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⑯ 40년 만에 찾아간 소록도

젊은 시절, 보성댁은 남편 상덕씨의 일자리를 따라 소록도에서 살았었다. 11개월간의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지난 시간은 꿈 같았다. 소록도와 녹동 사이에 다리가 놓이고 사람들이 구경을 간다는 소식을 들은 딸과 사위는 보성댁을 모시고 소록도를 방문한다.

마당에는 여름을 넘긴 방아가 보라색 꽃을 한창 피워 올리고 그 꽃에서 꿀을 얻고자 벌들이 붕붕거리고 주황 빛깔에 점박이 무늬가 있는 나비도 이 꽃 저 꽃 분주히 오가고 있다. 오전에 성당에 갔다 와서 점심을 먹은 후 설거지를 마친 보성댁은 그런 마당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딴 동네는 다아 비가 온다는디 어째 이 동네는 통 비가 안 올끄나. 참 이상하단 말이여.’

집 앞에 차가 멈추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텅텅 차문 닫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곧이어 대문이 열리고 큰딸이 들어서고 뒤이어 사위도 들어왔다.

“아이 오냐! 먼일로 오냐?”

“먼일은요. 엄마 한번 보고자운께 왔제.”

“어머님, 별일 없으셨어요?”

“이이, 나야 머 그렇제. 얼렁 들어오소.”

“엄마, 얼른 옷 입으씨요. 우리랑 바람 쐬러 갑시다.”

“잉? 어디? 무슨 바람을 쐬?”

“아하, 존 데가 있응께 어머님 가십시다. 처제도 오라고 했어요. 지금 오고 있당께 오믄 가십시다.”

“이, 엄마 미자 곧 옹께 옷 입고 있습시다. 이거 입으까요?”

큰딸이 주섬주섬 걸려 있는 옷을 들춰 보더니 왼쪽 어깨와 가슴 사이에 꽃모양이 붙어 있는 초록색 겉옷을 골라 줬다. 아이, 야들이 어디를 가자고 이런다냐. 속으로 중얼거리며 큰딸이 골라준 옷을 입고 들고 나갈 가방을 챙기고 있으니 미자가 들어온다.

“아이, 어딜 가자고 이런다냐.”

보성댁은 왠지 셋째딸 미자가 가장 맘이 편하고 좋았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다른 자식들에게 잘 하지 않는 이야기를 셋째딸에겐 비교적 쉽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 미자도 보성댁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아, 엄마. 요전에 녹동에서 소록도로 다리가 놔졌다요. 그래서 사람들이 소록도 구경을 가쌓는디, 우리 예전에 소록도 살다가 왔잖아요. 긍께 우리도 한번 구경 가자고요.”

“이, 소록도에 다리가 놔졌다냐. 아이고야 그랬구나. 참 그때 소록도 살 적에 참 재미있었니라.”

사십 대 젊은 시절에 11개월간 살았던 소록도,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 소록도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열한 달을 살고 나온 소록도에 근 40년 만에 가보는 것이다. 그때 살았던 각시들은 인제 없겄제. 하긴 있어도 알아보도 못 흘 것이고 볼 수도 없겄제. 큰사위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미자와 같이 앉은 보성댁은 젊었던 시절 소록도에서의 추억에 잠기고 그때의 기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이고야, 그때는 왜 그리 오래도 걸리냐. 길은 울퉁불퉁 꼬불꼬불허고…… 뻐스 타고 하루종일 갔다. 느그 아부지는 이삿짐 트럭 타고 가고, 나는 아그들 데꼬 뻐스 타고 가고, 미자 야가 멀미를 해가꼬 버스에서 막 토하고…… .”

아이들은 처음 보는 자갈도 보물처럼 대했다.
사진출처 : BeaTzJooDy

그렇게 녹동에서 버스를 내려 배를 타러 선착장으로 나갔다. 생전 처음 배를 타보는 아이들은 겁을 내면서도 재미있어했다. 뱃전에 고개를 내밀고 배에 부서지는 물살을 구경하며 아아아 소리를 내기도 하고 흔들리는 배 가운데에서 손을 놓은 채 균형을 잡아보려 하며 배의 흔들림에 따라 비틀거리기도 하였다. 녹동에서 건너다보여 크게 소리를 지르면 들릴 것처럼 가까운 곳이라 배를 타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이들은 ‘호시 왔는디?’ 하며 아쉬운 얼굴로 배에서 내렸다. 보성댁은 배에서 안고 있던 막내를 다시 고쳐 업고 가족이 살 집으로 향했다. 성당에서 보낸 사람이 집까지 안내해 주기 위해 나와 있어 집을 찾는 어려움은 없었다. 배에서 내린 아이들은 선창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깔려 있는 돌을 보고 신기해했다. 살구씨보다 조금 큰 듯한 까만색의 조약돌이 집으로 향하는 길에 깔려 있었다. 반들반들하고 까만 돌멩이를 처음 보는 아이들은 돌을 한 주먹씩 집어 들고 좋아했다. 치마를 입은 딸들은 치마를 앞으로 들어올리고 그 치마 안에 돌을 가득 담아 들고 졸졸 따라왔다. 선창에서 언덕 위로 올라오니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가 성당입니다.”

길을 안내해 주는 이가 말했다. 아이를 업고 성당을 바라보고 걸어갔다. 순천에 비하면 작고 아담한 성당이었다.

“헤에, 짝다.”

아이 중 누군가 말했다. 성당을 지나 오른쪽에는 위로 왼쪽에는 아래로 숲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어디만큼 가자 길을 안내해 주던 이가

“저 밑에 저기가 학교입니다.”

왼쪽 아래를 가르키며 말했다.

“헤에! 학교도 짝다.”

미선이가 말했다. 이어 미자도 그러네, 짝네. 했다. 조금 걸으니 넓은 광장 같은 것이 나왔고 그 건너편에 이 섬에 있는 건물 중 가장 큰 듯한 병원 건물이 보였다. 병원 위에는 ‘나병은 낫는다’라고 커다랗게 써 붙여져 있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들은 저마다 번갈아 가며 나병은 낫는다를 소리 내어 읽었다. 좀 더 걸어가니 왼쪽 아래엔 전에 미감아 수용시설이었던 건물이 낡아가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몇 발짝 못 가서 오른쪽 언덕 위에 교회 건물이 서 있고 그 건물을 지나치니 보성댁 가족이 살 집이 보였다. 마당으로 들어선 아이들은 각자의 손에, 치마에 소중하게 담아온 까만 조약돌을 마당에 우수수 쏟아 버렸다. 마당 가득 검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삿짐을 이미 내려놓고 용달차는 떠나고 없었다. 보성댁과 상덕씨는 집까지 길을 안내해 준 안당씨의 도움을 받아 짐을 집안으로 옮기고 정리를 하였다. 아이들도 각자 들 수 있는 가볍고 작은 짐들을 함께 집안으로 같이 들였다.

수녀들이 살던 집이었다는 이 집은 아마도 보성댁 일생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집이 아니었을까. 넓은 마당에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데 가운데에 앵두나무가 심어진 금잔디밭이 네모 모양으로 자리잡고 빙 둘러서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아직 쌀쌀한 삼월이라 피어있는 꽃은 동백 정도였다. 그 정원을 옆으로 두고 좀 더 들어가면 집이 있는데 마당 쪽으로 난 출입문을 열면 긴 복도가 있고 그 복도를 따라 방이 세 개 연달아 이어졌다. 복도를 따라 삼분의 이쯤 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복도가 있는데 그 복도의 왼쪽에는 목욕탕과 화장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현관문, 더 앞으로 가면 부엌이 있는 집이었다. 부엌이 넓어서 비가 와도 집안에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구조였고 절구도 부엌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화장실도 집안에 있어서 비가 와도 비 맞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어 좋았다. 전체적으로 일본식 구조여서 방문은 다 미닫이였고 방마다 반침이 있어서 따로 농 같은 가구가 없어도 괜찮았다. 순천에서 살던 집도 일본식 반침이 있는 일본식 구조의 집이었다. 딸들은 언니 오빠들과 북적이며 지내다 자기들만의 방이 생기니 좋아했다. 아이들이 복도를 통통거리며 뛰어가다 한 방에 들어가더니 방에 풍금이 있다면서 좋아했다. 아이들은 풍금 앞에서 페달을 열심히 밟아대며 “학교종이 땡땡때앵~~”하고 건반을 누르며 놀았다. 목욕탕은 탕에 물을 받고 밖에서 불을 때서 물을 데우는 일본식 목욕탕이었다. 순천에 있던 집과 달리 부엌에서 때는 불이 방을 데우는 구조는 아니었다. 부엌엔 조리를 할 수 있는 아궁이가 있었고 방마다 난방은 연탄으로 따로 하는 구조였다. 아직 쌀쌀한 때여서 연탄값을 아끼기 위해 처음엔 모두 한 방에 모여서 잤다. 날이 따뜻해져서 난방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을 때 아이들끼리 자게 했다.

“그때 나가 동네 각시들이랑 바다에 같이 좀 댕갰제.”

보성댁이 40년 전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 각시들은 늘 바다에 댕갰는디 난 이사와 가꼬 강께 다 서툴러가꼬 멀 통 못 잡았는디, 언제 한 번은 해삼을 크다난 것을 안 잡았냐.”

소록도 바다의 물은 맑았고 뻘은 별로 없었다. 섬 주변의 바다 속은 모래와 자갈이 많았다. 소록도에 와서 알게 된 아낙네들과 바다에 가면 다른 아낙들은 문어며 해삼이며 곧잘 잡았지만 보성댁은 어른거리는 물속에서 자갈과 문어나 해삼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작은 해삼을 잡기도 하고 조개 같은 것을 잡기도 했다. 그렇게 잡으면 식구들 한 끼 반찬이 되었다. 그날도 물속을 더듬더듬 더듬고 다니는데 좀 큰 돌인 줄 알고 짚은 곳에 해삼이 있었다.

“옴마야, 이것이 머다냐!”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보성댁은 손에 닿는 감촉이 물컹했던 것을 황급히 들어 올렸다.

“오매야, 해삼이다 해삼. 지인짜 큰 거네.”

“아이구야, 안나씨가 모처럼 큰 거 하나 잡았네.”

“와, 잘 했네 안나씨!”

“우와, 저 해삼 진짜 크네.”

다들 떠들썩하게 보성댁을 축하해 주었다.

“그때 그 놈을 가꼬 와서 썰어논께 도마에 한가득이었당께. 얼마나 오지든지.”

“그때 해삼 실컷 먹었니라. 느그 언니는 징그럽다고 안 묵은디 미자 니는 잘 묵드만. 아그들 중에서 젤 잘 먹었어.”

바닷가에서 추억에 잠긴 보성댁.
사진 출처: habunman

순천에서 학교에 다니느라 같이 소록도에서 지낸 날이 며칠 되지 않은 큰딸은 그저 이야기로만 들었던 일이다. 저 이야기를 몇 번째 하는 건지. 시간이 흘러도 그 기억은 선명한가 보네. 하긴 모처럼 해삼을 그것도 도마에 꽉 찰 만큼 큰 놈을 잡았응께 좋기도 하셨겄네. 그렇게 생각하며 큰딸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를 생각하며 기분이 좋았는지 그 오래 전 살던 곳을 가보게 되어서 들떴는지 보성댁은 기분좋은 얼굴로 그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난중에는 또 문어를 안 잡았냐.”

“어무니, 인자 다 왔는갑소. 쩌그 다리 보이네요.”

사위가 보성댁의 말을 잘라 버렸다. 차가 녹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록도로 가는 배를 타던 선착장을 지나가니 앞에 공중에 뜨다시피 놓인 다리가 보였다. 차가 언덕길로 올라가더니 허공에 떠 있는 다리로 들어갔다.

“오메… 나환자촌으로 들어오게 돼있구나.”

“아이, 쩌그쩌그 좀 봐라. 성모상이 동굴 안에 있지야? 그 발밑으로 물이 흐른다 마다. 그 물이 그 밑에 연못으로 모인단 말이다. 얼마나 좋냐?”

소록도에 살 때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나이여서 엄격하게 통제되던 나환자 거주 구역으로 들어와 본 적이 없는 미자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참, 어떻게 저런 자리를 찾아서 성모상을 세웠을까나.’

어렸을 때 어른들만 들어갈 수 있어서 사진으로만 봤던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건 흥미로운 일이기도 했다. 모두 차에서 내려 공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정원이 참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었다. 많은 나무들이 저마다의 멋을 뽐내며 자리잡고 있었지만 유난히 눈에 띄게 아름다운 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조경을 정성들여 한 건지 원래 그런 건지 커다란 밥그릇을 엎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어무니, 이 나무 멋있지라. 이것이 금송이라는 것인디. 전두환이가 와서 보고 이걸 파 갈라고 했다요. 근디 나무 전문가가 이걸 옮겨 심으믄 살리기 어렵다. 욕만 먹고 아까운 나무만 죽인다고 목숨 걸고 말례 가꼬 안 갖고 가고 놔뒀다요.”

사위가 어디에서 들은 게 있는지 아는 체를 했다.

“이, 그랬당가. 그 전두환이는 오나가나 욕먹을 짓거리만 했구만 이.”

발걸음을 옮겨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옛 병동 건물이라는 데가 보였다. 빨간 벽돌 건물들이었는데 그 안에 붙여진 설명의 내용은 끔찍했다. 한센병 환자를 수용했던 시설에서 환자들에 대해 벌어지던 처참한 인권유린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 글들을 딸들이 읽으며 설명해주는데 몸서리가 쳐졌다. 서둘러 나와서 좀 걸으니 더이상 들어갈 수 없게 막아둔 곳에 환자 마을 성당이 보였다. 그곳부터는 환자들이 직접 생활하는 공간이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성당을 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보성댁은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 막아둔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예, 아자씨. 난 신잔데 그 성당에 좀 들어가믄 안 되까요?”

“예?”

“나가 옛날에 여기 소록도에 쪼깜 살았는디 나가 성당에 다닌단 말이요. 이 성당에도 옛날에 들어가 봤는디, 들어가서 기도 좀 하고 잡소. 쫌 들어 갑시다.”

“아, 동네에는 절대로 안 가께요.”

호기심에 환자들 사는 곳에 가고 싶어 하는 걸로 비칠까 봐 황급히 덧붙여 말했다.

“글믄, 성당에만 들어갔다 나와야 돼요. 잉?”

“하믄요 하믄요. 고맙소 이.”

성당으로 향하는 보성댁을 따라 딸들과 사위도 들어 왔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며 보성댁은 좀 전에 병동에서 봤던 걸 떠올렸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큰딸도 보성댁을 따라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데 셋째딸과 사위는 그 옆에서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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