욕망을 성찰하고, 사회적 관계망에서 파괴된 호혜성을 복원하며, 마주치는 모든 생명과의 연결을 회복하는 복합적인 존재의 생산, 즉 공생적인 주체성 생산의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구라는 공유지에서 나이, 성별, 계급, 위계를 넘어 나의 욕망을 새로운 수많은 ‘되기(becoming)’로 이어갈 때,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생태적 삶의 활력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많은 개념어의 웅성거림은 불안에 떠는 우리를 각자도생의 고립에서 벗어나 새로운 ‘우리’로 엮는 언어의 그물이 될 것이다. 자본이 사유화해 버린 삶의 기반을 공통의 장으로 되찾는 커먼즈(commons)의 지혜, 성장의 속도를 늦추고 삶의 질과 기쁨을 재발견하는 탈성장의 가치, 그리고 지배적 질서에서 벗어나 소외된 자들과 연대하는 소수자 되기의 미시 정치는 결코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가치가 다해 버려진 ‘쓰레기’의 문화를 성찰하고, 자본의 소유권을 넘어 서로를 돌보는 호혜적 관계를 발명해 나가는 일상적 실천에서 시작될 것이다.


  1.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12, 327쪽. 인용된 문장에서 ‘에스토버스(estovers)’란 세 가지 기본적인 필요, 즉 집을 짓는 일, 집을 보호하기 위해 담장을 치는 일, 땔감으로 쓸 목재를 취하는 일 등을 행할 수 있는 권리(집 수리권, 산 울타리권, 땔감권)를 통칭하는 말이다. 또한 에스토버스는 ‘생계 자급, 영양 섭취 및 섭생’을 의미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관습에 따라 숲에서 채취하는 것’을 가리키며 종종 ‘생계 자급 일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홍승하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일했고, 노동자서민의 금융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다람쥐회 회장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지금은 생태적지혜연구소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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