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게티, 횡단의 음악』 을 읽고 ② – 지나가고 순환하는 강렬함 속 횡단의 선

이번 글의 중심은 사실 쇤베르크가 연 무조성의 음악을 어떤 형식을 가지고 담느냐의 문제입니다. 음렬주의 작곡가들은 그것을 구조화된 순서의 나열로 해결하려 했다면 리게티는 그것의 문제점을 넘어 아니, 딛고 평준화를 통한 음들의 덩어리, 음향 음악으로 돌파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단지 느슨하게 소리 울리는 조직으로 짜여지는 형식형상화 방식으로 말이죠.

지난 글에서는 현대음악가 리게티가 음악을 시작할 당시의 음렬주의 음악의 태동과 음렬주의 음악가들에 대한 소개를 하였습니다. 그동안 서구 음악에서 진행되었던 수직적인 나무 구조인 조성음악 (‘도’ 가 강력하게 있는) 을 넘어서는 ‘도’의 해체로 인한 12개의 반음으로 이루어진 음렬주의 음악의 시작을 설명하였습니다. 12개의 고원에서 우리는 리게티가 개척하였던 횡단의 선들을 이제 좇아가려 합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적 개념들과 함께 말이죠.

음렬적인 것을 넘어서

리게티 역시 스스로 음렬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이후 테마(주제)적이고 조성적 사고를 대체하는 새로운 음악관, 즉 ‘음렬적 사고’ 를 공통의 근거를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리게티는 이 책에서 나온 아래와 같은 음렬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나갑니다.

먼저 리게티는 음렬주의 음악에서 음악적 요소들의 평준화 과정을 주목하였는데, 이는 여러 음렬이 동시에 진행할 때 각 음렬들의 고유한 음정 관계나 음길이 등이 오직 통계적으로만(몇 번 사용되었는가) 가능하고 실제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번에 제시되었던 불레즈의 곡 〈구조 1a〉에서 여러 음렬의 동시 진행의 결과는 여러 음렬이 겹쳐져 끊임없는 32분음표라는 평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장이나 광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일정한 소음 덩어리로 들려 특정한 리듬으로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둘째, 리게티는 초기 음렬주의 음악이 극히 세분화된 강세(pppp, ffff 등)를 자주 사용하면서 모순적인 결합이 발생함에 따라 작곡가의 강제적 임의 조작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작곡 과정과 소리나는 것의 불일치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세째, 리게티는 음들의 내재적 관계를 중시하였는데 음렬음악에서는 사전 규정된 음악 요소의 일람표가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번 글에서 봤던 음악 요소들 배열에 대한 사전 약속표말입니다.

네째, 리게티는 음렬주의 음악에서 음악적 요소들 간의 우연을 비판하였습니다. 리게티는 완결적인 형식의 형상화가 중요하며 작곡가는 작품의 재료적 요소를 자유로이 다뤄야 하고 새로운 연관을 만들어내는 전체로서의 일관성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작곡가는 작품의 소재를 나열, 배치하는 것만이 아닌 그것들을 응집시키는 어떤 일관적인 구도 내지 계획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리게티가 음렬주의에서 배운 것은 작품의 내적인 정합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성 음악의 해체 이후 진행되었던 음렬주의 음악 또한 종래의 조성 음악과 같이 나무 구조의 수직적인 체계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즉,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덧코드화, 12개음들 위에 음렬을 구성하기 위한 일람표가 덧씌워졌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음악적 요소들의 상이한 영역이 이질적으로 결합되는 구성, ‘일자’, 나무구조가 아닌 ‘퍼지적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즉 ‘리좀’의 형태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리좀이란 들뢰즈 가타리가 공저한 『천개의 고원』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유일을 뺀 n-1의 다양체입니다. 뿌리와 가지들의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나무 구조가 아닌 구근과 덩이줄기와 같은 리좀의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리게티 또한 유일자인 ‘도’를 뺀 조성음악 이후의 다양체를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나무 구조에서 내려와 퍼지적인 통일성을 고민한 것을 보면 말이지요.

그럼 일자적 통일성이 아닌 일관된 형식 형상화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이를 고민하던 리게티는  음렬음악의 도식적인 구성이 아닌 우연음악의 구속력 없이 자유롭지도 않는 단지 느슨하게 소리 울리는 조직으로 짜여지는 형식형상화 방식을 제안합니다. 리게티는 이를 정지된 음악이라고 불렀습니다.

정지된 음악 : 리게티 초기작품의 구도

리게티는 위에서 언급한 음렬주의 음악의 평준화를 비판하며 ‘아예’ 극단적 형태의 선율, 화성, 리듬의 완벽한 평준화를 만들어냅니다. 음악의 기본요소인 선율, 화성, 리듬의 해체를 통하여 말이죠.

아래의 리게티 작품은 이 평준화를 특징으로 하는 곡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군중이 떠듬과 같이 하나의 음향 ‘덩어리’ (sound mass)들, 아니면 저 멀리 우주에서 들릴 것 같은 (실제 우주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네요) 우주의 소리들이 진행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냅니다. 여기에서 각 음악적 요소들은 개별화된 특징을 버리고, 아니 특징들이 대규모로 합쳐져 하나의 ‘음악적 효과’를 나타냅니다. ‘음렬적 사고’의 하나로 작동하게 만든 것이죠.

Didier Guigue의 YouTube – Ligeti – Atmosphères (1961)

고른판/기관없는 신체로서의 정지된 음악

리게티 초기작품 구도는 이렇게 음향 흐름이 전진하는 역동성보다는 정지해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마치 기계적인 시간을 배제하였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주 안에 떠 있는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리고 오직 상대적인 흐름의 시간만이 있는 공간. 여기에서 저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였던 고른판 개념을 떠올려 봅니다.

…정말이지 고른판 위에는 더 이상 형식도 실체도 없으며, 내용도 표현도 없고, 상대적 탈영토화도 각각의 탈영토화도 각각의 탈영토화도 없다. 하지만 지층들의 형식과 실체 아래에서 고른판은 강렬함의 연속체들을 구성한다. 고른판은 서로 다른 형식들과 실체들로부터 추출해 낸 강렬함들을 위해 연속성을 창조한다.

-『천개의 고원』 139쪽

고른판처럼 리게티의 정지된 음악은 당시 전통적인 요소들, 선율, 화성, 리듬을 해체한 윤곽없는 음향흐름,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음향 덩어리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기관없는 신체가 조용히 흐르는 음향 덩어리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기관없는 신체’라 함은 알과 같다고 합니다. 강렬함이 0인 알. 그리고 그 기관없는 신체들의 집합체는 강렬함의 연속체라고 하였습니다. 리게티의 정지된 음악으로서의 음향덩어리를 보고 (듣고) 있자면 그동안의 전통적인 음악적 요소들이라는 유기체, 기관들의 유기적인 조직화를 해체하고 생성된 기관없는 신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음향덩어리, 기관없는 신체인 고른판은 강렬함만을 품고 서서히 절대적인 시간도 잊은 채 움직입니다. 에너지의 흐름이죠.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는 강렬함에 의해서만 점유되고 서식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강렬함만이 지나가고 순환한다…. 그것은 특정한 정도로 – 생산된 강렬함들에 대응하는 정도로 – 공간을 점유하게 될 물질이다… 이 물질은 에너지와 똑같다. 강렬함이 0에서 출발하여 커지면서 실재가 생산된다.

-『천개의 고원』 294쪽

또한 정지된 음악의 특징으로는 음향흐름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음향복합체들의 끊임없는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크로폴리포니와 운동음색이라는 작곡법이 나옵니다.

미크로폴리포니

미크로폴리포니는 미크로는 마이크로와 같은 뜻으로 극미, 미시적인 뜻이고 폴리포니는 다성음악으로 멜로디가 두 개 이상의 라인이 동시에 소리나는 것을 말합니다. 아카펠라처럼 말이죠. 음향복합체에서 미시적인 차원에서 상이한 성부들(멜로디 라인들)이 지속적으로 음들이 겹쳐짐으로써 새로운 음색을 창출해냅니다. 이는 리게티가 미국에서 경험한 전자음악의 변화무쌍한 음색의 변화를 실제 많은 악기에서 소리나는 성부들의 미세한 떨림을 겹쳐 만들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운동음색

여기서 나오는 개념이 운동음색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운동음색은 빠르게 움직이는 (떨리는) 음들이 새로운 음향적 질로 느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각각의 성부들은 미세하게 반음계로 떨리며 다른 성부들과 동시에 만나 새로운 음색, 즉 음향덩어리를 창조해내는 것이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차이와 반복을 통하여 새로운 음색이라는 탈영토화가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음향과 그의 덩어리들… 그리고 운동음색을 창조하며 떨리는 음향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머금으며 어딘가로 정처없이 나아갑니다. 마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같습니다. 물론 그 성은 얇은 다리와 팔을 가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정처없이 나아가는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다리도 손도 없는 기관 없는 몸체, 신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음악적 관례들인 선율, 리듬, 화성을 해체하고 시간도 잊은 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음향 덩어리들은 나름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지되었으나 정지되지 않은 음악입니다.

들리는 음향으로서의 상상력

리게티는 조작되는 작곡방식이 아니라 들리는 음향을 일차적으로 중시하였다고 합니다. 전체로서의 형식과 소리 울리는 음악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구사되어야 하며 자신의 구성은 소리의 결과와 부합되어야 한다고 리게티는 말합니다. 즉, 들려지는 음향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앞에서 소개한 리게티의 주요 음악 특징인 ‘미크로폴리포니’,  ‘운동음색’ 작곡방식으로 진화를 하게 만든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Erinnmnn의 YouTube – Lontano – György Ligeti (1967)

음렬주의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리게티의 음악들은 그동안 새로운 세계를 열었던 음렬주의를 딛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음렬주의는 종래의 나무구조와 같은 중심이 있는 조성음악에서 탈피하여 ‘1’ 도뿐만이 아닌 반음계의 12음으로 권력을 이양하였다는 것이며 이는 나무구조에서 점차 수평적이고 네트워크화할 수 있는 리좀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글의 중심은 사실 쇤베르크가 연 무조성의 음악을 어떤 형식을 가지고 담느냐의 문제입니다. 음렬주의 작곡가들은 그것을 구조화된 순서의 나열로 해결하려 했다면 리게티는 그것의 문제점을 넘어 아니, 딛고 평준화를 통한 음들의 덩어리, 음향 음악으로 돌파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단지 느슨하게 소리 울리는 조직으로 짜여지는 형식형상화 방식으로 말이죠.

하나의 ‘도’를 위한 나무구조가 아닌 ‘퍼지적 통일성’이라고도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아직 리좀의 형식은 멀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리게티 음악은 이제 시작입니다. 음렬주의를 넘어 광활한 수평의 대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리게티는 어떤 것을 상상하였을까요? 기관없는 신체의 고른 판 위에서 리게티는 어떤 기관을 만들어낼까요?

다음 시간에 좀 더 리게티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신동석

음악에 관심이 있다 본격적으로 음악 만드는 공부를 하고 있다. 재즈를 전공하고 있지만 모든 음악에도 관심이 있다. 환경과 관련된 일반적인 관심이 있지만 일반 이상의 관심을 가지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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