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발달은 전체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가속화할까? 『가상계』 제8장 「낯선 지평」 독후기

2000년을 전후하여 마수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양면성에 주시하였다. 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자유의 지평을 확장해 주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역효과’를 유발하리라는 것 또한 명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20세기 이래 전개되어 온 전체주의와의 싸움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12월인 지금, 대화형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의 발달은 2000년 전후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 못지않게 전체주의 강화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수미의 「낯선 지평」을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를 읽어내는 시도로 읽어보는 것은, 매일 자유로워지기 위해 유용할 것이다.

샛길들을 잠복시킨 색채론 – 『가상계』 제7장 「밝기 혼동」 독후기

‘단도직입적으로’ ‘딱 잘라’ 말하는 것은 나름 멋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하거나 흐릿한 면도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때로 그런 흐릿함·혼동 그리고 회색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상대주의는 피곤을 넘어서 혼란과 파괴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 또한 세상의 일부이다. 나아가 세상 자체가 흐릿하고 회색인데 여태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쏟아 온 것일는지도 모른다.

바라보기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가상계』 제6장 「시각적 “전체장”의 카오스」 독후기

짧은 인류사 속에서도 인류가 이성의 합리성을 그런대로 공통적으로 승인한 듯한 기간은 그야말로 번갯불이 번쩍하는 순간만큼이나 더 짧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필 ‘우리’는 그 짧은 순간 속에 살고 있기에, 이성의 합리성과 그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틀로 제시한 형식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무척 힘겨워한다. 그러는 사이, 이성의 합리성 위에 세워진 세계는 치유 불가능할 것 같은 질병에 빠져들어 버린 느낌이다. 다른 세계관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시각적 “전체장”의 카오스」는 그 다른 세계관을 여태까지와는 다른 어법으로 설명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과 가상계를 나눌 수 있는가? – 『가상계』 제5장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 독후기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세계를 인식하고 기록하는 방식 혹은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제1속성 혹은 중요한 특성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20세기를 거쳐오면서 과학자들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는 판단과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세계 자체를 더 생생하게 대변한다는 느낌을 동시에 가지는 듯하다.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제5장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에서도 그런 ‘판단’과 ‘느낌’의 마찰이 느껴진다.

‘자유의지 대 필연성’의 우화 – 『가상계』 4장 「이성의 진화론적 연금술- 스텔락」 독후기

『가상계』 4장 「이성의 진화론적 연금술- 스텔락」은, 베르그송·시몽동·들뢰즈·가따리 등이 창안한 세계관과 개념어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스텔락의 행위 예술을 해설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글에서 행위 예술은 세계관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우화 같아 보인다. 자유의지 대 필연성 문제가 이 글 전반에 잠복하여 있다.

하나일 수 없는 자본주의 – 『가상계』 3장 「소속의 정치경제」 파생문(派生文)

세계 설명들이 기반할 수 있는 논리는 하나여야 한다거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은 무뎌진 듯하다. 여러 논리들이 동시에 세계의 설명에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그 적용을 관리 통제한다고 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관리 통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나아가 자본주의가 자유의 지평을 확대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한 기대는 자본주의와 세계 자체에 대한 생각을 얽히고 꼬이게 만든다. 그 얽힘과 꼬임의 양상과 거리를 두면서, 인류가 하나의 논리 즉 형식논리로부터 한 발 벗어나던 단계를 반추해 본다.

레이건스럽게 이미지-장착된 미국의 대통령들 –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2장 「출혈」 독후기

과학적 사고를 통하여 실체(實體)[substance]의 존재(存在)[being]를 증명하였다고 확신하면서, 실체성에 기반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말의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도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관과 현실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이다, 20세기말에서 21세기초에 걸쳐, 미국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실체성 기반 세계 이해와 레이건스럽게 이미지-장착된 대통령직의 충돌은 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집은 어디에 있는가? – 〈황우양씨 막막부인〉 독후기

무가(巫歌)인 성주풀이는 수렵이동 문화에서 농경정주 문화로 바뀌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는 지금 여기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도움이 되며, 농경정주 문화와 지금 여기의 문화 사이의 불연속성 또한 드러내고 있다. 황우양씨 유형 성주풀이와 그것의 요약본인 〈황우양씨 막막부인〉 읽기는 텍스트로부터 문화 변동 자체를 재구성해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불연속성을 소화해내는 것을 체험하고 훈련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상상을 제약하는 관성적 사고를 들춰보다 -〈하늘못 백장군〉 독후기

세상을 바꾸려는 운동이나 대안 추구에 있어서 방향을 정하여 줄 이념과 가치는 소중하다. 이에 더하여, 전체 비전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하고 주변적인 것으로 보이는 단순한 정보가, 운동의 방향에 미세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운동 과정에 끼어든 그 미세한 영향 때문에 운동의 결과가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백두산 설화 읽기를 통하여 그와 같은 경우를 들여다보자.

천지를 창조한 다음 법을 세우다-〈창세신화 천지왕본풀이〉 독후기

제주의 무가인 〈천지왕본풀이〉는 함흥의 무가인 〈창세가〉 뒷부분을 잘라 주인공 이름 만 바꾼 느낌을 주는 노래다. 이 두 노래 속의 이야기들을 겹침 없도록 잘 다듬어 읽다보면, 개벽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한 번 더 읽다 보면, 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정리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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